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그림자 호르무즈편 #001] 무법의 철판, 멈춰선 카스피호 – 4-2화: 사슬을 끊는 자

4-2화: 사슬을 끊는 자

비상 계단의 차가운 철제 난간을 움켜쥔 민우의 왼손바닥은 이미 상층 갑판 복도에서 뿜어져 나온 1등 항해사의 뜨겁고 끈적한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암흑이 지배하는 좁고 가파른 사다리를 한 칸씩 디뎌 오를 때마다, 작업복 바지 주머니 속에 고정해 둔 부러진 가스 렌치의 날카로운 단면이 허벅지 살점을 사정없이 긁어대며 쓰라린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그 육체적인 고통조차 페르시아만의 살인적인 열기와 조타실 내부를 가득 채운 공포의 밀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른손에 쥔 소총의 묵직한 크롬 개판은 서울에서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던 복학생의 손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이질적인 파괴의 도구였으나, 기계공학을 전공하며 만졌던 수많은 산업용 철제 공구들의 메커니즘이 본능적으로 노리쇠의 위치와 안전장치의 촉감을 그의 뇌리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배 전체의 보조 발전기가 완전히 차단되면서 강제 공조 장치가 멈춰 서자, 밀폐된 철제 계단실 내부의 온도는 순식간에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한증막으로 변해갔다. 숨을 깊이 들이쉴 때마다 녹슨 철가루와 배 밑바닥에서 유출된 썩은 유압 오일 가스가 폐부 깊숙이 박혀 들어와 발작적인 기침이 터질 것 같았지만, 민우는 이빨로 혀끝을 피가 나도록 짓눌러 가며 거친 숨소리를 강제로 쪼개어 삼켰다. 조타실 상부에서 흘러나오는 선장의 다급한 구두굽 소리와 권총의 가죽 홀스터가 거칠게 마찰하는 금속음이 암흑의 공간을 뚫고 선명하게 하강하고 있었다. 포식자가 예기치 못한 암흑 속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야말로, 가축으로 박제되어 가던 인간이 역으로 사냥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유일한 사각지대였다.

상층 갑판의 선교 내부 복도로 이어지는 이중 철문을 밀고 나서자, 좌현 창문을 통해 페르시아만의 깊고 짙푸른 새벽빛이 미세하게 스며들어 와 복도 내부 사물들의 윤곽을 흐릿한 유령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안심하고 숨을 고를 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카스피호의 우현 舷側(현측)에 바짝 밀착해 있던 상대방 해상 카르텔의 불법 물류선은 아직 전력이 온전하게 살아 있는 상태였기에, 그들의 선박 상부에 장착된 고성능 서치라이트의 백색 불빛이 불규칙하게 조타실 유리창을 때리며 복도 벽면에 기괴하고 일렁이는림자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광선이 방 안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민우는 격벽의 어두운 음영 밑으로 몸을 바짝 붙여 단 1밀리미터의 실루엣도 노출하지 않으려 집중했다.

그때 복도 반대편, 선장실 개인 집무실 입구에서 무거운 사설 손전등의 강렬한 백색 광선이 어둠을 날카롭게 찢으며 불쑥 튀어나왔다. 선장의 무전 지시를 받고 비상 배전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가려던 두 번째 무장 감시원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군용 자동소총이 대롱거리고 있었고, 그가 쥔 손전등의 광선은 민우가 숨어 있는 복도 모퉁이를 향해 빠른 보폭과 함께 좁혀져 왔다. 이 좁고 울림이 심한 철판 복도에서 소총을 발사했다가는 그 거대한 굉음 때문에 온 배의 감시원들과 상대 선박의 무장 브로커들이 단숨에 이곳으로 집결할 게 뻔했다. 민우는 탈취한 소총을 카펫 바닥에 소리 없이 내려놓은 뒤, 작업복 깊은 주머니에서 손가락 피부가 다 짓무르도록 날을 세워두었던 부러진 가스 렌치의 자루를 다시 한번 단단히 쥐었다.

손전등의 하얀 광선이 민우의 작업화 끝을 스치기 직전, 불규칙하게 조타실 창문을 들이받았던 상대 선박의 강력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감시원의 눈을 순간적으로 정면에서 때렸다. 역광의 폭격 속에서 감시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그 0.5초의 공백, 민우는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닥을 차고 호랑이처럼 돌진했다. 암흑과 광선이 뒤엉킨 틈새에서 튀어나온 유령 같은 형체에 감시원이 경악하며 소총 총구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민우의 왼손이 먼저 그의 소총 총열을 아래로 거칠게 꺾어내리며 벽면에 메쳤다. 동시에 오른손에 쥔 날카로운 철붙이의 파편 끝이 감시원의 턱밑 연약한 정맥 살점을 향해 사정없이 뿜어졌다.

푸욱, 하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렌치의 날카로운 단면이 감시원의 목덜미 깊숙한 곳을 관통하며 철판에 부딪히는 진동이 민우의 손목을 타고 전신으로 서늘하게 전달되었다. 감시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손전등을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목구멍에서 쿨럭거리는 핏물 소리만을 내며 민우의 어깨 위로 둔탁하게 쓰러졌다. 민우는 그의 거구를 누런 카펫 바닥으로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눕힌 뒤, 벨트를 뒤져 여분의 권총 한 자루와 통제용 위성 무전기를 추가로 확보했다. 가해자들이 만들어 놓은 무법의 장기판 위에서, 민우는 그들의 피비린내 나는 규칙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완벽한 포식자의 형상으로 스스로를 제련해 가고 있었다.

