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빚이라는 이름의 감옥
지하 방에서는 시간이 흐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창문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환풍구로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눅눅한 공기와 배수관 냄새뿐이었다. 리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 화면을 켰다. 오전 6시 12분. 배터리는 43%였고, 데이터 신호는 여전히 한 칸도 잡히지 않았다. 화면에는 어머니의 번호가 마지막 발신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필리핀 공항에서 보낸 ‘엄마, 도착하면 연락할게’라는 메시지도 아직 전송 완료되지 않은 채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수니타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낮게 울렸다.
“일어나. 30분 후에 부엌으로 와야 해. 아침 준비 도와줘.”
리자는 땀에 젖은 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낯선 환경, 눅눅한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문 밖에서 멈추었던 그 무거운 발소리의 기억이 밤새 그녀를 깨어 있게 했다. 그녀는 서랍장 위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물은 미지근했고, 플라스틱 맛이 배어 있었다.
부엌에 올라가자 수니타는 이미 거대한 냄비에 쌀죽을 끓이고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 앞에서 그녀의 얼굴은 더욱 지쳐 보였고, 눈 밑의 다크서클은 어제보다 더 짙어졌다.
“오늘 아침에 마담이 계약서 줄 거야. 잘 읽어봐. 네가 필리핀에서 들은 것과 다를 거야.”
“어떻게 달라요?”
수니타는 대답 대신 냄비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어깨짓에는 2년 동안 축적된 체념이 물컹하게 묻어 있었다.
7시가 조금 지나자 마담 파티마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도 완벽하게 화장을 했고, 손가락에는 어제와 다른 금반지들이 끼워져 있었으며, 손목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가 반짝였다. 그녀의 손에는 얇은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식탁에 앉으며 봉투를 열었고, 그 안에서 4장짜리 계약서가 나왔다. 영어와 아랍어가 병기된 문서였다.
리자는 의자에 앉아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마담 파티마는 그녀의 맞은편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첫 페이지는 평범해 보였다. 월급 2,000디르함, 숙식 제공, 계약 기간 2년. 리자의 눈이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갔다. 거기에는 작은 글씨로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리クルート먼트 비용: 8,000디르함’
‘비자 발급 수수료: 3,500디르함’
‘항공료 (마닐라-두바이): 2,200디르함’
‘의료 보험 및 신원 조회: 1,800디르함’
‘에이전시 소개료: 4,500디르함’
총합 20,000디르함. 리자는 그 숫자를 바라보며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월급 2,000디르함의 정확히 10배였다. 10개월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갚을 수 있는 빚이었다. 그녀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에이전시에서는 항공료랑 비자 비용은 고용주가 부담한다고 했어요. 마리벨 씨가 분명히 그렇게…”
마담 파티마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무지한 상대를 비웃는 사람의 표정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절대적인 우위를 즐기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물론 우리가 먼저 부담했지. 네가 올 수 있도록 우리가 투자한 거야. 그 투자금을 네가 갚는 건 당연한 거 아니니?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매달 얼마나 공제되는 거죠.”
“관리비랑 식비를 제외하면… 한 달에 500디르함 정도 네 빚을 갚는 데 쓰일 거야.”
500디르함. 리자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렸다. 20,000디르함을 매달 500디르함씩 갚으면 40개월. 3년 4개월이었다. 계약 기간 2년을 훨씬 넘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관리비와 식비가 얼마나 빠져나갈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그 금액이 늘어나면, 빚을 갚는 속도는 더 느려질 것이고, 계약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계약 기간은 2년인데, 빚을 다 갚으려면 3년 넘게 걸리잖아요.”
마담 파티마의 미소가 한 겹 더 얇아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계약이 끝날 때 빚이 남아 있으면 계약이 연장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니? 그리고 네가 성실하게 일하면 우리가 보너스도 줄 수 있어. 물론, 성실함의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거지만.”
리자는 계약서의 세 번째 페이지로 넘어갔다. 거기에는 더 작은 글씨로 추가 조항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글자들은 마치 일부러 읽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처럼 빽빽했고, 행간은 거의 없었다.
‘고용인은 고용주의 사전 허가 없이 거주지를 이탈할 수 없다.’
‘고용인의 여권 및 신분증명서는 고용주가 안전하게 보관한다.’
‘고용인은 고용주 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하며, 외부인과의 연락을 삼간다.’
‘계약 위반 시 고용인은 즉시 본국으로 송환되며, 이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고용인이 부담한다.’
‘고용인은 고용주가 제공하는 숙소에 거주하며, 고용주의 허락 없이 타 숙소로 이동할 수 없다.’
