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그림자 키르기스스탄편 #001] 천산의 핏빛 방주 – 2화: 강철 장부 (최종 완성본)

2화: 강철 장부

아이게림이 이곳에 갇힌 지 열흘째 되는 아침이 밝았다.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은 지하에 위치한 습기 어린 회계 사무실과, 철창이 달린 침실, 그리고 공동 화장실이 전부였다. 사무실의 유일한 창문은 땅바닥에 거의 닿을 듯한 높이에 있었고, 쇠창살 너머로는 말라 비틀어진 잡초와 신도들이 버린 담배꽁초만 보였다. 해발 2,500m의 차가운 공기는 벽의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들어 그녀의 발목을 얼렸다. 두꺼운 양말을 신어도 소용없었다. 뼛속으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그날 아침, 무라트는 그녀의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떨어뜨렸다. 최근 3년간의 수출입 신고 내역과 은행 거래 명세서였다. 두께만 거의 30센티미터에 달하는 그 서류 더미는 먼지 냄새를 풍기며 책상 위에 무겁게 앉았다.

“이게 네 첫 번째 작업이다. 실제 수출 물량과 세금 신고 서류의 숫자를 완벽하게 맞춰. 깔끔하게.”

무라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아이게림은 그의 손가락 끝이 서류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모습에서 무언가 예감했다. 장부를 펼쳐 보자 그 예감은 확신이 되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허브 추출물이 수출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대금은 키프로스와 두바이의 유령 법인을 거쳐 사라졌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이 거짓말에 살을 붙여, 외부 감사에서도 걸리지 않을 만한 완벽한 가짜 회계 장부를 만드는 것이었다.

숨이 가빠왔다. 은행에서 4년간 배운 모든 기술이 지금 이 순간, 국제적인 자금 세탁을 돕는 무기로 변하고 있었다.

“네 명의로 된 계좌다.”

무라트가 서류 맨 아래에서 통장 사본 한 장을 빼내 탁, 그녀 앞에 밀어 넣었다. 비슈케크 시내 은행에서 개설된 그 통장의 주인은 분명히 ‘Aigerim T.’라고 적혀 있었다. 개설 날짜는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바로 그날이었다.

“이미 첫 번째 송금이 들어갔어. 네가 오늘 첫 번째 전표를 처리하는 순간, 너는 이 조직의 재무 담당자로서 첫 월급을 받게 될 거야. 합법적인 급여로 신고도 되어 있어. 보여줄까? 아니면 네가 직접 확인해 볼래?”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사실을 나열했을 뿐이다. 아이게림의 시야가 잠시 흐려졌다. 그녀는 펜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첫 번째 송장을 집어 들었다.

열흘째 아침 이후 사흘 동안, 무라트는 매일 저녁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겉으로는 업무 진척 상황을 점검하는 자리였지만, 그가 건네는 말은 한 겹씩 더 깊이 파고드는 송곳 같았다.

“오늘은 생각보다 늦었군. 전표 처리가 어려워?”

그는 어느 날 저녁, 평소와 다른 호의를 베풀었다. 그의 지시로 경비원들이 뜨거운 샤슬리크와 난, 그리고 보온병에 담긴 차를 가져왔다. 밖에서는 다른 노동자들이 막사에서 찬 흐렙을 씹으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게림은 그 음식 앞에서 배가 고팠지만, 젓가락을 대기가 두려웠다. 이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었다.

“네가 은행에서 하던 일도 솔직히 말해 봐. 그곳에서도 부자 고객들의 돈을 숨기고, 가난한 사람들한테 연체 이자를 뜯어내는 게 일 아니었어? 그 시스템도 폭력이야. 단지 정부가 허락했을 뿐이지. 여기서도 똑같아. 우리는 단지 규칙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리고 여기선 네가 훨씬 더 많은 몫을 가질 수 있어.”

그가 말을 이을 때마다 아이게림의 척추가 굳어졌다. 그녀는 은행 시절을 떠올렸다. 맞다. 그때도 가난한 노인들이 대출금을 못 갚아 집을 경매로 넘기는 서류에 도장을 찍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일과 지금 이 일이 정말 다른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무라트가 가져온 차의 향긋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며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바키트는 달랐다. 그녀가 무라트와 면담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밤이면, 바키트는 아무 말 없이 복도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힐끔 보며,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단 한 번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담배 연기만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어느 날 밤, 아이게림이 유령 회사들의 송금 내역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교단 운영 위원회’라고 표기된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인력 관리 대장’이라는 제목의 별도 시트가 있었다. 그녀의 눈이 무심코 스크롤을 따라 내려갔다. 여성 신도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생년월일. 입단 날짜. 그리고 그 옆에는 ‘정결 의식 완료’라고 적힌 스탬프가 찍힌 줄이 있었고, 또 어떤 줄에는 ‘처분 – 매장(埋葬)’이라는 글자가 붉은 잉크로 찍혀 있었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심장이 갈비뼈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시야 가장자리가 노랗게 바래는 듯했다. 마우스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 뒤에서 바키트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의 손바닥은 갈라지고 딱딱했다.

