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어둠의 대기실
암막 커튼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거실 구석에서는 기오르기가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었다. 껍질이 재떨이에 떨어질 때마다 나는 금속성의 작은 충돌음. 마리암은 그 소리를 세지 않으려고 애썼다. 소리를 세기 시작하면, 시간을 세기 시작할 테고, 시간을 세면 이곳에 갇힌 지 며칠째인지 또렷이 인식하게 될 테니까.
화장실 쪽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타티아가 나왔다.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마리암 옆자리에 무겁게 앉았다. 소파 스프링이 내려앉으며 삐걱거렸다.
“며칠째야?”
타티아가 물었다. 마리암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7일째.”
“나는 22일째야.”
타티아의 음성에는 이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날짜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일 뿐이라는 듯했다. 마리암은 그녀의 옆얼굴을 슬쩍 살폈다. 광대뼈가 조금 더 도드라져 보였다. 여기 들어올 때보다 살이 빠진 것이 분명했다.
어린 타마르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배터리가 8% 남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충전기는 있었지만 아파트 벽면 콘센트가 노후되어 제대로 접속되지 않았다. 그녀는 남은 배터리로 저장된 사진을 넘겨보고 있었다. 가족 사진일 터였다.
마리암도 자신의 핸드폰을 켜보았다. 신호는 여전히 한 칸이었고, 데이터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지난번 보낸 문자 이후 답장은 없었다. 아니, 답장이 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불안정해 수신이 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 어머니가 답장을 보내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부엌 싱크대 위에는 아침에 다비드가 두고 간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식빵 한 덩이, 오이 세 개, 통조림 두 개. 3명이 하루를 버티기에는 모자란 양이었다. 마리암은 배에서 울리는 허기를 무시하는 법을 점점 배워가고 있었다.
“우리, 여기서 뭐가 되는 거지.”
타마르가 중얼거렸다. 질문이라기보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타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암은 손톱 밑에 남은 때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때 철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셋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쏠렸다. 기오르기만이 여전히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다비드가 들어왔다. 오늘은 진한 네이비색 정장 차림이었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는 흰 손수건이 삼각형으로 접혀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식탁으로 걸어와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다들 점심은 드셨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비드는 무응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가방에서 서류 봉투가 나왔다. 봉투는 세 개였다.
“서류 상황을 업데이트해 드릴게요.”
그는 봉투를 하나씩 식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타마르, 타티아, 마리암 순서였다. 마리암의 봉투를 열자 A4 용지가 두 장 나왔다. 첫 장에는 그녀가 이미 본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7,000달러 원금, 500달러 숙박 추가분, 그리고 새로 추가된 항목으로 ‘식비 및 관리비 300달러’가 있었다. 합계는 7,800달러.
두 번째 장은 조금 달랐다. ‘협력 사항’이라는 제목 아래에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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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업무 보조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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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된 장소에서의 접대 업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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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시 동행 업무 (추후 협의)
마리암은 두 번째 항목에서 시선을 멈췄다. ‘지정된 장소에서의 접대 업무’. 다비드가 어제 말했던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종이를 내려놓고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접대 업무가 정확히 무슨 뜻이죠?”
다비드는 손가락을 깍지 끼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의 손톱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약지에는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비즈니스 파트너분들이 조지아에 오면 보통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데, 거기 동석해서 대화도 좀 나누고, 분위기 좀 살려주는 거예요. 한국에서도 접대 문화라는 게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저는 조지아 사람입니다.”
“아, 실수했네요. 어쨌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은 아니에요. 그냥 친절하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 돼요.”
타티아가 갑자기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코웃음 같기도 했고, 울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다비드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마리암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리암 씨는 원래 차분하고 신중한 분이라서 잘 맞을 거예요. 주인장도 그렇게 말했고요.”
“식당 주인 말인가요.”
“네. 칭찬하셨어요. 일도 꼼꼼하고 손님들한테 예의도 바르다고.”
