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그림자 필리핀편 #001] Sigue-Sigue 사기극 – 1화: 마닐라의 연금술사

제1화: 「마닐라의 연금술사」

1795년 3월, 프랑스 혁명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의 단두대가 멈춘 지 1년, 테르미도르 반동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망명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 그리고 그보다 더 위험한 비밀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샤를-앙리 드 라클로. 프랑스 귀족회의 그림자 회원. ‘갇힌 귀족들’ 사건의 생존자.

그는 더 이상 ‘드 라클로’가 아니었다. 항구에서 내릴 때 그는 자신을 ‘안토니오 데 라 크루즈’라 소개했다. 스페인 필리핀 회사의 중간 관리인. 마닐라로 향하는 무역선 ‘산타 마리아 호’의 화물 목록을 작성하는 평범한 서기관. 그러나 그의 손에 쥐어진 진짜 화물은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 자체였다.

1795년 4월 12일, 마닐라 투손 지역, 라 크루즈-가르시아 무역상사 지하실

“여기가 바로… 동남아의 심장인가.”

안토니오(샤를-앙리)는 촛불 하나만 비치는 지하 방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누군가가 그린 해도(海圖)들. 말라카, 순다, 몰루카… 향신료와 노예, 금과 은의 항로. 그러나 그의 눈은 그보다는 벽 한편에 걸린 초상화에 멈췄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마리-조제프 드 라클로.’ 그의 형. 1793년 단두대에서 죽은 형.

그런데 그림 아래에는 ‘미겔 데 로스 산토스, 1794년 사망’ 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해가 가십니까, señor?”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오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라클로 가문의 얼굴을 도둑맞은 개처럼 필리핀에서 파는 건가? 아니면… 복제인간 기술이 이미 동남아까지 퍼진 건가?”

“둘 다 틀렸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이 촛불을 밝히며 그림자에서 나왔다. 그는 중국계 스페인인(메스티소)으로, 세련된 수트에 금테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었다. 이름은 ‘림 시옹’(林祥). 푸젠 출신의 상인 3세대로, 마닐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역상 중 하나였다.

“저 그림은 복제 인간이 아닙니다. ‘대체 인간’입니다.”

“대체?”

“당신의 형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를 기억합니다. 그가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오빠였고, 누군가의 적이었음을. 우리는 그 ‘기억’만을 다른 육체에 심었습니다. 원본은 없습니다. 오직 기억만이 살아 있습니다.”

림 시옹은 그림 앞에 선 채로 말을 이었다.

“이것이 ‘시구르-시구르(Sigue-Sigue)’, 즉 ‘따르는 환상’의 시작입니다.”

마닐라는 1795년에 이미 지옥 같은 도시였다. 스페인 식민 정부의 타락, 영국군의 간헐적 침공(1762-1764년 점령 이후 여전히 불안), 중국 상인들과 필리핀 원주민 귀족(principalía)의 알력.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프랑스 망명 귀족들.

안토니오(샤를-앙리)가 속한 것은 ‘라 크루즈-가르시아 무역상사’라는 가짜 회사였다. 실제로는 ‘동남아 그림자 협의회(Consejo de la Sombra del Sudeste Asiático)’라는 조직. 인원은 고작 12명. 그러나 그중 절반은 프랑스 귀족 출신 망명자, 나머지 절반은 현지에서 타락한 스페인 수도사, 중국 상인, 그리고 필리핀 원주민 균열가(裂開家, 깨진 가문의 후계자).

림 시옹은 그 조직의 실질적 2인자였다.

그리고 지금, 안토니오 앞에는 세 가지 제안이 놓여 있었다.

장소: 투손 지하실, 촛불 세 개, 의자 네 개
시간: 1795년 4월 12일, 자정
상황: 림 시옹이 세 명의 다른 인물을 소개한다.