“그 파일은 닫아요.”

“이게 뭐예요? 이 사람들은 어디로…”

“닫아요. 그리고 다시는 열지 마요. 이걸 아는 순간, 당신은 회계사가 아니라 증인이 되는 거요.”

그는 그녀의 모니터를 직접 닫았다. 액정의 푸른 빛이 사라지자, 사무실은 다시 작은 백열전구 하나만이 간신히 밝히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바키트의 얼굴은 전구 아래서 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내 아내 이름도 저기에 있었소. 난 3년째 여기서 마름 노릇을 하고 있소.”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이게림은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공기가 두껍고 차갑게 변해서 폐를 짓눌렀다. 그녀는 자신이 단순한 금융 사기의 공범이 아니라, 무언가 훨씬 더 거대하고 끔찍한 악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비로소 뼈로 느꼈다.

열나흘째 저녁, 무라트는 그녀에게 첫 번째 교단 집회 참석을 명령했다.

“오늘 밤은 선지자님의 말씀을 들을 거야.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우리의 신앙을 알아야 해. 너를 위한 자리도 마련해 놨어.”

협곡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키르기스 전통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내부에는 백 명이 넘는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중앙에는 백색 목재로 조각된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주변에는 검은색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곤봉을 든 채 늘어서서 신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디르가 등장했다. 그는 마치 신이 강림하듯 천천히 걸어나와 의자에 앉았다. 모든 신도가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그는 길게 늘어뜨린 설교를 시작했다.

“때가 가까웠다. 저 아래 세상은 곧 독한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 오직 이곳, 하얀 봉우리의 방주에 오른 자들만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리라. 그러나 구원은 값싸지 않다. 너희의 재산과 육신을 바쳐 이 방주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설교가 끝나자 ‘헌금 의식’이 시작되었다. 신도들은 차례대로 나와 돈과 금품을 바쳤다. 어떤 노파는 마지막 남은 은반지를 떨리는 손으로 내려놓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저항하는 자가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달 수확이 적었습니다. 헌금을 조금만 낮춰 주십시오.”

카디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지만 눈빛은 짐승 같았다.

“네 영혼에 때가 꼈구나. 씻어내야 한다.”

경비원들이 남자를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그의 윗옷이 찢겼고, 등이 드러났다. 대나무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천막 안에 날카롭게 울렸다.

쉬익— 퍽.

첫 번째 소리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고, 두 번째 소리는 살에 박히는 소리였다. 남자의 비명이 천막을 가득 채웠다. 신도들은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경비원들은 멈추지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남자의 등에서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피부가 찢어지고 살점이 드러나는 순간, 아이게림은 자신의 손톱이 허벅지 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귀가 멍해지고 목구멍이 바싹 말라붙는 듯했다.

무라트가 그녀의 옆에서 속삭였다.

“이게 질서야. 여기서는 모든 대가가 명확해. 너는 장부로 돈을 버는 거고, 저들은 순종으로 구원을 받는 거야.”

집회가 끝난 후, 그녀는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비틀거렸다. 위장이 아니라 심장이 문제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떨릴 뿐이었다.

열다섯째 날 아침, 무라트가 그녀의 책상 위에 두 권의 장부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검은색 표지와 붉은색 표지. 검은색은 진짜 돈의 흐름이 적힌 장부였고, 붉은색은 세금 신고용으로 조작할 장부였다.

“직접 해. 처음부터 끝까지 네 손으로. 검은 장부의 숫자를 붉은 장부에 ‘합법적으로’ 옮겨 적는 거야. 만약 숫자가 하나라도 틀리면, 다음 주 감사관 앞에서 네 명의의 계좌가 제일 먼저 터질 거야.”

그녀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밤새 숫자들과 씨름했다. 검은 장부를 넘기면서, 그녀의 회계사로서의 감각은 익숙한 패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TS-7’이라는 코드명의 거래처에서 매달 반복적으로 들어오는 거액. ‘약초 추출물 샘플’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금액은 그런 샘플의 가격이 아니었다. 거기다 수취 계좌는 모두 싱가포르를 거쳐 중동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펜을 멈추고 다른 장부들을 뒤졌다. 같은 코드 ‘TS-7’.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작은 연필 메모. ‘여성 4’, ‘남성 2’. 그녀의 눈이 멎었다. 약초의 단위가 아니었다. 사람의 단위였다.

