[중앙아시아의 그림자 투르크메니스탄편 #001] 마나트의 덫 – 6-2화: 탈출의 길

6-2화: 탈출의 길

새벽 5시, 한진우는 잠에서 깼다.

호텔 방은 아직 어두웠고, 커튼 사이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이 바로 출국하는 날이었다. 베르디예프가 약속한 서류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여권, 출국 비자, 그리고 외교관용 신분증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에는 비행기 티켓도 들어 있었다. 아시가바트에서 이스탄불을 경유해 인천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이었다. 출발 시간은 오후 4시. 아직 11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서둘러 움직이기로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짐을 꾸리는 동안, 그는 지난 한 달을 곱씹었다. 5만 달러를 들고 도착한 평범한 무역회사 대리에서, 1,000만 달러 이상의 불법 자금 흐름을 기록한 장부를 쥔 사람으로. 그 사이에 그는 구르반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고, MNB의 감시를 받았으며, 결국 시스템을 역이용해 빠져나올 출구를 찾았다. 모든 것이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캐리어를 닫고, 그는 방 안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흰색 천장, 흰색 벽, 흰색 침대 시트. 이 방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제 이곳을 떠난다.

오전 8시, 진우는 빅토르의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빅토르는 여느 때처럼 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구형 컴퓨터 화면에는 뉴스 사이트가 띄워져 있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이군요.”

“네. 오후 4시 비행기입니다.”

빅토르는 담배를 비비고 일어나 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우는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악수했다.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당신이 스스로 살아남은 거예요. 나는 그냥… 길을 조금 알려줬을 뿐입니다.”

빅토르는 책상 서랍에서 작은 종이 봉투를 꺼내 진우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낡은 흑백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소련 시절의 가족사진이었다. 빅토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아버지가 카라쿰 사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이걸 왜…”

“가지고 가세요. 내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만약 한국에서 내 조상을 찾게 된다면, 그때 이 사진을 보여주세요.”

진우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빅토르가 덧붙였다. “나는 여기 남아서, 당신이 설계한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볼 겁니다.”

“구르반은요?”

“구르반은 당신이 떠난 후에도 계속 장사를 하겠죠. 하지만 이제 그는 MNB의 눈을 피해 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거예요. 당신이 남긴 장부가 베르디예프의 손에 들어간 이상, 구르반도 더 이상 예전처럼 자유롭지는 못할 겁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르반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그도 진우를 이용했고, 진우도 그를 이용했다. 그것이 이 도시의 규칙이었다.

사무실을 나서기 직전, 진우는 마지막으로 빅토르에게 물었다.

“빅토르 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입니까?”

빅토르는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여기서 계속 살 겁니다. 이게 내 나라니까. 비록 나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라도, 내 뼈는 이 땅에 묻힐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당신은 돌아갈 곳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꼭 돌아가세요.”

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낡은 사무실을 나섰다.

오후 1시, 진우는 호텔을 체크아웃했다.

로비에는 구르반의 부하 한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르반이 직접 배웅 나오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 부하가 작은 상자 하나를 진우에게 건넸다.

“보스가 전하라고 했습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투르크메니스탄산 카펫이 들어 있었다. 손바닥 두 배 크기의 작은 카펫이었지만, 문양이 정교하고 색감이 깊었다. 진짜 명품이었다. 진우는 상자를 닫아 캐리어에 넣었다.

“구르반에게 전해주세요. 감사했다고.”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진우는 호텔 정문을 나서 택시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자, 백미러 속에서 호텔 건물이 점점 작아졌다. 한 달 동안 그를 가둔 공간이자, 동시에 그를 지켜준 요새였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아시가바트의 거리는 여느 때처럼 텅 비어 있었고, 흰색 대리석 건물들만이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진우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이 풍경을 마지막으로 기억에 담았다. 다시는 보지 않을 도시였다.

공항 진입로에 접어들자,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공항 터미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는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한 달 전, 5만 달러를 든 평범한 무역회사 대리였던 그는 이 터미널을 나서며 우주정거장에라도 도착한 듯한 착각에 휩싸였었다. 지금은 그 모든 기묘함이 익숙해져 있었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서자, 진우는 즉시 긴장을 느꼈다.

베르디예프가 보낸 변호사가 약속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40대 남자로, 검은 양복과 서류가방을 든 전형적인 관료 스타일이었다. 그가 진우에게 다가와 악수하며 말했다.

“한진우 씨, 출국 수속을 안내할 겁니다. 모든 서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의 뒤에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MNB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출국 게이트 근처에 흩어져 서서, 진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무라도프였다.