조타실의 이중 철문 앞은 상대 선박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위적인 광선과 카스피호 내부의 암흑이 기묘하게 뒤엉켜 지독한 압박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틈 너머로 선장이 휴대용 위성 무전기를 붙잡고 상대방 선박의 우두머리에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러시아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배의 발전기가 고장 난 것은 단순한 하부 정비 사고일 뿐이니 화물 이송을 멈추지 말고 로프를 더 단단히 조이라는 위선적인 명령이었다. 선장은 전력이 끊긴 진짜 원인이 내부의 조직적인 반란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노후화된 고철 선박의 기계 결함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기관장과 밀약을 맺고 메인 ACB 차단기를 통째로 날려버린 민우의 차가운 계산이 가해자의 오만한 머리를 완벽하게 관통한 것이다.

민우는 호흡을 극단적으로 가라앉히며 아구스에게서 빼앗았던 마스터 키를 이용해 조타실 문을 소리 없이 밀어 열었다. 커다란 키를 잡는 조타륜 뒤편, 선장의 거구자가 창밖을 보며 무전기에 대고 침을 튀기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의 방심한 등덜미가 외해의 빛을 받아 선명한 과녁처럼 드러났다. 민우는 더 이상 어둠 속으로 숨어 들지 않았다. 그는 탈취한 자동소총의 개판을 어깨에 단단히 밀착시킨 채, 조타실 한가운데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부츠 바닥에 묻은 앞선 감시원들의 피가 철판 바닥에 닿아 찌적거리는 서늘한 마찰음을 조타실 내부에 고요하게 퍼뜨렸다.

“항해사! 당장 엔진룸으로 내려가서 그 늙은 러시아 영감탱이 대가리에 총구를 대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안 가고 여기서 얼쩡거려!”

쳇바퀴 같은 기계음 대신 뒤편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육중한 발소리에 선장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와 기름때로 범벅이 된 채 자신에게 정확하게 소총 구멍을 겨누고 있는 유학생 민우의 서늘하고 죽어있는 눈동자였다. 선장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지며 허리춤의 권총 가죽 홀스터로 손을 빠르게 뻗으려 했다.

철컥.

민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총의 방당쇠를 살짝 당겨 경고의 금속음을 조타실 내부에 울렸다. 그 서늘하고 묵직한 파열음에 선장의 손이 공중에서 그대로 마비된 듯 얼어붙었다. 서울에서 올라온 유약하고 부려먹기 좋은 인턴 나부랭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자신들의 목숨줄을 사냥하러 온 진짜 야수의 기세를 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손 떼, 선장. 네가 여기서 손가락 하나라도 더 움직이면, 네 대가리가 이 조타실 유리창 너머 페르시아만 바다로 가장 먼저 흩어지게 될 거야.”

민우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으며, 살인적인 갈증으로 심하게 찢겨 있었지만 기묘할 정도로 정교한 통제력을 품고 있었다. 선장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창밖으로는 아래층 갑판에서 영문도 모른 채 암흑 속에서 대기하고 있는 외국인 선원들과, 불이 꺼진 카스피호를 보며 소총을 겨누기 시작한 상대 선박 브로커들의 거친 움직임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지하 엔진룸의 깊은 격벽 속에 숨겨둔 여권 가방과 진짜 항해 일지,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이 무기들. 이 무법지대의 철판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독종 유학생의 거대한 반격은 이제 선장의 목줄을 완벽하게 움켜쥔 채, 이 잔혹한 해상 카르텔의 심장부를 완전히 전복시키기 위한 진짜 반항의 서막을 향해 거침없이 폭주의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네가… 감히 내 배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 같나? 이 해협을 지배하는 카르텔이 어떤 자들인지 알기나 하는 거냐?”

선장은 총구 앞에서도 억지로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민우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려 했다.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전술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면 그 거대한 조직이라는 단어와 무법지대의 공포 앞에 무릎이 먼저 꺾였을 터였다. 하지만 민우는 이미 인간의 존엄성이 바닥까지 긁혀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찬우의 부서진 뼈와 피를 눈에 새긴 상태였다. 더 이상의 협박이나 두려움은 그의 심장을 흔들지 못했다. 오히려 민우는 소총을 쥔 손에 더욱 단단하게 힘을 주며 선장의 가슴 정중앙으로 조준점을 고정했다.

“카르텔이 얼마나 거대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분명한 건, 오늘 이 배의 규칙을 짜는 건 너희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이지. 선장, 당장 무전기 들고 우현에 접안한 배에게 화물 이송을 중단하고 선원들을 전부 갑판 위로 철수시키라고 명령해. 만약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다른 소리가 튀어나오면, 네가 자랑하던 그 무법지대의 규칙대로 첫 번째 총알을 네 가슴에 박아줄 테니까.”

민우의 서늘한 선언이 암흑이 깃든 조타실 내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선장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려 그의 거친 수염 사이로 스며들었다. 망망대해 위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던 가해자들의 제국은, 이제 자신들이 가두고 굶겼던 가장 유약한 장기말의 손에 의해 가장 치명적이고 잔혹한 종막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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