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부유하는 자의 무게
서아는 3일을 벼랑 끝에 선 채로 보냈다.
월요일 아침, 그녀는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했다. 마케팅팀 사무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은 조명과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했다. 동료들은 주말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고, 팀장은 다음 주 신제품 프로모션 자료를 독촉했다. 서아는 그 중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을 열었다. 모니터 속 엑셀 시트에는 숫자들이 정렬되어 있었고, 그녀는 그 숫자들 사이로 김 실장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동기인 민영이 다가왔다. “서아야, 밥 먹으러 가자. 요새 왜 그렇게 말랐냐. 무슨 일 있어?” 서아는 고개를 저으며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아니, 그냥 요즘 입맛이 없어서. 너 먼저 가.” 도시락은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였다. 그녀는 카페테리아에서 8천 원짜리 샐러드를 사 먹던 자신이 낯설었다. 이제 점심값 5천 원도 아까웠다.
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자, 서아는 몰래 핸드폰을 확인했다. 김 실장에게서 온 마지막 문자가 여전히 대화창에 박혀 있었다. “금요일까지. 잊지 마세요.” 그녀는 문자를 읽을 때마다 명치가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인스타그램 피드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지난주 올린 풀빌라 파티 사진이 600개 가까운 좋아요를 돌파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서아는 그 알림을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이 600개의 하트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방패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그녀는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자신의 옷장을 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시즌별로 정리된 명품 가방, 구두, 재킷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구매 당시의 짜릿한 기억을 품고 있었다. 샤넬 백을 처음 샀을 때의 그 떨림, 발렌시아가 트리플S를 신고 거리에 섰을 때의 우월감, 몽클레르 패딩을 입고 출근하던 날 동료들의 시선을 즐기던 그 기분.
그녀는 손을 뻗어 가장 아끼는 샤넬 플랩백을 꺼냈다. 부드러운 램스킨 가죽이 손바닥에 감겼다. 이걸 팔면, 적어도 200만 원은 받을 수 있을까. 그녀는 중고 명품 거래 앱을 열었다. 같은 모델의 시세를 확인했다. 구매가 580만 원, 중고가는 350만 원. 그것도 팔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녀는 앱을 닫았다. 가방을 다시 먼지 커버에 싸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아직은… 아직은 안 돼.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화요일, 이틀째.
회사에서 서아는 점심시간마다 몰래 인터넷 대출을 검색했다. 네이버에 ‘신용불량자 소액대출’, ‘직장인 추가 대출’, ‘카드깡 업체’ 같은 키워드를 입력하며, 그녀는 수렁이 깊어지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대부업 등록이 된 곳들은 대부분 그녀의 신용 상태를 조회한 뒤 거절하거나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만 승인해 주었다. 불법 업체들만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최대 2,000만 원, 당일 입금.”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 문자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요일, 사흘째 되는 날. 그녀는 마침내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하고 단단했다. “그래, 서아야. 잘 지내나? 요즘 통 연락이 없네.” 서아는 수화기를 꼭 쥐며 말을 꺼내려 했다. 아버지, 저 사실 빚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입술까지 올라온 그 말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요즘 좀 힘들어서….”
“회사 일이야 다 그런 거지. 힘들어도 버텨야 한다. 너라면 잘할 거야.”
“네, 아버지.”
전화를 끊자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부모님에게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그녀가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성공 이미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명문대 졸업, 중견기업 취직, 자취 생활. 그녀가 부모님께 보여준 것은 항상 완벽한 딸의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 “사실은 명품 사느라 빚이 1,200만 원이고 사채업자가 협박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옛 대학 동기의 게시물을 보았다. 동기는 작은 원룸에서 반려묘와 찍은 사진을 올리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일상”이라는 글을 적었다. 좋아요는 30개. 댓글은 4개. 서아는 그 게시물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녀의 기준에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게시물을 보는 동안, 그녀의 가슴 한켠에 이상한 통증이 스쳤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안정감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그 감정을 지우고, 자신의 피드로 돌아왔다. 여전히 그녀의 계정에는 화려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지금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다.
목요일 밤, 약속된 시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서아는 ‘도망갈까.’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가방 몇 개만 챙겨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김 실장의 말이 발목을 잡았다. “부모님 분당에 사시죠.” 그 한 마디가 그녀의 발을 바닥에 묶어두는 쇠사슬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장으로 다시 향했다. 이번에는 명품 가방들이 아니라, 옷장 깊숙이 숨겨둔 보험 증서를 꺼냈다. 부모님이 그녀가 어렸을 때 들어준 변액 유니버셜 보험이었다. 해약하면 400만 원 정도가 나올 것이었다. 그녀는 증서를 손에 쥔 채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것마저 사라지면, 그녀에게 진짜 남는 것이 무엇일까.
