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그림자 일본편 #002] 방주의 밤 – 1화: 증발 (蒸発)

1화: 증발 (蒸発)

도쿄 세타가야구의 고급 주택가는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평당 수백만 엔을 호가하는 대지 위에 지어진 저택들은 높은 콘크리트 담벼락과 촘촘하게 가꾸어진 정원 나무들을 방패 삼아, 사생활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철저히 격리하고 있었다. 이웃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의 치부 역시 단 한 조각도 담장 밖으로 흘리려 하지 않는 지독한 침묵의 동네. 6월의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사방이 눅눅했고, 불쾌할 정도로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밤이었다.

“거기까지만 하죠, 오오누키 씨.”

쿠로사와 레이는 어깨에 메고 있던 낡고 때가 탄 가죽 가방을 고급 다다미 바닥 위에 무심하게 내려놓으며 정면의 사내를 응시했다. 일본 굴지의 대형 중공업계에서 최고위 임원 자리까지 오른 사내이자, 이 숨 막히도록 거대한 저택의 주인인 오오누키의 얼굴은 깨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위태롭고 초췌했다. 낮 동안 유지했을 단정한 사회적 가면은 이미 흘러내린 지 오래였다. 그의 최고급 맞춤 정장 와이셔츠 깃은 땀과 독한 위스키 냄새로 눅눅하게 절어 있었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연신 담배를 비벼 끄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경찰에는… 끝내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주주 총회가 코앞입니다. 찌라시 주간지 기자 놈들이 조금이라도 냄새를 맡는 순간, 내 사회적 수명은 물론이고 우리 가문의 이름은 완전히 끝장납니다. 쿠로사와 씨, 당신이 음지에서 이런 까다로운 실종 사건을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해 준다고 해서 수소문 끝에 부른 겁니다. 그저… 그 미친 집단에 발을 들인 내 아내와 딸년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꺼내오면 됩니다. 보수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지불하지.”

오오누키의 거친 목소리에는 아내와 자식을 잃은 가장의 애끓는 슬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평생을 쌓아 올린 자신의 명성과 가문의 추악한 치부가 세상에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졸렬하고 이기적인 공포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일본 상류층의 민낯이었다. 쿠로사와는 그의 비열한 태도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오오누키가 떨리는 손으로 건넨 모녀의 사진을 무덤덤하게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단아하게 고가의 기모노를 차려입은 마흔 중반의 아내 하루코, 그리고 그 옆에서 짙은 화장을 한 채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명문대생 딸 나미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화목한 상류층 모녀의 모습이었지만, 쿠로사와의 날카로운 눈은 사진 속 두 사람의 눈동자에 고인 기묘한 균열을 포착했다. 그들의 시선은 카메라 렌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이 통째로 빠져나간 듯 초점이 풀린 눈은, 렌즈 너머 허공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기괴하고도 깊은 갈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 분이 집을 나가 연락이 두절된 지 정확히 일주일째라는 말씀이시죠.”

쿠로사와는 사진을 가방에 넣으며 차갑게 물었다. 오오누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마 모녀의 방이 있는 2층 계단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위스키를 가득 채운 잔을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쿠로사와는 홀로 모녀가 함께 사용하던 저택 2층의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코끝을 찌르는 것은 상류층 여성들이 쓸 법한 화려한 수입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곰팡이 슨 기억을 감추려는 듯 지독하리만치 깔끔하게 정돈된 방 안, 먼지 하나 없이 닦여 있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두꺼운 가죽 다이어리 한 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딸 나미의 일기장이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책장을 천천히 넘기던 쿠로사와의 미간이 좁아졌다. 초반의 단정하고 자로 잰 듯 성실했던 글씨체는, 페이지가 뒤로 넘어갈수록 날카로운 송곳으로 종이를 찢어발기듯 기형적이고 거칠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정신이 서서히 붕괴해 가는 자가 남긴 처절한 흔적이었다.