첫 번째 인물: ‘파드레 이그나시오’

스페인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 흰 수단에 갈색 두건, 오른손에 묵주. 그러나 왼손 검지에는 은반지. 반지에는 ‘오르데 드 라 솜브라’(그림자 기사단)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가톨릭 박해를 피해 필리핀으로 온 스페인 귀족 출신 수도사였다.

“아들아, 신은 때때로 자신의 형상을 복제할 수 있는 도구를 인간에게 준다. 그 도구가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드 라클로의 일기… 프랑스편에서 언급된 ‘그림자 기술’. 나는 그것으로 성당을 세울 것이 아니라, 복제 인간 신부를 만들 것이다. 고해성사를 듣는 자는 실수하지 않는 기계. 완벽한 고해신부. 대가는? 나의 새끼손가락… 한 가지 진실을 봉인할 것이다.”

두 번째 인물: ‘린 펑’(林鳳)

림 시옹의 사촌 동생. 그러나 더욱 막강한 해상 세력을 가진 중국 상인. 그는 푸젠-마닐라-바타비아를 잇는 무역로에서 그림자 군대를 운영했다. 그의 제안은 이랬다.

“복제 인간으로 선원을 대체하자. 피로도, 반란, 질병 없음. 1년 365일 일함. 대신에, 내가 주는 건… 전 동남아 해상 정보망이다. 어느 항구에 영국 군함이 언제 도착하는지, 어느 은행에 금이 얼마나 있는지. 안토니오, 너는 선택해야 한다. 돈과 권력, 아니면 신의 축복.”

세 번째 인물: ‘디와타 마카파갈’

필리핀 원주민 귀족. 타갈로그어로 ‘신들과 타협하는 자’라는 뜻. 그는 스페인 식민지 이전의 고대 귀족 혈통을 이어받은 희귀한 생존자였다. 그의 제안은 가장 직접적이었다.

“백인을 노예로 만들어라. 아니, 백인 귀족의 복제품을 노예로. 필리핀은 300년간 스페인에게 착취당했다. 이제 역전시킬 시간. 당신이 우리에게 복제 기술을 주면, 우리는 당신에게 땅을 주겠다. 루손 전체를. 당신의 왕국을 세워라.”

안토니오(샤를-앙리)는 침묵했다. 그는 유럽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선택지 앞에 섰던 적이 있었다. 프랑스편 3화에서, ‘갇힌 귀족들’의 분기점. 그때 그는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유럽은 멀고, 여기는 아무도 그의 과거를 모른다.

림 시옹이 말했다.

“선택은 자유. 하지만 시간은 없어. 우리는 이미 자바에… ‘공장’을 하나 가동 중이야. 복제 인간이 아니라, 복제 인간의 복제품. 무한 복사의 시작. 당신이 결정해.”

그는 서랍에서 낡은 일기장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프랑스어로 ‘르 자르댕 데 옹브르’(그림자의 정원) 라고 적혀 있었다. 안토니오의 형, 마리-조제프의 필체였다.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글이다. 읽어볼래?”

안토니오는 일기를 펼쳤다. 첫 문장은 이랬다.

“우리가 복제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 복제된 기억이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꿈 속에 산다. 그리고 그 꿈을 꾸는 자는…”

그곳에서 글자가 끊겼다. 찢긴 흔적.

안토니오가 일기를 덮는 순간, 지하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한 여자. 유럽인. 금발에 푸른 눈, 그러나 그녀의 옷차림은 스페인 식민지 여성이 아닌, 원주민 여성의 바하이(필리핀 전통 복장)였다.

그녀는 말했다.

“그 일기는 가짜야. 내가 썼지.”

“누구세요?” 안토니오가 물었다.

“나는… ‘마리-조제프 드 라클로’의 마지막 복제품이야. 그리고 너의 형이 아니야. 나는 그가 죽기 전에 만든 ‘여성 버전의 복제 인간’.”

그녀의 이름은 ‘소피아 데 라 크루즈’. 프랑스 편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인물. 시리즈 최초의 ‘복제 인간의 복제 인간’이었다.