마리암은 식당에서 그녀를 훑어보던 두 남자의 시선을 떠올렸다. 그들의 눈빛은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상품의 가치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주인은 그 시선을 알고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리필해 주었다. 그가 다비드에게 보고한 ‘칭찬’은 아마 그런 종류의 평가였을 것이다.
다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모레 저녁 7시. 기오르기가 장소까지 데려다줄 거예요. 그 전에 옷이랑 메이크업 도우미가 올 거고요. 빚에서 1,000달러 공제됩니다. 이걸 네 번만 하면 4,000달러니까 거의 절반 가까이 갚는 거죠.”
그가 떠나고 난 후, 거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기오르기는 여전히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터키어 뉴스 앵커가 무언가를 신나게 전하고 있었다.
타티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 번으로 끝나지 않아. 나도 처음에는 네 번만 하면 된다고 들었어. 그리고 그 네 번이 지나니까, 갚아야 할 다른 빚이 새로 생겼다고 하더라.”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술값. 의상 대여료. 교통비. 그들이 만들려고 마음먹으면 항목은 무한정이야. 그리고 한 번 그 자리에 앉기 시작하면, 그걸 거부할 명분이 사라져. 너는 이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마리암은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무언가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쿠타이시의 낡은 아파트에 혼자 누워 있을 나나. 다비드의 사무실 서랍 어딘가에는 그녀의 여권이, 그리고 어머니의 주소가 들어 있을 터였다.
타마르가 소파에 엎드려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는 목구멍 안으로 삼켜져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등판이 떨리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타티아는 그런 타마르의 머리를 아무 말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마리암은 부엌으로 걸어가 싱크대에 손을 짚었다.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그저 바라보았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아직 울지 않는 것뿐이었다.
저녁이 되자 아파트 내부는 더욱 폐쇄적으로 변했다. 암막 커튼이 바깥의 마지막 빛조차 완전히 차단했기 때문에, 방 안의 유일한 광원은 깜빡이는 형광등과 TV의 푸른 빛뿐이었다.
기오르기는 저녁 식사로 빵과 통조림을 식탁에 던져두고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가 먹는 해바라기 씨 봉지는 어느새 세 번째였다. 마리암은 통조림 뚜껑을 따며 기오르기를 관찰했다. 그의 손가락은 굵고 짧았으며, 손톱 주변에는 작은 상처 자국들이 있었다. 오래된 흉터였다. TV 화면에 비친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키는 대로 감시하고, 시키는 대로 데려다주는 부품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기오르기 씨.”
마리암이 말을 걸자 그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만 살짝 돌렸다.
“왜.”
“여기, 다른 사람들도 있었나요. 우리 전에.”
기오르기는 대답 없이 해바라기 씨를 한 알 까먹었다. 마리암은 질문을 바꾸었다.
“터키에는 어떻게 가는 거죠. 육로인가요, 비행긴가요.”
“너 질문 많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TV 소리를 한 칸 더 높였다. 아랍어 뉴스의 기계적인 발음이 거실을 채웠다. 마리암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반응만으로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곳은 경유지라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분류되고, 평가되고, 다른 곳으로 배달된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이 되는지는 이곳의 사람들 마음에 달려 있었다.
타티아가 마리암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내가 듣기로, 여기서 한 달 넘게 있는 사람은 없었어. 보통은 2~3주 안에 어딘가로 보내져. 터키로 간다는 말은 처음에만 하는 거고, 실제로는 아랍에미리트로 가는 애도 있고, 동유럽 쪽으로 가는 애도 있다더라.”
“어떻게 알아요?”
“들리는 소리. 이 방에 혼자 있을 때, 저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복도에서 들었어. 그들은 우리가 러시아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더라.”