‘5월 14일. 아버지는 오늘 밤에도 거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2층까지 올라왔다. 이 집은 가정이 아니다. 사방이 숨 막히는 숨겨진 무덤이다. 어머니는 매일 밤 불 꺼진 거실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피가 나도록 맨바닥을 긁으며 기도한다. 이 가문에 흐르는 더러운 업보와 죄를 자신이 몸으로 다 닦아내야만 내가 살 수 있다면서. 하지만 정작 내 영혼은 안에서부터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다. 탈출하고 싶다. 이 지옥에서 누구든 나를 꺼내준다면 영혼이라도 바치겠다.’

‘6월 2일. 드디어 그분이 오셨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도쿄 외곽의 허름한 지하 다방. 그곳에서 내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가장 낮고 따뜻한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분은 나의 화려한 배경이나 대학 간판을 묻지 않았다. 그저 내 젖은 눈을 보시더니, 내 안의 깊은 슬픔을 손으로 만지셨다. 그분의 크고 축축한 손길이 내 살갗에 닿는 순간, 지난 20년간 나를 짓누르던 무덤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분은 내 귀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너희 가문의 죄가 깊으니, 내 방주로 들어와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쳐라. 바깥세상의 더러운 불바다를 피해, 밤의 방주로 오너라.” 아, 나의 구원자. 나의 진정한 아버지.’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는 글씨가 아니었다. 가족이 다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찍은 스티커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오오누키의 얼굴 부분만 커터칼로 수십 번을 정교하고 잔인하게 난도질해 완전히 파내 버린 자국이 선명했다. 도려내 진 사각형의 구멍 너머로 책상의 시커먼 바닥이 마치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그 도려내 진 구멍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가출이 아니었다. 혈연이라는 가식적인 굴레에 대한 지독한 증오이자, 바깥 사회의 도덕과 규율을 향한 완전한 부정이 가득 찬 선전포고였다.

일기장을 가볍게 터는 순간, 빳빳한 종이 사이에 끼워져 있던 작은 영수증 조각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쿠로사와는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 올렸다. 도쿄에서 출발해 시즈오카현의 오랜 온천 도시, 아타미 시의 외딴 산중 마을로 향하는 편도 기차표 두 장이었다. 그리고 영수증 하단에는 붉은 인크로 흐릿하게 찍힌 의문의 도장 문양이 선명했다. 기독교의 정통 십자가를 기괴하게 거꾸로 뒤집어 놓은 채,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온몸으로 그 십자가를 칭칭 감싸고 있는 형상.

“자발적 증발이군.”

쿠로사와는 혼잣말로 나지막이 뱉었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머리채를 잡혀 납치된 것이 아니었다. 모녀는 자신들을 억누르던 가문을 저주하며, 자신들의 나약한 정신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성적으로 그루밍한 ‘영적 대부’의 품을 찾아 스스로 밤의 장막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쿠로사와는 오오누키의 저택을 나와 자신의 오래된 세단에 올라탔다. 가속 페달을 밟자 차량은 빗길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전면 유리를 사정없이 때리는 장대비를 와이퍼가 거칠게 닦아내기 시작했지만, 아타미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이미 장마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사방이 우윳빛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질수록 차 안의 정적은 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대시보드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으로 아타미 지역의 외딴 외곽 지도를 검색했다. 하지만 그들이 향했을 법한 산중 깊은 곳의 정보는 기묘할 정도로 차단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관광 지도나 온천 안내 사이트에는 오직 ‘지방자치단체 통제 구역’, ‘소유주 불명으로 인한 폐업’, ‘민간인 출입 금지’라는 붉은색 글자들만이 건조하게 검색 결과를 채우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에서 철저히 격리된 음지. 사이비 종교 집단이 둥지를 틀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환경은 없었다. 쿠로사와는 과거 기록을 샅샅이 뒤진 끝에, 1980년대 잠시 번창했다가 의문의 집단 실종 사건 이후 방치되었다는 ‘아즈마야 여관’이라는 오래된 지명을 찾아냈다. 최근 몇 년간 외지에서 온 젊은 여성들이 그 근처에서 목격되었다는 음지의 소문이 복선처럼 깔려 있었다. 주소는 아타미 시내에서도 차량으로 거친 산길을 30분 이상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깊은 숲속이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왕복 1차선의 좁은 국도로 접어들자, 주변 풍경은 도쿄의 화려한 콘크리트 숲과는 완전히 다른 기괴한 원시의 안개로 바뀌었다. 가로등조차 듬성듬성 끊긴 길 양옆으로 아름드리나무들이 귀신 같은 형상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차를 한적한 갓길에 잠시 세우고 운전석 창문을 반쯤 내렸다. 순간, 축축하고 차가운 밤안개가 차량 내부로 거침없이 스며들었다. 밀려오는 공기 속에는 온천 특유의 비릿하고 독한 유황 냄새와 함께, 오랜 시간 햇빛을 보지 못해 썩어가는 고목과 젖은 흙의 향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평화로운 휴양지의 냄새가 아니었다. 거대한 늪지대에서 무언가가 썩어 문드러지며 뿜어내는 파멸의 냄새에 가까웠다. 쿠로사와는 그 독특한 취기를 가슴 깊이 밀어 넣으며 기억해 두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가 거대한 덫과 같은 ‘방주’의 경계선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첫 번째 감각적 신호였기 때문이다.