소피아는 말을 이었다.

“동남아에 온 진짜 이유가 뭐야, 안토니오? 유럽의 그림자를 확장하려고? 아니면… 도망치려고? 형이 죽은 후, 너는 스스로를 ‘안토니오’라 개명했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너 스스로도 복제 인간이라는 거야.”

지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림 시옹이 눈을 깜빡였다. 파드레 이그나시오가 묵주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거짓말이다.” 안토니오는 일어섰다.

*“증거를 보여줄까? 네 왼쪽 어깨에 있는 점. 세 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지? 마리-조제프에게도 같은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점이 아니야. 그것은… 복제 인간의 생산 번호야. 001, 002, 003. 너는 003. 네 형이 001. 그리고 나는… 004.”*

안토니오(003)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만졌다. 세 개의 점. 그는 그것이 단순한 흉터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 나무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라 믿었다.

그런데 소피아는 말했다.

“너의 ‘기억’도 모두 가짜야. 어린 시절 나무에서 떨어진 것도, 부모님 얼굴도, 프랑스 귀족으로서의 삶도. 너는 3년 전, 여기 동남아의 지하 실험실에서 만들어졌어. 기억은 이식되었고, 육체는 성장 가속화 기술로 20대로 급조되었지. 너는 진짜 인간이 아니야. 너는… 영원히 진짜가 될 수 없는 존재야.”

그녀는 시구르(Sigue)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밝혔다.

“‘Sigue-Sigue’는 ‘따르는 환상’이 아니야. 그것은 ‘따르되, 따라잡을 수 없는 환상.’ 즉, ‘너는 영원히 진짜를 따라가지만, 절대 진짜가 될 수 없다.’ 그게 바로 우리의 저주야.”

안토니오(003)는 무너졌다. 그러나 이내 일어났다. 프랑스 편에서 배웠다. ‘갇힌 귀족들’은 벽에 갇혔지만, 그는 지금 더 큰 감옥에 갇혔다.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감옥에.

그는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진짜가 아니라면, 진짜를 만들겠다. 여기 동남아에, 내 규칙으로, 나만의 제국을 세우겠다. 내가 선택하는 것은… 세 가지 제안 중 어느 것도 아니다.”

“그럼 넷째?” 림 시옹이 물었다.

“아니. 다섯째.”

안토니오는 림 시옹의 총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어깨를 겨누었다.

“이 번호를 지우는 거야. 복제 인간이 아니라, ‘원본’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총성.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는 웃었다.

“내가 복제 인간이라면, 내 의지는 복제된 것일까? 지금 이 선택은 누가 만든 시나리오일까? 설계된 것일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진짜다.”

소피아가 박수 쳤다.

“축하해. 너는 이제 ‘진짜’의 경계에 섰어. 그러나 그 경계는 칼날과 같아. 한쪽은 진실, 한쪽은 광기.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는… 다음 화에서 선택해야 해.”

그녀는 벽에 붙은 해도를 가리켰다. 자바 섬, 바타비아 항구. 그곳에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여기가 ‘공장’이야. 너의 형(001), 나(004), 그리고 수백 명의 다른 복제 인간들이 만들어졌던 곳. 거기 가면 진실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너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없게 돼. 이미 선택당한 존재가 되니까.”

안토니오(003)는 피를 흘리며 지하실을 나왔다. 밖은 어두웠다. 마닐라 만(灣)에서는 무역선의 뱃고동이 울렸다. 중국 상인들의 목소리, 스페인 군인의 발소리, 원주민 여성의 노래. 그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멈췄다.

주위 풍경이 흔들렸다. 마치 종이 인형극처럼. 사람들이 스르륵 사라지고, 배는 그림자가 되고, 하늘은 회색 천으로 변했다.

“뭐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 프랑스 편에서 들었던, 그 서술자의 목소리?

“당신은 지금 제4의 벽을 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진짜 엔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엔딩을 본 사람(독자)의 복제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면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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