금요일 저녁 7시. 서아는 다시 그 낡은 오피스텔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전화를 했다. “김 실장님, 저 왔어요.” 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검은 세단이 골목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걸.
4층 사무실에 들어서자 지난번과 풍경은 같았다. 김 실장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고, 무표정한 남자 두 명이 소파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서아가 들어가자 그들은 시선만 살짝 들어 그녀를 훑었다.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서아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앉으시죠. 커피라도 한잔?”
김 실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서아는 그 친절함이 가장 무서웠다. 그녀는 소파 끝에 걸터앉으며 보험 해약금 400만 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400만 원이에요. 이자랑 일부 원금으로 쳐주세요. 나머지는 다음 달에 꼭….”
김 실장은 봉투를 받아들고 안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냉기가 서려 있었다.
“서아 씨, 노력은 가상하네요. 그런데요, 이게 무슨 소용이 있죠? 400만 원이면 한 달 이자도 안 돼요. 지금 서아 씨 빚은 1,200만 원입니다. 다음 달이면 이자가 또 360만 원이 붙어요. 월급이 230만 원인 서아 씨가 이걸 어떻게 갚죠?”
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무릎 위에서 바르르 떨렸다. 수학적으로 이 빚을 갚을 방법은 그녀에게 없었다. 김 실장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제가 제안한 건 아직 유효합니다. VIP 접대. 거부하셔도 좋아요. 그럼 지금 당장 나머지 800만 원을 갚으시든가. 못 갚으면 이자는 계속 불어나고, 우리도 매달 독촉하러 와야 하고. 서로 피곤한 거죠.”
방 안의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야, 그냥 해. 처음만 힘들지 익숙해져.” 그 말에 다른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짧았지만, 서아의 귀에는 오래도록 울렸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어떤 거래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온몸으로 깨달았다.
김 실장은 손을 들어 부하들을 제지한 뒤 다시 말했다. “서아 씨, 우리도 사업입니다. 사업은 상호 이익이 되어야죠. 제 제안은 그래도 합리적이에요. 다른 업자 같았으면 벌써 더 심한 짓을 했을 겁니다. 나는 그래도 서아 씨에게 선택지를 드리고 있어요.”
그는 서류 한 장을 다시 꺼내 그녀 앞으로 밀었다. “고객 정보에요. 이번 주 토요일, 40대 사업가 분이세요. 와인 한잔하고 식사 대접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서 더 이상은 고객과 서아 씨가 알아서 하는 거고요. 이분 만나면 100만 원 깎아드립니다. 부모님께 알릴 필요도 없고, 회사에 알릴 필요도 없어요. 아무도 모르게 빚을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서류에는 남자의 간략한 프로필만 적혀 있었다. 나이, 직업, 결혼 여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아는 그 종이를 보며 질문했다. “이 사람들… 다 이런 식으로…?” 김 실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VIP분들의 사생활이라 제가 알 필요 없죠. 서아 씨도 모르는 척하는 게 좋아요.”
서아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100만 원. 한 번만 하면, 그녀가 한 달 동안 고민하던 이자의 일부가 사라진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목소리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것은 자발적인 타락인가, 아니면 이미 정해진 운명에 대한 합리적인 선택인가.
“…생각해볼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김 실장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의 인내심이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서아 씨, 우리도 시간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딱 하루만 더 드리죠. 내일 밤까지 연락 주세요. 만약 내일까지 답이 없으면, 그때는 저도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써야 합니다.”
다른 방법. 그 말의 의미를 서아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1층 현관을 나서자 골목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벽에 기대어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토요일 아침, 서아는 거실 소파에 웅크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폰에는 민영의 카톡이 와 있었다. “서아야, 오늘 강남에 새로 생긴 브런치 집 간다던데 같이 갈래? 인스타에 핫플이라던데.” 그녀는 답장을 쓰다 지웠다. “오늘 약속 있어”라는 거짓말조차 입에 담기가 싫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지난 일주일 사이에 핏기가 사라지고 턱선이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녀는 파운데이션을 꺼내 얼굴에 펴 발랐다. 다크서클을 가리기 위해 컨실러를 두 번 덧발랐다. 립스틱은 가장 비싼 샤넬 루즈 코코를 골랐다. 화장을 하는 동안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무슨 얼굴을 만들고 있는 걸까. 누구를 위한 화장인 걸까.