아타미 시내 하단부의 퇴락한 상점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장마철의 해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저물었고, 바다에서 밀려온 해무까지 겹쳐 사방은 이미 한밤중처럼 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인적조차 끊긴 낡은 골목길, 기형적으로 붉은 네온사인 간판을 켠 채 기름때 절은 냄새를 풍기는 작은 선술집 겸 식당이 보였다. 쿠로사와는 차를 세우고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조용했다. 구석진 테이블에 동네 노인 몇 명이 모여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카운터 뒤에서는 나이 지긋한 여점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마른 행주질을 하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바 자리에 앉으며 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실례합니다. 이 위쪽 산길에 있다는 ‘아즈마야 여관’으로 가려면 이 길이 맞습니까?”

그 순간,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엔카 음악 소리마저 묻어버릴 정도로, 식당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구석에서 잔을 기울이던 노인들이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쿠로사와의 뒤통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카운터의 점원은 행주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경계와 두려움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다그치듯 바라보았다.

“거기는… 절대 가시면 안 돼요. 거기는 이미 이 세상 땅이 아닙니다. 그곳은… ‘그분’의 성역이에요. 외지인이 멋모르고 발을 들였다가는… 두 번 다시 살아서 산을 내려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쿠로사와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가죽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빳빳한 만엔짜리 지폐 몇 장을 카운터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지폐가 테이블 위를 슥 긁는 소리가 적막한 식당 안에 크게 울렸다.

“그들이 제 가족을 데려갔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대로 알려주십시오.”

돈의 위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절망에 빠진 이의 눈빛이라 오해했기 때문이었을까. 구석에 앉아 있던 가장 늙은 사내가 깊은 한숨을 쉬며 담배 연기와 함께 밭은기침을 뱉어냈다.

“센고쿠… 교단 사람들은 그 자를 ‘센고쿠 선생님’ 혹은 ‘진정한 아버지’라고 부르지. 겉보기엔 멀쩡하게 생긴 도쿄 출신의 늙은이인데, 말솜씨가 어찌나 교묘한지 사람의 마음속 가장 약한 구석을 귀신같이 후벼 판다네. 처음 몇 년 전 이곳에 내려왔을 때는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단순한 영적 명상 수업을 한다고 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지. 특히 도쿄나 교토 같은 대도시에서 가문이나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학대당하고 버림받은 부유한 집안의 모녀들만 기막히게 골라내서 이 산속으로 유인하더군.”