리자는 그 조항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며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것은 고용 계약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소유권 증서였다. 그녀가 이 문서에 사인하는 순간, 그녀는 법적으로 이 집에 묶이게 될 것이었다. 떠날 수도, 외부와 연락할 수도, 여권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마담 파티마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그 허락은 언제든지 거부될 수 있었다.
“사인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마담 파티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대신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값을 네가 내야 하고. 2,200디르함이야. 지금 그 돈 있어? 없으면 여기서 일해서 갚아야 하고, 그동안 숙식비는 또 쌓이겠지.”
그녀는 리자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자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머니에는 80페소, 디르함으로 환산하면 15디르함도 안 되는 돈뿐이었다. 그녀는 이 낯선 나라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고, 그녀의 여권은 이미 마담 파티마의 손에 있었다.
리자는 손에 쥔 볼펜을 바라보았다. 볼펜의 플라스틱 표면에는 마담 파티마의 손에서 전해진 체온이 아직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굽은 허리와 미겔의 뜨거운 이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사인했다.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적막한 부엌에 길게 울렸다. 그녀의 이름 석 자가 계약서의 가장 밑줄에 눌러앉았다.
마담 파티마는 만족한 듯 계약서를 챙기며 일어났다. 그녀는 서류를 봉투에 넣으며 리자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현명한 선택이야. 이제 일 시작해. 오늘은 2층 화장실 청소부터. 그리고 리자, 기억해. 여기서 네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호의에서 비롯된 거야.”
계약서에 사인한 후, 리자의 일상은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루는 새벽 5시 30분, 수니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 준비를 돕고, 가족이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를 하고, 이후에는 대저택의 청소를 담당했다.
대저택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었다. 총 12개의 방과 5개의 화장실, 2개의 거실, 그리고 서재와 개인 체육관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광대한 공간을 청소하는 사람은 리자와 두 명의 스리랑카 청소부, 그리고 수니타까지 단 네 명뿐이었다. 하루 14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도 모든 공간을 완벽하게 청소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리자는 아침 8시부터 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복도를 오갔다. 대리석 바닥은 광택이 살아 있도록 무릎을 꿇고 손걸레로 닦아야 했고, 화장실의 금박 수도꼭지는 물자국 하나 남지 않도록 신문지로 마감해야 했다.
마담 파티마는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청소 상태를 점검했다. 그녀의 눈은 먼지 한 톨, 물자국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흰 장갑을 끼고 가구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새하얀 면장갑이 책장 위를 스치고, 그 끝에 회색 먼지가 묻어나오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얇게 올라갔다.
“이게 뭐야. 네가 청소를 한 거야, 안 한 거야.”
“다시 닦겠습니다.”
“당연히 다시 닦아야지.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 1층 복도도 다시 한 번 걸레질해. 무릎 꿇고.”
마담 파티마의 목소리는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차갑고 정확한 어조로 명령했다. 그 차가움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분노에는 끝이 있지만, 이 차가운 통제에는 끝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리자의 인격을 모욕하는 말을 일상적인 대화처럼 자연스럽게 내뱉었고, 리자는 그 말에 대꾸할 권리조차 없었다.
리자가 가장 두려워한 순간은 고용주의 남편인 알리 씨와 마주칠 때였다. 알리 씨는 50대 후반의 건장한 남성으로, 평소에는 서재에 틀어박혀 있거나 밖에서 비즈니스 미팅을 하느라 집에 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집에 있을 때면, 리자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담 파티마의 평가하는 시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선이었다. 더 은밀하고, 더 집요하며, 더 역겨운 무언가가 담긴 시선. 알리 씨는 리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복도에서 스쳐 지날 때면 항상 그녀의 얼굴과 가슴, 허리와 다리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치 언젠가 사용할 물건을 미리 살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그녀의 살갗에 닿을 때면, 마치 차가운 파충류의 혀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느 날 오후, 그녀가 2층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리자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직감할 수 있었다. 알리 씨였다. 그는 복도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자는 걸레를 더 꽉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리자, 맞지? 필리핀에서 왔다고 들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릿했다. 마치 음미하듯 천천히 발음하는 말투였다. 리자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구두 코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주인님.”
“필리핀 여자들은 참 부지런하다고 들었어. 특히 젊은 애들이… 성실하고 순종적이래. 계속 그렇게 열심히 일해.”
그의 입술에 맺힌 미소는 호의라기보다 소유욕에 가까웠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허리선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리자는 그 시선이 지나간 자리마다 피부가 오그라드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계약서에는 ‘고용주 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조항이 있었고, 그 조항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고용주 가족이 무슨 짓을 하든 입을 다물고 참아라’였다.
