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첫 번째 심연
정오의 시계가 채 울리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슈트반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손에는 이제 채은의 체류 비자 관련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치 박물관의 큐레이터처럼 차분하고 정확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 비자는 우리 회사가 스폰서라서, 내가 철회하면 오늘 오후 3시면 효력이 정지돼요. 헝가리 경찰은 일 처리가 빠르거든. 특히 불법 체류자 단속은 말이지.”
채은은 의자에 앉은 채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의 뇌리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1,200만 포린트의 빚. 6,000만 포린트의 위약금. 불법 체류. 강제 추방. 모든 숫자와 단어가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충돌하고 있었다.
“자, 이제 진정됐으면 일을 시작해 볼까요?”
이슈트반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오늘은 운이 좋아서, 아주 중요한 분이 오셔요. 벨라 4세 거리 쪽에 있는 궁전에서 근무하시는 분인데… 내가 이름을 말할 순 없고. 그냥 ‘장관님’이라고 불러요.”
장관이라는 단어에 채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슈트반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걱정 마요. 장관님이라고 해서 무서운 사람 아니야. 아주 교양 있는 신사분이고, 피아노 음악도 좋아하셔서 당신이랑 이야기가 잘 통할 거요. 그리고 명심해요. 이건 ‘접대’야. 당신이 거부하면 계약 위반이고, 그 결과는 아까 말했듯이…”
그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6,000만이라는 숫자를 허공에 그렸다.
채은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흘리지 않았다. 흘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이곳은 부다페스트의 중심가에서 불과 30분 거리였지만, 법도 경찰도 닿지 않는 또 다른 세계였다.
“아틸라, 이 학생을 VIP 라운지로 안내해요.”
이슈트반이 손짓하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틸라가 들어왔다.
“그리고 옷도 좀 갈아입어야겠네요. 그런 평범한 옷으로는 장관님 앞에 실례니까.”
아틸라는 채은의 팔을 붙잡아 복도로 이끌었다. 그의 손길은 거칠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견고함이 있었다. 그들은 다시 그 좁고 습한 복도를 걸어갔고, 중간에 작은 탈의실 같은 방에 들렀다.
방 안에는 옷걸이에 걸린 의상 몇 벌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웠지만, 디자인은 지나치게 노출이 심하거나 불편할 정도로 몸에 달라붙는 것들이었다. 칵테일 드레스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만큼 짧은 실크 원피스, 가슴이 깊게 파인 블라우스, 허벅지까지 트임이 들어간 롱스커트.
“이걸… 입으라고요?”
채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 밖에 서서 기다릴 뿐이었다. 그의 무표정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채은은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억누르며, 그중에서 그나마 가장 얌전해 보이는 검은색 실크 블라우스와 롱스커트를 골랐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건 그냥 아르바이트야. 통역하고, 차 따르고, 피아노 이야기 하다가 끝나는 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 그 주문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거울 속 여자는, 더 이상 음악원 학생이 아니었다. 깊게 파인 블라우스와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스커트. 그 옷을 입은 여자는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보였다.
“시간이 됐다.”
아틸라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헝가리어는 짧고 딱딱했다.
채은은 다시 복도로 나왔다. 그들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온천의 증기마저 사라지고, 대신 차갑고 정제된 공기가 감도는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벽은 더 두꺼워졌고, 복도에는 카펫이 깔려 발소리조차 죽었다. 완벽한 방음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오크 나무 문 앞이었다. 문에는 금속 명판이 붙어 있었다. 헝가리어로는 ‘VIP 라운지 1’, 그 아래에는 한국어로 ‘접대실’이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접대실. 채은은 그 단어를 입술로 되뇌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손님이 아니었다. 직원도 아니었다. 그녀는 ‘접대’를 제공하는 사람이었다.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아까 보았던 응접실과 비슷하면서도 더 화려했다. 벨벳 소파, 크리스털 샹들리에, 거대한 편면경 거울. 그러나 그 거울이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니라는 것은, 구석에 설치된 CCTV의 붉은 점멸등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파 한가운데,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쉰 중반쯤으로 보였다. 은발이 섞인 머리칼, 반듯한 이목구비, 그리고 몸에 딱 맞는 이탈리안 수제 양복. 그는 손에 위스키 잔을 쥐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그가 직접 가져온 듯한 고급 시가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아, 오셨군요.”
남자가 일어서며 미소 지었다. 그의 헝가리어는 부드럽고 유려했다. 그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손을 내밀었다.
“저는 벨러입니다. 벨러 샤보. 오늘 당신의 통역 서비스를 부탁드린 사람이에요.”
통역 서비스.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채은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와, 블라우스의 깊게 파인 목선, 그리고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로 옮겨갔다. 마치 생선 시장에서 횟감을 살피는 듯한, 그런 객관적이고 평가적인 시선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셨다면서요? 저도 사실 프란츠 리스트의 열렬한 팬이에요. 특히 ‘사랑의 꿈’ 3번… 아실 거예요?”
벨러는 자연스럽게 채은을 소파로 이끌며 위스키 잔을 하나 더 따랐다.
“아… 네. 물론이죠.”
채은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 잔을 받아들었다.
“자, 그럼 우리 음악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그런데 이 근처에는 왜 이렇게 감시 카메라가 많은 거죠? 마치 감옥 같아서 좀 불편하네요.”
