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반항의 대가
유진은 입을 열었다.
“토니 씨, 죄송합니다. 다니엘 씨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저는 그런 길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유진은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토니가 화낼까 봐, 아니면 더 무서운 말을 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토니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래? 그렇구나. 유진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군. 알겠어. 강요하지는 않을게. 대신 말이지, 유진 씨.”
“네?”
“네가 선택한 길이라는 걸 잊지 마. 그리고 그 길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전화가 끊겼다.
유진은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손이 떨렸다. 방금 전,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할까?
침대에 누워 있는 지민이 몸을 뒤척였다. 지민은 아직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잠결에 무언가 중얼거렸다.
“도망쳐… 유진아… 도망쳐…”
유진은 지민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그날 밤, 유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니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길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그 말이 무슨 뜻일까? 토니가 어떤 일을 할까? 빚을 독촉할까? 아니면 더 나쁜 일을?
유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작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다니엘이 준 비닐 봉지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하얀색 알약 두 개. 유진은 그 봉지를 손에 쥐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그 내용물을 모두 쏟아 부었다.
물을 내렸다. 알약들은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졌다.
유진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깊게 패인 눈 밑. 하지만 적어도 양심은 깨끗했다. 그녀는 마약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했다.
다음 날 아침, 지민이 간신히 눈을 떴다.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지민아, 괜찮아?”
“응… 미안, 또 걱정 끼쳤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지민은 급격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병원에 가면 토니가 알게 돼. 그럼…”
지민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유진은 그녀의 반응에서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지민아, 토니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말해봐.”
지민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에는 주사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길게 늘어선 붉은 반점들. 마치 어떤 끔찍한 그림 같았다.
유진은 숨을 삼켰다.
“이게… 다니엘?”
“응. 나는 이미 약을 끊을 수 없어. 몸이 약을 원해. 토니는 그걸 이용해서 나를 조종해.”
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진아, 너는 절대로 이 길로 들어오지 마. 제발.”
며칠 후, 토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토니: 유진 씨, 빚 독촉하려는 건 아니고. 그런데 다음 주까지 3천 달러만 갚을 수 있을까? 사업상 자금이 좀 필요해서 그래.]
3천 달러.
유진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그녀가 가진 돈은 고작 500달러도 안 되었다. 학비와 생활비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3천 달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숫자였다.
[유진: 다음 주까지는 어렵습니다. 좀 더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토니: 글쎄… 사정이 어려워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데, 네가 싫다고 했잖아.]
그 ‘방법’이 무엇인지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마약.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것들.
[유진: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토니: 없어. 선택은 네 몫이야. 다음 주 수요일까지. 그때까지 3천 달러를 못 갚으면… 우리 다시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유진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합법적인 아르바이트. 하지만 당장 다음 주까지 3천 달러를 버는 것은 불가능했다. 편의점 알바는 시간당 25달러. 하루 8시간을 일해도 200달러. 주 5일을 일해도 1천 달러가 한계였다. 그나마도 구인 공고는 이미 경쟁이 치열했다.
유진은 학교의 국제 학생처에 도움을 요청했다.
“상담이 필요하신가요? 어떤 문제시죠?”
상담사가 친절하게 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사채, 마약, 성착취.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었다. 토니가 자신에게 한 협박이 떠올랐다. “네 사진과 영상이 어디로 갈지 몰라.”
“아… 그냥 경제적인 문제예요. 장학금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해서요.”
상담사는 장학금 신청 서류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 학기부터 적용되는 것이었고, 지금 당장의 위기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유진은 학교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소라였다.
“유진아, 나야. 시간 좀 있어?”
소라는 시내의 작은 카페에서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의 화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편한 옷차림. 유진은 그녀가 이렇게 수수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소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토니한테서 들었어. 네가 다니엘 제안 거절했다고.”
“어떻게 아셨어요?”
“이 바닥은 소문이 빠르거든. 그런데 유진아, 잘했어. 네가 그 선택을 한 게 정말 잘한 거야.”
소라의 말에 유진은 안도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나도 이제 그만하려고.”
“뭐라고요?”
“나도 토니한테서 벗어나려고. 너무 오래 버텼어. 더 이상은 못하겠어.”
소라는 자신의 핸드백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이게 내가 그동안 모은 증거야. 토니의 불법 대출 내역, 마약 거래 기록, 성착취 증거 사진과 영상 목록. 이걸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유진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이름들과 숫자들, 그리고 끔찍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소라의 이름도 있었다. 지민의 이름도. 그리고 몇몇 유진이 모르는 다른 여성들의 이름도.