알리 씨는 그 말을 남기고 서재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리자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걸레를 양동이에 넣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위장 전체가 뒤틀리는 듯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고,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그녀는 부엌 구석에서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첫 주가 지나면서, 리자는 이 대저택의 계급 구조를 뼈저리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꼭대기에는 고용주 가족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개인 비서와 운전기사가 있었고, 가장 바닥에는 리자를 포함한 가사노동자들이 있었다.
지하 층에는 총 6개의 작은 방이 있었다. 리자의 방을 포함해 4개의 방에는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고, 나머지 2개는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보관실과 세탁실로 사용되었다. 복도 끝에는 공용 화장실이 하나 있었고, 샤워 시설은 차가운 물만 나왔다. 샤워실의 타일은 여기저기 깨져 있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녹물이 섞인 물이 간헐적으로 떨어졌다. 벽에는 오래된 곰팡이 자국이 검은 지도처럼 번져 있었고, 배수구에서는 썩은 물비린내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리자는 샤워실의 깨진 타일을 바라보며, 이곳이 대저택의 화려한 외관과 얼마나 극단적으로 동떨어진 공간인지 실감했다. 위층의 욕실은 대리석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황금빛 샤워기에서는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졌다. 향기로운 바디워시와 수입산 타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바닥은 항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들’의 공간이었다. ‘우리’의 공간은 이 깨진 타일과 녹슨 수도꼭지, 그리고 찌든 때가 벽에 낀 샤워실이 전부였다. 그 경계는 절대적이었고, 누구도 그 경계를 넘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리자는 잠들지 못하고 복도를 서성이다 수니타의 방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수니타는 침대에 앉아 낡은 편지 뭉치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손가락은 편지의 가장자리를 반복해서 문지르고 있었다.
“들어와.”
리자는 수니타의 방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방은 리자의 방과 거의 같은 크기였지만, 2년 동안 쌓아온 작은 소지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인도에서 가져온 작은 신상 하나, 찢어진 가족 사진 한 장, 그리고 낡은 달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수니타와 비슷한 얼굴을 한 노부부와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그 편지는…”
“집에서 온 거야. 두 달에 한 번꼴로 와. 마담이 먼저 읽어보고, 내용을 검열한 후에 나한테 줘.”
“가족들한테 전화는 할 수 있어요?”
수니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술이 씁쓸하게 비틀렸다.
“핸드폰은 데이터가 안 터지고, 와이파이도 없어. 유선 전화는 거실에 있지만, 마담 허락 없이는 사용 못 해. 나는 지난 2년 동안 가족 목소리를 한 번도 못 들었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편지로 받았어. 그것도 한 달이나 지나서.”
리자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아직 어머니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그 희망마저 이곳에서는 허락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수니타 씨는 왜 여길 안 떠나요. 계약이 끝나면…”
“계약은 끝나지 않아.”
수니타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더 이상 분노조차 담겨 있지 않은, 그저 사실을 전달할 뿐인 목소리였다.
“빚이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빚은 매달 관리비랑 식비를 빼면 오히려 늘어나기도 해. 나는 이제 빚이 얼만지도 몰라. 마담이 장부를 보여주지 않아. 그냥 일하고, 먹고, 자고. 그게 다야. 나는 이제 바깥세상이 어떤지도 기억이 안 나.”
“그래도 희망을…”
“희망? 희망은 여기서 가장 위험한 거야. 희망을 가지면 버티기 힘들어져.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그럭저럭 살 수 있어.”
리자는 수니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살아 있지만, 그 안에는 아무 빛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2년 전 필리핀에서 출발할 때, 수니타도 리자처럼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지금, 이 지하 방에서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리자는 수니타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니타 씨, 혹시… 이 집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지내요?”
“라힘은 더 심해. 그는 3년째인데 빚이 거의 안 줄었대.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어서 몸도 많이 상했고. 무릎이 망가졌는데도 병원에 못 가. 마담은 ‘네가 일을 못 하면 빚이 더 늘어난다’고 말해. 그를 ‘정원사’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냥 종이야. 우리 모두.”
수니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편지를 접어 베개 밑에 넣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리자는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청소용 세제에 쓸린 붉은 자국이 생겨 있었다.
리자가 대저택에 도착한 지 정확히 2주가 지난 오후, 마담 파티마가 그녀를 서재로 불렀다. 서재는 1층 안쪽에 있는 방으로, 고급 가죽 소파와 마호가니 책장, 그리고 거대한 페르시아 융단이 깔려 있었다. 마담 파티마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앞에는 리자의 계약서와 작은 노트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리자, 지난 2주 동안 네 태도를 지켜봤어. 일은 성실히 하는 것 같더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청소 상태도 완벽하지 않고, 네 태도도 아직은… 순종적이지 않아. 네 눈빛에 아직 반항 같은 게 남아 있어. 그게 보기 거슬려.”