타티아는 러시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쿠타이시에서 학원 보조 일을 할 때 조금 배웠다고 했다. 그녀가 들은 정보는 단편적이었지만, 그림을 그리기에는 충분했다. 이곳은 인신매매 네트워크의 한 경유지였다. 트빌리시에서 포섭된 여성들은 이 아파트에서 며칠 혹은 몇 주간 머물며 ‘평가’를 받고, 그 평가에 따라 목적지와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내 평가는 이미 끝났어.”
타티아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두 번의 접대 자리 이후에 나한테는 더 이상 제안이 없어. 아마 내 나이 때문일 거야. 서른넷은 이 업계에서 너무 늙은 거지.”
마리암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타티아의 눈빛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사람의 것이었다. 그녀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너무 정확히 인식해버린 상태였다. 마리암은 그런 타티아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오후, 다비드가 말한 ‘도우미’가 도착했다. 놀랍게도 조지아인 여성이었다. 나이는 마흔쯤 되어 보였고, 짙은 아이섀도와 탈색된 금발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자신을 ‘살로메’라고 소개했다. 메이크업 박스를 든 그녀의 손놀림은 전문적이었지만, 표정에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그녀는 마리암을 거실 의자에 앉히고 메이크업 도구를 펼쳤다.
“눈 감아요.”
마리암이 눈을 감자, 살로메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파운데이션, 파우더, 아이브로우, 아이섀도,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모든 것이 기계적인 순서로 진행되었다.
“입술은 좀 진하게 할게요.”
붓이 입술을 스치자 마리암은 살짝 움찔했다. 살로메는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옷은 저기 쇼핑백에 있어요. 입어보고 사이즈 안 맞으면 말해요.”
검은 원피스를 꺼내 들었을 때, 마리암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옷을 움켜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얇은 소재였다. 끈은 어깨에서 쉽게 흘러내릴 것처럼 가늘었고, 등판은 깊게 파여 있었다. 이런 옷을 입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쿠타이시의 그녀라면 절대 손에 넣지 않았을 옷이었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금 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낯설었다. 진한 화장과 드러난 어깨선, 짧은 기장. 그녀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거울 속의 여자는 마리암과 닮았지만, 분명 다른 누군가였다. 다비드의 서류에는 ‘접대 업무’라고 적힌 그 사람이었다.
살로메는 변한 마리암의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손님들이 마음에 들어할 스타일이에요.”
그녀는 마리암에게 하이힐 한 켤레를 더 건네주고는 짐을 챙겨 떠났다. 타티아는 그 모든 과정을 소파에 앉아 말없이 지켜보았다. 마리암이 하이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다 계획된 거였네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타티아가 확인해 주었다. 마리암은 검은 원피스를 입은 채로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움직이기 싫었다. 이 옷을 입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행위 자체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오르기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6시 45분이다. 내려가자.”
낡은 은색 세단의 뒷좌석은 차가웠다. 마리암은 검은 원피스 위에 자신의 낡은 코트를 걸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트빌리시 외곽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불빛들이 길을 안내해 주기를 바랐지만, 차는 익숙한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동네였다.
기오르기는 라디오에서 조지아 민요를 틀어놓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노래. ‘수리코’라는 오래된 민요였다. 그는 후렴 부분에서 낮은 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 평화로운 멜로디가 차 안의 공기와 뒤섞여 귀를 찔렀다. 마리암은 라디오를 끄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차는 트빌리시 남부의 한적한 거리에 멈췄다. 2층짜리 건물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붙어 있었다. 계단 입구에는 붉은 등을 단 간판이 하나 걸려 있었고, 메뉴판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식당은 분명 아니었다.
기오르기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계단 내려가면 주인이 기다리고 있어. 끝나면 전화 줘. 데리러 올게.”
마리암은 차에서 내렸다. 하이힐이 아스팔트 바닥에 닿으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자 지하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담배 연기와 술 냄새도 섞여 있었다.
