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그림자 키르기스스탄편 #001] 천산의 핏빛 방주 – 1화: 천산의 덫

 1화: 천산의 덫

비슈케크 서부, 외벽의 시멘트가 바스러져 가는 낡은 흐루쇼프카 아파트 4층. 아이게림의 하루는 늘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시작됐다. 매일 새벽마다 웅크린 채 기침을 토해내는 남동생 누르술탄의 등을 쓸어내리고, 얼어붙은 싱크대에서 물을 받아 약을 챙기는 것이 스물여섯 그녀의 현실이었다. 만원 버스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시내 상업은행으로 향하는 길은 늘 회색빛이었다.

방탄유리 너머의 세상은 철저히 숫자로만 굴러갔다. 아이게림은 온종일 기계처럼 지폐 묶음을 세고 송금 전표를 찍었다. 손끝에는 항상 거친 지폐 먼지와 퀴퀴한 잉크 냄새가 베어 있었다. 수억, 수천만 솜의 현금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지만, 정작 퇴근길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 것은 아버지가 남긴 사채 이자 독촉장이었다. 월급이 스치고 지나간 텅 빈 계좌는 동생의 폐병을 고치기는커녕, 매달 집 문을 발로 차며 어머니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는 사채업자들의 아가리를 채우기에도 급급했다.

어둠이 내린 거실 구석에서 동생의 귀를 막아주던 밤, 그녀는 이 숨 막히는 아파트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환각을 보았다. 이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주 뒤, 은행 단말기 모니터 구석에 기이한 구인 공고 하나가 번쩍였다. [천산 농업 유한회사 – 재무 회계사 급구. 근무지 카라콜 고원 지대. 급여 시중 은행의 세 배. 1년 계약 완료 시 성과급 지급.] 배경에 깔린 만년설과 푸른 목초지 사진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숫자를 다룰 줄 아는 영리한 인재를 구한다는 문장은, 덫에 놓인 기름진 미끼처럼 아이게림의 시선을 집요하게 붙잡았다.

비슈케크 시내의 밀폐된 고급 카페 룸. 무라트는 은은한 침향 냄새를 풍기며 아이게림의 이력서를 부드러운 손길로 넘겼다. 마흔 줄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팽팽한 피부와 값비싼 맞춤 양복은 그가 속한 세계의 풍요를 대변하는 듯했다.

“시중 은행의 생리를 이토록 잘 아는 분이 왜 그런 좁은 방탄유리 뒤에 갇혀 계셨는지 모르겠군요.”

무라트가 테이블 위로 밀어 넣은 계약서에는 아이게림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액수의 숫자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지금 수입의 세 배. 거기에 카라콜 고지대의 숙식까지 전액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듯 쿵쾅거렸다. 이 돈이면 사채업자들의 협박에서 어머니를 구하고, 동생을 비슈케크에서 가장 좋은 요양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왜 하필 그 깊은 산속입니까? 허브 수출 회사라면 시내에 사무실이 있어도 될 텐데요.”

아이게림이 남은 이성을 쥐어짜 물었다. 무라트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재배하는 특수 약초는 해발 2,500m의 정결한 기후에서만 자라니까요. 문명과 떨어진 곳일수록 보안이 철저해야 합니다. 경쟁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거든요. 대신 도시의 유흥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만큼의 숫자를 보장하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합리적이어서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무라트가 가죽 가방에서 꺼낸 500달러짜리 신권 현찰 뭉치가 탁자 위에 툭 떨어졌다. 빳빳한 달러의 촉감이 아이게림의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가슴속 마지막 경보음이 꺼졌다. 그녀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낡은 배낭에 몇 벌의 옷과 스마트폰, 그리고 여권을 밀어 넣었다.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새 덫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준비였다.

무라트의 랜드크루저는 동쪽으로 달릴수록 거칠게 흔들렸다. 창밖의 평원은 이내 거대한 회색 암벽과 천산의 위압적인 그림자 속으로 매몰되어 갔다. 카라콜의 작은 마을을 지나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험준한 협곡으로 들어선 지 세 시간째, 아이게림의 눈앞에 기이한 콘크리트 장벽이 솟아올랐다.

그곳은 농장이 아니었다. 계곡 전체를 가로지르는 철조망과 군복을 어설프게 걸친 사내들이 장총을 멘 채 경계를 서고 있는 요새였다. 무라트가 창문을 내리고 무언의 눈빛을 보내자, 육중한 철문이 둔탁한 굉음을 내며 열렸다.

“안전을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귀한 약초들이니까요.”

무라트는 룸미러로 백지장처럼 질린 아이게림의 얼굴을 훔쳐보며 낮게 읊조렸다. 장벽 내부의 광경은 기괴함 그 자체였다. 축구장 수십 개 크기의 약초 밭과 거대한 비닐하우스 사이로 백색 리넨 옷을 입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깔려 있었다. 기이한 점은 그 누구도 허리를 펴지 않았고, 숨소리 외에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랜드크루저가 지나갈 때, 사내들과 여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진흙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마치 거대한 가축 무리를 보는 듯한 생경한 공포가 그녀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소비에트 시절의 낡은 군사 기지를 개조한 듯한 본관 집무실에서, 아이게림은 최고 선지자라 불리는 카디르와 마주했다. 새하얀 전통 모자 ‘칼파크’ 아래로 흘러내린 은빛 수염, 그리고 핏기가 전혀 없는 기이할 정도로 팽팽한 얼굴. 그의 두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먹이를 노리는 늙은 맹수의 그것처럼 탁하고 집요했다.