“언니,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토니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알아. 그래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나는 이미 빚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만, 너는 아직 늦지 않았어. 유진아, 너도 증인이 되어줄 수 있어?”
유진은 망설였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토니에게 맞서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의미였다. 사진과 영상이 유포될 위험. 학교에서 쫓겨날 위험. 부모님께 모든 사실이 알려질 위험.
“생각해볼게요.”
“응. 시간은 많지 않아. 나는 다음 주 금요일에 경찰에 갈 거야. 그때까지 연락 줘.”
소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방에서 작은 USB 메모리를 꺼내 유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백업이야.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이걸 경찰에 제출해줘.”
유진은 그 USB를 손에 쥐었다.
소라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갔다.
다음 주 수요일.
토니가 유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유진 씨, 오늘이다.”
“죄송합니다. 아직 돈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그래? 그럼 나는 어쩌라는 거지? 내가 사람 좋아서 이자도 안 받고 빌려줬더니, 이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야?”
토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로움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듣기 싫어. 알바? 네가 무슨 알바를 해서 3천 달러를 버는데? 몇 달이 걸릴 것 같아? 그동안 이자는 어떻게 할 건데?”
“이자는…”
“이자는 당연히 붙지. 내가 은행이야? 내가 무이자로 빌려주는 걸 순수하게 받아들였어? 세상에 공짜는 없어, 유진 씨.”
토니는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5천 달러.”
“5천? 지난주에는 3천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자야. 이자. 그리고 추가로 발생한 비용들. 내가 사람을 붙여서 네 소재를 파악하는 데도 돈이 들거든. 알겠으면 준비하고, 모르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야.”
전화가 끊겼다.
유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라의 제안이 떠올랐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 하지만 그 길도 쉽지 않아 보였다. 증거를 제출해도 토니가 체포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그동안 유진의 사진과 영상은 어떻게 될까?
유진은 지민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민아, 토니에게 맞서 본 적 있어?”
지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있지. 한 번. 그런데 그 후로 일주일 동안 집에 못 들어갔어. 토니의 부하들이 나를 붙잡아서…”
지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나머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소라 언니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더라.”
지민의 눈이 커졌다.
“뭐? 소라가? 미친 거 아니야? 그렇게 하면 우리 모두 죽어. 토니는 가만히 있지 않아. 분명히 우리를 찾아낼 거야.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지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아, 제발. 소라 말 듣지 마. 우리는 이미 늦었어. 하지만 너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그냥 돈 갚고 여기서 조용히 살아. 그게 최선이야.”
하지만 유진은 알았다. 돈을 갚아도 끝이 아니라는 것을. 토니는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요구할 것이다. 이자는 불어나고, 빚은 깊어질 것이다.
그녀는 선택해야 했다.
토니의 요구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소라와 함께 맞설 것인가.
유진은 소라에게 연락했다.
“언니, 나도 함께 하겠어요.”
소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유진아. 하지만 이 길은 정말 위험해. 너는 아직 젊고, 미래가 있어. 나는 이미 망가졌지만, 너는…”
“저도 이미 망가졌어요. 아니, 망가져가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언니처럼 될 거예요. 그렇게 되기 전에 멈춰야 해요.”
소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그럼 이번 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오클랜드 중앙 경찰서 앞에서 만나. 증거물을 모두 가져와.”
“네.”
전화를 끊고, 유진은 자신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토니와의 대화 녹음, 문자 메시지, 이메일. 그동안 그녀가 모은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았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소라의 증거물과 합치면 충분할지도 몰랐다.
지민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 진짜 가는 거야?”
“응.”
“나도 같이 갈게.”
유진은 놀라서 지민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너 상태가 안 좋잖아.”
“상태는 문제가 아니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나는 결국 죽을 거야. 차라리 맞서는 게 낫지.”
지민의 눈에는 결의가 서 있었다. 유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지민아.”
“내가 더 고마워. 너 덕분에 용기가 났어.”
그날 밤, 두 사람은 잠들지 못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좋은 쪽으로 바뀔 수도, 나쁜 쪽으로 바뀔 수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유진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토니에게서 온 마지막 메시지.
[토니: 목요일까지 생각할 시간을 줄게. 금요일 아침에 답변해. 잘 생각해봐.]
유진은 메시지를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증거로 필요할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유진, 지민, 소라. 세 사람은 오클랜드 중앙 경찰서 앞에 모였다.
소라는 두툼한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준비됐어?”
“응.”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경찰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토니였다.
받을까, 말까.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유진 씨, 잘 생각해봤어? 네 마음이 어떻게 됐든, 나는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유진은 토니의 말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경찰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