노인은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 방주라는 여관 안으로 들어간 모녀들은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끊고 스스로 갇히네. 들리는 소문으로는, 교주 놈이 그 가문의 죄와 조상의 업보를 깨끗이 씻어내야만 구원을 받는다며 밤마다 기괴한 의식을 치른다고 하더군. 하얀 소복만 걸친 채 세뇌당한 어머니들이 보는 눈앞에서, 그들의 젊은 딸들을 교주의 침실로 밀어 넣는 잔인한 ‘육체적 세례’ 말이네. 모녀가 서로를 인질로 삼아 누구도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거지. 그 안에서 여자들은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빼앗긴 채, 교주 한 놈의 성적 노리개이자 노예로 변해버리는 거야. 제발 내 말 들으시오. 거긴 인간이 갈 곳이 못 돼.”

쿠로사와는 가만히 노인의 말을 들었다. 오오누키의 방에서 보았던 난도질당한 사진과 나미의 일기장 속 조각들이 완벽하게 하나의 잔혹한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돈을 남겨둔 채 짧게 목례했다.

“귀한 정보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그 지옥에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선술집을 나온 쿠로사와의 차량은 본격적으로 아타미의 가파른 산길 궤도에 진입했다. 도로는 이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졌고, 아스팔트는 여기저기 갈라져 잡초가 무성했다. 문명의 상징인 가로등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오직 차량 전면의 헤드라이트 불빛 두 줄기만이 밤안개를 서슬 퍼렇게 찢으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길가 모퉁이에 오랜 세월 방치되어 이끼가 검게 흘러내린 작은 돌비석이 나타났다. 수풀에 반쯤 가려진 표면에는 거칠게 새겨진 글씨가 있었다. ‘아즈마야 여관 – 이 길로 500m’.

쿠로사와는 더 이상 차량의 엔진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차를 공터 길가에 바짝 붙여 세우고 시동을 껐다. 미등까지 완전히 소등하자 사방은 지독한 암흑 속으로 침전했다. 가죽 가방을 단단히 고쳐 멘 그녀는 차 문을 조용히 닫고 숲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발밑을 밟을 때마다 장맛비에 팅팅 불은 젖은 낙엽과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뭉개졌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고, 대기 중의 유황 냄새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밀도를 더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기괴하게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목조 건물의 음산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즈마야 여관, 아니 광신의 덫인 ‘방주’의 본거지였다.

건물은 에도 시대의 양식을 간직한 전통적인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이었다. 비바람에 썩어 시커멓게 변한 나무 외벽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가죽처럼 보였고, 넓적한 지붕 위로는 장맛비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옥의 창문마다 창호지가 누렇게 바랜 채 발라져 있었는데, 그 얇은 종이 틈새로 붉고 은은한 촉광 등불 빛이 유령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희미한 불빛 속에서, 기모노를 입은 누군가의 가녀린 그림자가 기괴할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쿠로사와는 여관의 거대한 정문 앞에 서서 깊은 숨을 몰아쉬며 가방끈을 꽉 쥐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온천 여관의 외형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얇은 창호지 문 너머에서는 종교라는 절대적인 권위의 가면을 쓴 교주와, 가문에 대한 증오 때문에 스스로 눈을 멀게 한 모녀의 추악하고도 처절한 성적 유린과 지배가 똬리를 틀고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저택의 입구인 현관(玄関)으로 다가갔다. 자발적인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유혹하듯, 거대한 나무 미닫이문은 잠금장치도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는 따뜻하면서도 불쾌한 열기와 함께 묘한 향 내음이 풍겨왔다. 쿠로사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거침없이 어두운 현관 안으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경계선을 넘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산속의 짙은 밤안개가 그녀의 등 뒤를 거칠게 집어삼키며 밀려 들어왔다. 마치 먹잇감을 삼킨 괴물이 입을 닫아버리듯, 어둠은 그녀가 걸어온 탈출구를 완벽하게 봉인해 버렸다. 이제 밤의 방주 안에서 펼쳐질 지옥 같은 심리전의 서막이 완전히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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