벨러가 천장 구석의 CCTV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순간, 채은은 깨달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지금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 공간의 진짜 본질을 그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이 ‘밀실’이며, 자신이 그 밀실의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안상 그런 것 같아요. VIP 고객님들의 안전을 위해서…”
채은은 이슈트반이 가르쳐 준 대로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안전하게 즐겨야겠네요.”
벨러가 미소 지으며 잔을 기울였다.
이후 한 시간 동안, 그들은 피아노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쇼팽의 녹턴, 드뷔시의 달빛. 벨러는 진짜로 클래식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지식은 허세가 아니었고, 채은은 어느 순간 그와 대화에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채은 씨, 피아노는 언제까지 칠 거예요?”
갑자기 벨러가 물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질문의 방향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네?”
“그러니까… 유학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할 거냐고요. 과외? 음악학원? 아니면 대학원?”
“아직… 정확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채은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겠죠. 유학생들은 다 그래요.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당장의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지.”
벨러는 위스키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채은 씨. 당신 지금 이슈트반한테 진 빚, 생각보다 훨씬 클 텐데. 어떻게 갚을 생각이에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채은의 손에 쥔 위스키 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게…”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어요.”
벨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이 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면, 당신은 깜짝 놀랄 거요. 내 전화 한 통이면 당신 빚 문제는 말 그대로 1분 만에 해결돼요. 이슈트반도 나한테는 함부로 못 해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눈빛과 말투에서 분명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이 남자는 이슈트반조차 굴복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권력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랐다.
“대신…”
벨러가 손을 뻗어 채은의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렸다.
“당신도 나한테 뭘 좀 줘야 하지 않겠어요?”
채은의 몸 전체가 경직되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소파 등받이가 그녀의 도망을 막았다. 벨러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고, 이제는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스커트의 천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장관님… 저는 그런…”
“내가 강요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제안일 뿐이야.”
벨러가 미소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업가의 계산된 미소였다.
“당신이 내 제안을 거절하면, 난 그냥 다른 날 다시 오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당신 빚은 매일 이자가 붙고 있고, 이슈트반은 나보다 훨씬 덜 인내심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오늘 나를 그냥 돌려보낸다는 소문이 돌면, 내일부터 당신에게 배정될 VIP들은… 아마 나보다 훨씬 덜 친절할 거요.”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었다. 이곳의 시스템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더 가혹한 상황을 향해 나아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굴복하지 않으면 더 큰 굴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채은은 손에 쥔 위스키 잔을 내려다보았다. 호박색 액체가 실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잔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비웠다.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가슴을 데웠다.
“현명한 선택이에요.”
벨러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무릎이 아니라,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마치 평범한 중년 남성의 손처럼.
그러나 그 손이 천천히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채은은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뇌리는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벨러가 방을 떠났을 때, 채은은 소파에 반쯤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크리스털 조각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 옷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의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선과 손길을 견뎌낸 전장의 흔적이었다.
문이 열리고, 이슈트반이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우아했고,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고했어요, 채은 씨. 장관님께서 아주 만족하셨어요. 다음에도 꼭 당신을 찾으시겠대요.”
채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블라우스의 단추를 다시 잠갔다. 그녀의 손가락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건 오늘 일당이에요.”
이슈트반이 봉투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기본 시급 5,000포린트에 특별 수당까지 합쳐서 20만 포린트. 나쁘지 않죠? 이런 VIP 접대를 한 달에 서너 번만 해도, 당신 빚은 순식간에 줄어들 거요.”
봉투는 두껍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채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봉투를 응시하며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이곳의 시스템이었다. 굴복하면 돈을 주고, 돈을 받으면 다음 굴복을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다. 돈을 받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 이 계약에 동의한 참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일은 더 중요한 분이 오셔요. 오늘 장관님보다 훨씬 높은 분이지. 나라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이 동유럽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분이야.”
이슈트반이 문가에서 멈추며 말을 덧붙였다.
“옷은 내일 새로 준비해 놓을 테니까, 오늘보다 조금 더 화려하게 입어야 할 거요. 그분은 프랑스산 실크를 아주 좋아하시거든.”
그리고 문이 닫혔다. 다시 철컥 하는 잠금 소리.
채은은 혼자 남았다. 탁자 위에는 빈 위스키 잔, 벨러가 두고 간 시가 재떨이, 그리고 이슈트반이 놓고 간 20만 포린트 봉투. 세 가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지폐의 무게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이 돈이면, 적어도 다음 달 월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친구들에게 밀린 외상값도 갚을 수 있다. SNS에 올릴 사진도, 더 이상 가난을 숨기기 위한 연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대가는 무엇인가.
채은은 봉투를 핸드백에 넣으며, 방 한구석의 편면경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이미 죽어 있었다. 아니, 죽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높은 VIP가 온다. 그리고 모레는, 또 그다음 날은… 이 굴복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그녀에게 이 지하 미궁에서 빠져나갈 출구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그녀는 이 미궁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일까.
거울 속에서, CCTV의 붉은 점멸등이 그녀의 뺨 위를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의 선택은? (1차 분기점)
채은은 허세의 대가로 쳐진 촘촘한 거미줄 한가운데에 갇혔습니다. 부패한 권력자들의 추악한 욕망이 도사린 밀실 문 앞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은 무엇입니까?
[선택 1] 이슈트반의 지시에 굴복하여 접대방 문을 연다.
[선택 2] 포기하지 않고 온천 내부의 빈틈을 찾아 반항을 시도한다.(무료)
(※ 선택하신 분기점의 다음 화를 결제하시면 채은의 잔혹한 운명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