오후가 되자 그녀는 무작정 청담동으로 나왔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거리였다. 플래그십 스토어들의 커다란 유리창에는 이번 시즌 신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녀는 한 명품 매장 앞에 멈춰 서서 진열된 가방을 바라보았다. 이번 시즌 한정판. 가격은 아마 700만 원대. 한 달 전의 그녀라면 군침을 흘리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시선에는 아무런 욕망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진열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유리 너머의 그녀는 명품을 걸친 마네킹 옆에서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서아야!” 대학 동창 지연이었다. 지연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반갑게 흔들었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너 인스타 봤는데 요즘 진짜 대박이더라. 풀빌라에서 생일 파티 하고, 샤넬 백에 까르띠에 시계까지. 너 완전 인생 역전했네!”
서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의 눈빛은 진심 어린 부러움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을 보는 순간, 서아는 자신의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연이 보는 것은 진짜 서아가 아니었다. 그녀가 인스타그램에 깔아놓은 치장된 가면이었다. 그런데 그 가면을 위해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있었다.
“나중에 밥 한번 먹자! 요즘 핫한 데 내가 다 알아봐 놓을게.”
“…그래, 좋아.”
지연이 손을 흔들며 사라진 뒤, 서아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녀의 가방 속에서는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김 실장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동이 멈추고, 이번에는 문자가 왔다.
“서아 씨, 오늘 밤 8시까지입니다. 답 없으면 내일부터 우리 직원들이 서아 씨 회사로 출근 도장 찍으러 갑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읽었다. 그리고 화면을 올려 지연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지연은 방금 그녀와의 만남을 스토리에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청담에서 우연히 만난 핵인싸 서아! 완전 예뻐졌더라. 부럽다 진짜.” 그 스토리에는 하트 이모지가 3개나 달려 있었다.
서아는 스마트폰을 꺼두고 싶었다. 이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인스타그램을 닫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 하트 이모지들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세계였으니까.
토요일 밤 7시 30분. 서아는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거실 탁자 위에는 김 실장이 준 고객 프로필 서류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보험 해약 확인증, 그리고 텅 빈 통장이 놓여 있었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30분 남았다.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락하거나,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수락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 존엄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거절하는 것은 부모님의 안전과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선반 위에 정리된 명품 가방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가장 값비싼 샤넬 클래식 플랩백에 닿았다. 이 가방을 살 때만 해도, 그녀는 이 가방이 자신의 인생을 더 빛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녀는 이 가방을 들고 있는 사진으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이 가방은 그녀의 성공을 증명하는 트로피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이 가방들을 모두 팔아도 빚의 절반도 갚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이 가방들을 팔지 못하고 있었다. 왜일까. 왜 그녀는 이 가죽 조각들에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산 20만 원짜리 가방을 들고 다녔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같은 과 부유한 집 딸이 그녀의 가방을 보며 한마디 했다. “서아야, 가방이 좀… 애기 같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키득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자취방에서 가방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펑펑 울었다.
그 후로 그녀에게 가방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방패였다. 그녀를 얕보는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갑옷이었고, 동시에 그녀가 더 이상 그때의 초라한 서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훈장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방을 팔 수 없었다. 그것을 파는 순간, 그녀는 다시 20만 원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던 그 여자아이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시계는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아는 가방을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파로 돌아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김 실장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녀의 엄지가 통화 버튼 위에 머물렀다. 떨림이 손 전체로 번져갔다.
그녀는 전화를 걸지 못하고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올린 게시물은 5일 전,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찍은 디너 사진이었다. “작은 성취를 축하하며”라는 글과 함께. 좋아요 487개. 그녀는 그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487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삶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487명 중 단 한 명도 그녀가 지금 어떤 선택 앞에 서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이 487명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녀가 사실은 신용불량자에, 사채 빚에 허덕이며, 지금 성접대 제안을 고민하고 있는 여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애초에 그들은 진짜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뿌려댄 명품과 화려한 일상에만 관심이 있었을까.
시계가 7시 55분을 가리켰다.
그녀는 마침내 김 실장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짧은 몇 초가 그녀에게는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서아 씨, 결정하셨나요?”
김 실장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저녁 약속을 확인하는 사업가의 말투였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은 갈비뼈를 깨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입술이 달라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차피 다 내가 만든 빚이야. 내가 책임져야지. 한 번만 하면 100만 원이 사라져. 아무도 모를 거야. 부모님도, 친구들도.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빚 때문에 내 몸을 팔다니, 그건 내가 아니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도대체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서아 씨, 듣고 있나요? 결정하셨어요?”
서아는 눈을 떴다. 거실 벽에 걸린 전신 거울 속에 핏기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컨실러로 가린 다크서클, 샤넬 립스틱으로 칠한 입술. 그녀는 그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떨리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 글자씩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