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잔혹사 이탈리아편 #001] 밀라노의 마네킹 – 5-2화: 하얀 방의 망령, 끊어지지 않는 실 (실제 사건 파일 기반 각색)

5-2화: 하얀 방의 망령, 끊어지지 않는 실

 

카모라 카르텔의 핵심 보안 단말기를 인터폴에 넘기고 밀라노 라인을 공중분해 시킨 대가는 역설적으로 카밀라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조각내버렸다.

  재판부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그녀는 ‘카밀라’라는 빛나던 이름을 버리고 스위스 알프스 자락의 외딴 시골 마을에 위치한 안전 가옥으로 격리되었다. 사방이 온통 하얗고 깨끗한 방. 창문 너머로는 밀라노의 회색 소음 대신 만년설의 고요함만 가득했지만, 그 정적은 오히려 카밀라의 뇌리를 갉아먹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었다. 루카 일당은 가석방 없는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들이 심어놓은 진짜 악마는 여전히 카밀라의 ‘혈관’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새로운 가명) 양, 오늘 처방된 진정제입니다. 수면 장애가 심해지신 것 같아 용량을 조금 늘렸습니다.”

  인터폴에서 파견된 현지 보호 요원이 알약이 담긴 플라스틱 컵을 건넸다. 카밀라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삼켰다. 하지만 연방 의사들이 처방해 주는 합법적인 신경안정제 따위로는, 카르텔이 강제로 주입했던 신종 약물 ‘블루 벨벳’이 남긴 지독한 갈망의 수렁을 메울 수 없었다.

  새벽 3시가 되면 지옥의 문이 열렸다. 약물이 전신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때마다 뼛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금단 증상이 밀려왔다. 온몸의 가죽이 뒤틀리고 오한이 일 때마다, 그녀의 두뇌는 저주스럽게도 그 참혹했던 펜트하우스의 기억을 재생해냈다.

  사내들에게 짓개어지고 개줄에 묶여 바닥을 기던 그 수치스러운 순간, 그 뒤에 찾아왔던 파란 안개 같은 환각의 해방감. 맨정신으로 마주하는 현실은 인터넷에 영구히 낙인찍힌 자신의 유린 영상이라는 망령뿐이었기에, 그녀의 나약해진 내면은 차라리 다시 약에 취해 그들의 발밑으로 기어 들어가던 타락의 순간을 기괴하게 갈망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때 그냥 눈감고 순응했더라면, 매일 그 파란 약을 맞으며 아무 고통도 모르고 살았을 텐데. 왜 도망쳐서 이런 지옥을 맨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거지?’

한번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인간의 정신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밀라는 자신이 지옥을 부쉈다는 사실보다, 그 지옥의 쾌락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추악한 내면에 더 큰 환멸을 느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카밀라는 보호 요원들이 잠든 틈을 타 화장실 거울 앞으로 기어갔다. 약을 구하고 싶다는 맹목적인 충동이 온몸의 신경을 지배했다. 당장 이 하얀 방을 탈출해 취리히나 제네바의 어두운 유흥가 뒷골목 사채업자들을 찾아가, 다시 제 몸을 담보로 던져서라도 ‘블루 벨벳’을 한 번만 더 혈관에 꽂아 넣고 싶다는 자멸적인 번민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세면대 위에 놓인 일회용 면도기를 움켜쥐었다. 칼날을 분해해 날카로운 조각을 꺼낸 카밀라는, 골반에 새겨진 카모라 카르텔의 흉측한 낙인 자국을 향해 사정없이 들이밀었다.

  서걱-! 서늘한 파열음과 함께 새빨간 핏줄기가 하얀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육체적 통증으로 뇌 가득 찬 마약의 망령을 억누르기 위한 처절한 자해였다. 핏방울이 바닥에 번질 때마다 카밀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아 오열했다.

  카르텔의 장막은 찢어발겼지만, 영혼의 사슬은 여전히 그녀의 목을 단단히 죄고 있었다. 악마들이 설계한 타락의 올가미는 연방 경찰의 보호 구역 안에서도 멈추지 않고 그녀의 정신을 침전시키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반격의 대가는, 이토록 잔인하고 끝이 없는 내면의 잔혹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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