무라도프는 진우가 게이트로 다가오자 걸음을 옮겨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얇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진우 씨,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변호사가 즉시 나섰다. “무라도프 수사관님, 이분은 이미 제2국장님의 승인을 받은 출국 허가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무라도프가 변호사를 무시하며 진우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잠시,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진우는 변호사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무라도프와 진우는 게이트 옆의 한적한 구석으로 걸어갔다.

“당신이 베르디예프에게 장부를 넘겼죠.” 무라도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장부를 요구했을 때는 거절하더니.”

“당신에게 넘겼다면 저는 지금쯤 사라졌을 겁니다.”

“아마도. 하지만 그 장부 덕분에 베르디예프는 승진할 거고, 나는 좌천되겠죠. 당신은 그게 정의라고 생각합니까?”

진우는 무라도프의 눈을 바라봤다. “정의가 아닙니다. 그냥 생존이에요.”

무라도프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졌다.

“당신이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두세요. 당신이 이 땅을 떠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은 평생 당신을 따라다닐 거예요.”

“그건 제가 감당할 몫입니다.”

무라도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서서 걸어갔고, MNB 요원들이 그를 따랐다. 진우는 무라도프의 뒷모습이 공항 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변호사가 다가왔다. “출국 수속을 진행하겠습니다.”

출국 수속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베르디예프의 서류는 완벽했다. 투르크멘 국경 수비대는 서류를 한 번 훑어보고 도장을 찍었다.

면세 구역으로 들어서자, 진우는 처음으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공항 면세점의 진열장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특산품인 카펫과 보석, 그리고 말머리 모양의 금장식이 놓여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줄 선물로 작은 카펫 하나를 골랐다.

탑승 게이트 앞에 앉아, 진우는 벽돌폰을 꺼내 마지막으로 빅토르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속 끝났습니다. 곧 이륙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답장은 1분 만에 왔다.

“당신은 자유입니다.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행운을 빕니다.”

진우는 폰을 꺼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 벽돌폰은 필요 없었다. 가방 속에서 1년 넘게 전원이 꺼져 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자, 애플 로고가 떠올랐다. 카카오톡, 이메일, SNS. 이 모든 것들이 곧 다시 연결될 것이었다.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스탄불行 터키항공 345편.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탑승 게이트로 걸어갔다. 게이트 직원이 탑승권을 확인하고, 그를 통과시켰다.

보딩 브릿지를 걷는 동안, 진우는 마지막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시가바트의 하늘은 맑았다. 흰색 대리석 도시가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그를 가둔 도시. 그리고 그가 끝내 굴복하지 않은 도시.

비행기 좌석에 앉자, 승무원이 환영 인사를 건넸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바라봤다. 활주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활주로 끝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갑자기 속력을 내며 앞으로 쇄도했다. 기수가 들리고, 바퀴가 지면에서 떨어졌다.

창밖으로 아시가바트가 점점 작아졌다. 흰색 대리석 건물들이 장난감 블록처럼 축소되고, 도시 전체가 사막의 황토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이제 끝이었다. 최소한, 이 챕터는.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 시간으로 오후 5시였다.

진우는 환승 게이트로 향하며 스마트폰을 켰다. Wi-Fi에 연결되자마자 수백 개의 알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카카오톡 메시지, 이메일, 회사 단체톡, 아내의 문자까지. 그는 우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진우 씨! 지금 어디예요? 한 달 동안 연락이 안 돼서…”

수화기 너머로 아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스탄불이에요. 인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는 중이에요. 모레면 집에 도착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회사에서도 연락이 안 됐다고 난리고…”

“돌아가서 다 설명할게요. 지금은 그냥… 무사하다는 것만 알아줘요.”

통화를 마치고, 진우는 환승 라운지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5유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라면 마나트로 계산해야 했을 가격이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지난 한 달을 곱씹었다.

5만 달러로 시작된 여정은 1,000만 달러의 불법 자금을 추적하는 장부로 끝났다. 그는 범죄 조직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고, MNB의 감시를 받았으며, 결국 그 시스템을 역이용해 빠져나왔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가 한 모든 선택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유였다. 진짜 자유. 공항 라운지의 흔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인천行 비행기의 탑승 시간이 다가왔다. 진우는 커피잔을 비우고 일어서며, 주머니 속에서 작은 종이 쪽지를 꺼냈다. 터키 변호사가 건넨 명함이었다. 이스탄불에서의 일자리 제안. 그는 명함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 제안은 아직 유효했다. 그러나 지금은 집으로 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탑승 게이트로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스탄불의 하늘을 바라봤다. 한국에는 모레 도착할 것이다. 아내와 부모님,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서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굴복하지 않은 채로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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