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그림자 헝가리편 #001] 부다페스트의 잔혹한 온천 – 1화: 화려한 야경 뒤의 덫

[유라시아의 그림자 헝가리편 #001] 부다페스트의 잔혹한 온천 – 1화: 화려한 야경 뒤의 덫

다뉴브 강 위로 황금빛 조명이 춤추는 밤, 부다페스트는 마치 동화 속 왕국처럼 눈부셨다. 국회의사당의 돔이 수면에 반사되어 일렁일 때마다, 이 도시에 사는 모두가 저마다의 황홀한 꿈을 꾸고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한채은의 스마트폰 화면은 그 어떤 야경보다도 잔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통장 잔액은 12,000포린트. 한국 돈으로 약 4만 5천 원. 내일이 월세 납부일이었다.

“씨발…”

채은은 리스트 페렌츠 광장의 고급 카페 테라스에 앉아, 식어버린 라떼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찻잔 받침대 옆에는 한 시간 전에 계산한 영수증이 나뒹굴고 있었다. 2,450포린트. 이제 이런 사치조차 허락되지 않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켰다. 앱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동기 하나가 올린 스토리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을 배경으로, 구찌 재킷을 걸친 채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진. 위치 태그는 ‘부다 성’. 딱 네 시간 전에 올라온 게시물에는 벌써 하트가 스물일곱 개나 달려 있었다.

채은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 올렸다. 자신의 피드가 스크롤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게시물. 9월 3일. 이스트반 거리 부티크에서 산 가죽 카드지갑 사진. 캡션: “유럽에서는 작은 소품 하나도 감성이 다르네요 #부다페스트라이프 #소확행”. 좋아요 82개. 댓글: “헐 예뻐ㅠㅠ 얼마에요?” — “15만원 정도! 한국보다 싸!” — 그렇게 답댓글을 달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번째 게시물. 10월 12일. 드레스덴 음악제 갔을 때 산 핸드백 사진. 캡션: “리스트 콩쿨 보러 왔다가 겸사겸사 #드레스덴 #음악하는여자”. 좋아요 115개. 그때는 부모님이 보내주신 추석 용돈으로 겨우 카드값을 막았었다. 어머니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거 꼭 필요한 악보 사고, 연습실 대여비로 써라.”

세 번째 게시물. 11월 27일.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입은 막스마라 코트. 캡션: “헝가리 첫눈! 이 코트가 없었으면 얼어 죽었을 듯 #겨울준비 #선물같은나”. 좋아요 147개. 그 코트는 여섯 달 할부로 샀다. 아직 할부는 세 달이나 남아 있었다.

네 번째. 12월 15일. 지금 살고 있는 5구역 테라스 원룸의 크리스마스 트리 사진. 캡션: “나만의 작은 유럽 #홈스윗홈 #부다페스트라이프”. 좋아요 201개. 월세 45만 원짜리 방. 전에 살던 9구역 반지하(월세 20만 원)와는 차원이 다른 고급 주택가였다.

채은은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엎어놓았다. 엎어놓은 화면 위로 디엠(DM) 알림이 하나 날아들었다. 상대는 유학원에서 만난 같은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채은아 ㅠㅠ 나 월세가 밀려서 큰일이야… 혹시 너도 그런 적 있어? 어떻게 해결했어?”

채은은 답장을 입력하다가 멈췄다. 어떻게 해결했냐고? 지금 자신의 통장에는 12,000포린트가 전부다. 그녀의 해결법은 오로지 하나, ‘부모님께 더 달라고 하기’였다. 그리고 그 카드마저 이제는 막혔다.

석 달 전, 어머니의 카톡이었다.
“채은아, 아빠 회사가 좀 어려워지셨대. 이번 달 송금, 조금만 이해해 줘.”

200만 원 중 150만 원이 입금된 첫 달, 채은은 저녁을 거르며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다음 달, 100만 원이 입금되었을 때 공포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통장에는 12,000포린트만이 남아 있었다.

부다페스트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쥔 현실은 그 어떤 야경보다도 차갑고 무거웠다.

“한채은 씨?”

뒤에서 들려온 낯선 한국어에 채은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뒤돌아보니 스물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한국인 남성이 서 있었다. 반듯한 정장 차림에, 손목에는 번쩍이는 롤렉스 시계. 얼굴에는 사업가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세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라셨죠? 저는 유진호라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무역 사업을 하고 있어요. 요즘 이 카페에 자주 오시는 것 같아서, 혹시 한국 분이신가 해서요.”

채은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해외에서 만나는 한국인이라고 다 반가운 게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호는 지나치게 세련되었고, 지나치게 공손했다. 그는 채은의 맞은편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손짓으로 웨이터에게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음대생이시죠? 가방에 악보가 보이네요.”

“네… 피아노 전공이에요.”

“우와, 정말 멋지네요. 저도 사실 클래식 매니아거든요. 얼마 전에 리스트 홀에서 본 연주회… 누구였더라, 아, 그 한국인 피아니스트요. 그 연주 진짜 감동이었는데.”

말재주가 좋았다. 아니, 사람의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채은의 전공을 칭찬했고, 부다페스트의 숨은 명소를 추천해 주었으며, 교포 사회에 대한 정보도 자연스럽게 흘렸다. 단 한 번도 채은의 사생활을 캐묻거나 불쾌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먼저 마음을 열게 만드는, 그런 부드러운 포용력이 있었다.