지하 공간은 의외로 넓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로 긴 탁자가 놓여 있었고, 이미 몇 명의 남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리암이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40대에서 50대로 보이는 남자 넷. 전부 양복을 입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와인 병과 안주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식당 주인이 마리암을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계신 분들은 다 우리 단골이야. 술도 좀 따르고, 이야기도 좀 나누고. 자연스럽게 행동해. 어려운 거 아니지?”
마리암은 대답 대신 자리에 앉았다. 의자는 생각보다 푹신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앉았다. 은발에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손목에는 비싸 보이는 시계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리암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와인잔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마실래요?”
“감사합니다만, 저는 술을 잘 못 마셔서요.”
“한 모금만. 여기 분위기가 좀 서먹하니까.”
남자는 마리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붉은 액체가 잔 안에서 출렁이며 채워졌다. 마리암은 잔을 바라보았다. 들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잔을 먼저 비웠다.
“이름이 뭐예요?”
“마리암입니다.”
“아주 예쁜 이름이네요. 조지아 여성들은 원래 다 이렇게 예쁜가.”
그것은 칭찬이 아니었다. 마치 특산물에 대한 감상 같은 어조였다. 마리암은 시선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렸다. 네 명의 남자들은 그녀가 없는 것처럼 다시 자신들의 대화를 시작했다. 부동산 투자, 터키 바이어들, 환율 이야기. 평범한 비즈니스 대화였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더 기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자리에 앉은 여자가 어떤 경로로 여기 왔는지 전부 알면서도 태연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 옆자리의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마리암 씨, 터키에 가고 싶다고 들었어요.”
“네.”
“좋은 꿈이네요. 그런데 꿈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 너무 조바심 내지 마요. 다들 그렇게 시작해서 잘 풀리니까.”
그는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마리암의 몸이 경직되었다. 체온이 전해지는 접촉이었지만, 그녀의 등줄기에는 차가운 냄기가 훑고 지나갔다. 남자는 손을 거두며 웃었다.
자리는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그동안 마리암은 와인을 두 모금 마셨고, 질문에는 짧게 대답했으며, 스스로 웃는 법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녀의 미소는 진짜가 아니었지만, 남자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의 진심이 아니라, 그녀가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였을지도 몰랐다.
기오르기의 차가 다시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마리암은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코트로 어깨를 감쌌다. 검은 원피스에서 풍기는 낯선 향수 냄새가 차 안에 퍼졌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타티아는 깨어 있었다. 그녀는 마리암의 표정을 한 번 보더니,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부엌에서 물 한 컵을 따라 건넸다. 마리암은 물을 마시지 않고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물이 체온에 데워질 때까지,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실 구석에서는 기오르기가 오늘도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TV를 켜놓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조지아 민요가, TV에서는 터키어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쪽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거실에서 겹쳐져, 기괴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마리암은 그 소음 속에 앉아, 쇼핑백 속으로 밀어 넣은 검은 원피스를 다시 꺼내 보았다. 원피스에는 음식 냄새와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옷을 천천히 개켜서 자신의 여행 가방 맨 밑바닥에 밀어 넣었다.
빚은 1,000달러 줄어들었다. 남은 빚은 6,800달러. 그리고 다비드는 앞으로 세 번만 더 하면 된다고 했다. 마리암은 타티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네 번이 지나면 다른 빚이 새로 생긴다고.
그녀는 어두운 부엌에 서서 물이 담긴 컵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그녀는 그 리듬을 따로 세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에게 보내지 못한 문자를 머릿속으로 적어 내려갔다. 삭제했다. 다시 적었다. 또 삭제했다.
기오르기가 라디오 방송국을 다른 채널로 돌렸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 낯선 언어의 파편들이 부엌까지 밀려 들어왔다. 마리암은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개수대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차가운 스테인리스의 감촉이 손바닥에 아로새겨졌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실에서는 기오르기가 리모컨으로 TV와 라디오를 번갈아 켜고 끄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암막 커튼은 바깥의 어떤 빛도 들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밤인지 낮인지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