“영혼이 맑은 아이가 우리 방주의 살림을 맡으러 왔구나.”

카디르가 걸쭉한 목소리로 웃으며 아이게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끈적하고 무거운 손바닥의 감촉이 정수리에 닿는 순간, 아이게림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불길함을 느꼈다.

“여권과 휴대폰을 이리 내십시오.”

집무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무라트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씻겨 나갔다. 뱀의 비늘처럼 건조한 명령이었다.

“회사 규정입니다. 외부와의 접촉은 기밀 유지를 위해 일절 금지됩니다.” “가족들과 연락도 못 한다는 건 계약서에 없었잖아요! 이건 강금이에요. 저 안 하겠어요. 비슈케크로 돌아갈 겁니다!”

아이게림이 비명을 지르며 문을 향해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문을 가로막고 선 이인조 경비원들의 거대한 체구가 그녀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무라트는 책상 위에 그녀가 서명했던 계약서 뒷면을 조용히 펼쳐 보였다.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만큼 미세한 글씨로 적힌 ‘외부 접촉 제한 동의’ 조항이 선명했다.

“돌아간다고? 어떻게 혼자서 이 맹견들과 국경 수비대가 널려 있는 만년설을 걸어 내려가겠다는 거지?”

무라트는 아이게림의 배낭을 거칠게 채 가더니 여권과 전화를 꺼내 철제 금고에 던져 넣었다. 쾅, 하고 금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절망의 단두대처럼 집무실을 울렸다. 무라트는 이어서 몇 장의 서류를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미 네 명의로 세 개의 가상 법인 계좌가 개설됐다. 앞으로 국경을 넘어 들어올 모든 자금은 네 손을 거치게 될 거야. 네가 도망치든, 경찰에 밀고하든, 세상은 은행원 출신의 한 여자가 거액의 불법 자금을 세탁하려 했다고 믿겠지. 네가 살아서 그 낡은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다면, 얌전히 펜을 잡는 게 좋을 거다.”

철저하게 계산된 언어적 유린과 덫. 아이게림은 다리가 풀려 콘크리트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눈물만 쏟아내는 그녀의 손에는, 무라트가 쥐여준 차가운 볼펜 한 자루만이 남겨져 있었다. 철저하게 고립된 평범한 인간이 마주한 생지옥의 서막이었다.

창살이 촘촘하게 박힌 지하 창고 방. 아이게림은 먼지 냄새 가득한 책상 위에 쌓인 장부들을 보며 핏발 선 눈을 감았다. 밤새도록 협곡을 타고 흘러드는 천산의 칼바람 소리는 마치 장벽에 갇힌 신도들의 비명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굳은살로 가득한 거친 손이 철문을 두드렸다. 작업 반장인 중년 사내 바키트였다. 그의 눈은 이미 오랜 절망에 길들여진 듯 빛을 잃어 가라앉아 있었다.

“무라트 님이 오늘 밤 안으로 이 자금 내역들의 숫자를 맞추어 놓으라 하셨습니다.”

바키트가 내려놓은 장부는 정상적인 농장 장부가 아니었다. 수천 명의 신도들이 바친 기부금, 그리고 ‘정결 예물’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출처 불명의 거액의 외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며칠간 방에 갇혀 장부를 정리하며, 아이게림은 이 요새의 추악한 본질을 목격했다. 카디르를 신으로 모시는 이 사이비 집단은, 신도들의 노동력을 갈취하고 예물을 바치지 못하는 자들을 가혹하게 채찍질했다. 심지어 한밤중에는 어린 여성 신도들이 카디르의 사택으로 끌려 들어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 밤, 바키트가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 굳은 빵 조각과 물을 건넸을 때, 아이게림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도망치지 않는 건가요? 당신도 다 알고 있잖아요.”

바키트는 문밖을 훑어보더니, 낮고 으스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 딸과 아내가 저들의 예식을 거부했다가… 저 산맥 아래 어딘가에 묻혔소. 도망치려 하지 마시오. 이빨을 드러낸 알라바이들이 네 살점을 뜯어내기 전에 가로막힐 테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 공포의 정점에서, 숫자를 다루던 아이게림의 감각이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위로 조작된 수많은 현금 지출 내역 속에, 특정한 날짜와 주기마다 반복되는 거액의 ‘현찰 송금’ 흐름이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횡령이 아니었다. 주 정부 관료들과 국경 수비대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는 진짜 ‘뇌물 장부’의 실핏줄이었다.

아이게림의 젖은 눈망울 속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이 추악한 숫자들이야말로 자신이 여기서 살아남을 유일한 밧줄이자, 이 거대한 감옥을 무너뜨릴 칼날이 될 터였다. 그녀는 무라트가 준 장부를 적는 척하며, 진짜 뇌물 자금의 흐름을 얇은 속지에 미세한 글씨로 베껴 적어 낡은 바닥 장판 틈새로 밀어 넣었다. 장벽 너머 천산의 바람이 다시금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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