“그런데 채은 씨, 혹시 요즘 좀 힘드신 일 있으세요? 제가 아까부터 보니까 커피만 한 시간째 저으면서 표정이 좀…”

그 부드러운 질문에, 채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움을 구하고 싶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그 압박감이, 낯선 남자의 친절한 말 한마디에 둑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사실… 요즘 집에서 송금이 좀 밀려서요.”
채은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월세가 밀렸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 그런 고민이셨구나.”
유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목소리를 한 톤 낮춰 말했다.

“채은 씨, 제가 좀 염치없는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제가 유럽에서 오래 사업을 하다 보니까, 교포 유학생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를 진짜 많이 봤거든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

“혹시 급하게 필요한 금액이 있으시면, 제가 좀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 물론 이자는 받겠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때였다. 카페 한쪽에서 낮고 굵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서방, 또 당신이야? 젊은 유학생들한테 그런 장사나 하고 말이지.”

채은이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육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백발의 헝가리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흰 셔츠에 고급스러운 체크 양복 조끼를 걸친, 마치 옛 유럽 영화에서나 볼 법한 우아한 노인이었다. 그는 손에 든 신문을 접으며 유진호를 나무라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 이슈트반 선생님.”
유진호가 당황한 기색으로 일어섰다.
“제가 또 선생님 눈에 띄었네요.”

“눈에 띄긴. 네가 요즘 이 동네에서 젊은 한국 학생들만 보면 접근하는 게 눈에 안 띌 줄 알아? 어이, 아가씨. 이 친구한테 돈 빌리지 마요. 이자는 살인적이고 조건은 까다로워요.”

이슈트반이라는 노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채은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그것도 완벽한 발음으로.

채은의 사고 회로가 일순간 멈춰 섰다.

부다페스트 한복판에서, 그것도 육십 대 후반의 헝가리 노인에게서 서울 토박이보다 더 정확한 한국어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유럽 변두리라고 생각했던 이 도시에 삼성과 LG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대기업들을 마치 오랜 이웃처럼 말하는 이 노인의 존재 자체도 그녀의 인지 범위를 아득히 벗어났다.

“어… 어떻게 한국어를 그렇게 잘하세요?”

“내가 30년 넘게 한국 기업들이랑 비즈니스를 했지. 삼성, LG… 다 알어. 아, 내 소개가 늦었구먼. 이슈트반 코바치라고 해요. 부다페스트 시내에 작은 스파 호텔 두어 개랑 온천 리조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이슈트반은 미소 지으며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Kovács István – Boutique Spa & Wellness’라는 문구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채은은 그 명함을 받아들며 무언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유진호라는 남자에게서 느꼈던 미묘한 불편함이 이 노인의 등장으로 조금은 희석되는 듯했다.

“유 서방, 오늘은 이만 가보게. 이 학생은 내가 좀 도와줄 테니까.”
이슈트반은 마치 자기 손주라도 대하듯 채은을 감쌌다.
“얼마나 필요한 거요, 학생?”

채은은 망설였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바로 내일 아침 9시, 집주인이 월세를 받으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만약 월세를 못 내면, 계약 위반으로 당장 방을 빼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유학 생활은 그대로 끝장이었다.

“당장… 50만 포린트만 있으면…”
채은이 겨우 입을 열었다.
“월세랑 밀린 공과금만 해결하면, 다음 달에는 꼭 한국에서…”

“50만 포린트?”
이슈트반은 잠시 생각하더니 손사래를 쳤다.
“그걸로는 택도 없어요. 한 번 밀린 사람은 또 밀리고, 또 밀린다. 학생, 이건 어때요? 내가 당신 빚을 아예 전부 정리해 주는 거야. 그리고 내 온천 리조트에서 일자리도 주고. 한국 유학생들한테 인기 많은 VIP 의전 알바요. 시급도 꽤 좋아.”

“VIP 의전이요…?”
채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어떤 종류의 아르바이트인지 본능적인 의심이 스쳤다.

그러나 이슈트반은 채은의 의심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요. 단순한 통역이랑 행사 안내야. 우리 호텔은 정재계 VIP들이 많이 찾거든. 근데 아시아 언어가 가능한 스태프가 부족해서 늘 고민이었어요. 당신, 피아노 전공이라면서? 교양도 있고, 외모도 단정하니 딱 적임이야.”

이슈트반의 말투는 전혀 추근거리거나 음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녀의 진로를 걱정하는 할아버지 같은 훈훈함이 느껴졌다. 채은은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사채를 권유하던 유진호가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계약서도 당연히 쓰고, 모든 건 합법적으로 진행할 거요. 나는 이 동네에서 30년 넘게 장사한 사람이야. 무슨 불법을 하겠어?”

이슈트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내일 아침 10시, 내 호텔로 와요. 그때 자세한 이야기 나누자고. 아, 물론 지금 바로 계약금 50만 포린트도 줄 수 있어. 그거면 오늘 당장 월세 문제는 해결되겠지?”

그 말과 함께 이슈트반이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현금 다발이었다. 2만 포린트짜리 지폐 스물다섯 장. 아직 은행의 신선한 잉크 냄새가 풍기는 새 지폐였다.

채은은 그 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다뉴브 강은 여전히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동화 속 야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둡고 깊은 물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강바닥, 한번 빠지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검은 소용돌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이미 돈을 향해 천천히 뻗어지고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끔찍한 하루가 시작되기까지, 이제 정확히 열여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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