뒷목이 싸늘하게 식어 들어갔다. 그녀는 지난 3년간 자신이 정리한 수많은 거래들이 단순한 사기나 마약 자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을 사고 판 대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장부가, 그녀의 손이, 이 거대한 인신매매의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손가락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무라트가 회수하기 전에 그녀는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거기에 그녀는 은행원 시절 자신이 현금 흐름을 추적할 때 쓰던 회계 기호를 적어 내려갔다. ‘TS-7 / Inv.F / 4W:2M / C.O.D’. 겉보기에는 ‘TS-7 거래처 송장 F, 중량 4:2 비율, 대금 인도 조건’으로 읽힐 법한 은밀한 속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인보이스 F에 숨은 실상은 여성 4, 남성 2’라는 의미였다. 무라트가 들여다봐도 단순한 물류 코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 메모지를 접어, 오래된 계산기 뒷판을 열고 그 안에 밀어 넣었다. 배터리 칸과 회로판 사이의 좁은 공간이었다.

새벽 3시가 넘어서, 바키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며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작업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녀 앞에 밀어 놓았다.

“협곡 동쪽, 오래된 목동의 오솔길. 15년 전에 폐쇄됐고 지금은 경비견 두 마리가 지키고 있어. 하지만 지형을 알면 피할 수 있는 바위 틈이 있어. 혼자서는 못 가. 누군가 개들을 유인해야만 해.”

아이게림은 그 메모를 읽고 바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메모지를 책상 위 작은 석유 난로 쪽으로 가져갔다. 난로의 철제 문을 열자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녀는 종이를 그 속에 밀어 넣었다. 종이는 순식간에 검게 변해 타올랐고, 재가 되어 굴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열여섯째 날 저녁이었다. 해가 지고 협곡이 어둠에 잠길 무렵, 무라트가 직접 그녀의 사무실로 내려왔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

“카디르 선지자님께서 부르셔. 사택으로 올라가.”

그 말에 바키트가 복도에서 움찔했다. 아이게림은 보았다. 바키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풀어지는 것을.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택은 협곡 제일 높은 곳에 지어진 2층 목조 건물이었다.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감각은 혼란에 빠졌다. 바닥에는 페르시아산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이탈리아산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벽난로 앞에는 벨벳 소파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카디르가 실크 가운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 두 명이 차를 따르고 있었다. 소녀들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가까이 와. 네 장부를 봤다. 아주 깔끔하더군.”

그의 손이 다가왔다. 노인의 손가락은 건조했고, 손톱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더듬었다. 아이게림의 척추를 타고 오한이 번졌다. 그녀는 무릎이 풀리는 것을 억지로 버티며 입을 열었다.

“저는… 회계 일을 하러 왔습니다. 선지자님의 재정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 내뱉었다.

그 순간, 옆에서 차를 따르던 소녀 중 한 명이 긴장한 탓에 찻잔을 떨어뜨렸다. 도자기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찻물이 고급 카펫 위로 번졌다. 카디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의 손이 지팡이를 움켜쥐었고, 그대로 소녀의 어깨를 향해 휘둘러졌다.

퍽. 소녀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지팡이는 다시 올라갔다. 아이게림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던져 소녀의 앞을 막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선지자님! 해외 송금에 오류가 있습니다!”

카디르의 지팡이가 허공에서 멈췄다.

“무엇이라고?”

“두바이 바이어 쪽에서 송금 코드를 잘못 보내 8만 달러가 다른 은행 지점에 묶여 있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번 주 말까지 들어와야 할 거래 대금 전부가 동결될 위험입니다. 지금 당장 장부를 수정해야 합니다.”

그녀는 카디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손끝은 저렸고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돈.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약점을 찔렀다.

방 안에는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카디르의 눈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지팡이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좋다. 내 재산이 한 푼이라도 줄어드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가서 당장 처리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사택을 빠져나왔다. 협곡의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손으로 벽을 짚고 버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의자에 쓰러져 앉았다.

계산기를 꺼냈다. 뒷판을 열자, 그 안에 접어 넣었던 메모지가 그대로 있었다. ‘TS-7 / Inv.F / 4W:2M / C.O.D’. 그녀만이 해독할 수 있는 암호. 바키트가 건넨 메모의 내용도 그녀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협곡 동쪽, 오래된 목동의 오솔길.’

그녀는 메모지를 다시 계산기 안에 밀어 넣고 뒷판을 닫았다. 작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계산기는 다시 평범한 사무용품이 되었다.

바깥에서는 천산의 밤바람이 협곡을 타고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게림은 어둠 속에서 계산기를 가슴에 안은 채,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두려움으로 흐려져 있지 않았다. 서늘하고 조용한, 무언가 다른 빛이 그 안에 깃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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