리자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녀는 하루 14시간을 일했고, 마담 파티마의 모든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도 ‘순종적이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는 것은, 그녀의 눈빛이나 표정 속에 아직 꺾이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일 터였다. 마담 파티마는 그 미세한 저항의 불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특별히 시간을 내서 너를 좀 교육하려고 해. 네 하루 일과를 좀 더 효율적으로 조정할 거야.”
마담 파티마는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마치 리자의 반응을 즐기듯이 새로운 스케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침 기상 시간은 그대로였지만, 점심 시간은 30분에서 15분으로 잘려나갔다. 대신 그 시간에 2층 발코니 청소가 추가되었다. 저녁 식사 보조 시간은 더 길어졌고, 취침 전에는 1층 거실 바닥을 손걸레로 한 번 더 닦는 일이 덧붙여졌다.
리자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점심 시간이 15분이면… 화장실 다녀오면 식사할 시간이 거의 없는데요.”
마담 파티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다. 그녀는 노트를 덮으며 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족해? 나는 네가 필리핀에서 굶주리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하루 세 끼 먹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 가족들은 지금도 카사바 한 조각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을 텐데, 너는 여기서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불평을 하는 거니.”
그 말은 비수처럼 리자의 가슴에 꽂혔다. 마담 파티마는 리자의 가난을 알고 있었고, 그 가난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리자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떠난다 해도 돌아갈 곳이 가난뿐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서, 그 약점을 정교하게 찌르고 있었다. 리자는 대꾸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어머니의 굽은 허리와 미겔의 뜨거운 이마가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담 파티마는 서랍을 열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작은 부르고뉴색 책자를 꺼내들었다. 리자의 필리핀 여권이었다. 그녀는 여권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손가락으로 표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작은 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네 여권은 내가 잘 보관하고 있어. 금고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주 안전한 곳이야.”
마담 파티마는 여권을 손에 쥐고 잠시 리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여권 표지의 필리핀 공화국 문장을 천천히 쓸었다. 그 행위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네 자유는 내 손에 있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너는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존재할 권리조차 내게 의존하고 있다.’
“여권 없이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경찰이 널 체포할 거야. 불법 체류자로. 그러면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돼서 필리핀으로 돌아가게 되지. 물론 돌아가는 비행기 값은 네가 내야 하고. 그러니까 여권을 나한테 맡기는 게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리자는 책상 위의 여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유가, 그녀의 정체성이, 그녀의 법적 존재가 지금 마담 파티마의 손가락 아래 놓여 있었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마담 파티마는 여권을 다시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리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손은 가벼웠지만, 그 무게는 족쇄와 같았다.
“리자, 너는 운이 좋은 거야. 우리는 좋은 고용주니까. 다른 집에서는 말 안 들으면 매를 맞거나 지하실에 갇히기도 해. 여기서는 그런 일 없으니까… 그냥 순종하면 돼.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야.”
3주째 되는 날 밤, 리자는 잠들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녹슨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몸은 극도로 피곤했지만, 머리는 끝없이 깨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서랍장 위의 성모 마리아 상본을 더듬어 집어들었다. 나무 조각은 땀에 젖은 그녀의 손바닥 속에서 작고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벽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리자는 숨을 죽이고 벽에 귀를 밀착시켰다. 배수관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였다. 아래층, 아니면 옆방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가로질렀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은 차갑고 축축했다.
“언니, 나 이제 진짜 못 버티겠어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스리랑카 억양이 섞인 영어였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마치 울음을 참는 듯한 진동이 섞여 있었다.
“버텨야 해. 버티지 않으면 더 큰 벌이 올 거야. 지난달에 도망가려다 잡힌 애는 지금 지하실에 갇혀 있어. 밥도 하루 한 끼만 준대. 2주째야.”
리자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호흡은 가빠졌고, 벽에 댄 귀가 점점 차가워졌다. 지하실. 도망가려다 잡힌 사람. 그녀는 자신의 방이 있는 이 지하 층보다 더 아래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햇빛은커녕 환풍구조차 없을, 완전한 암흑의 공간일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건 죽는 것보다 못해요. 마담은 우리를 개보다 못하게 다루고, 주인님은… 주인님은 가끔 밤에 복도에서 서성거려요. 문 앞에 서서… 숨소리만 들려요. 그리고 일요일 밤마다…”
젊은 목소리가 흐느낌에 잠겨 뒷부분은 들리지 않았다. 리자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복도에서 들었던 그 발소리.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멀어지던 그 발소리. 그것은 그녀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벽에 귀가 있어. 여기서는 누구도 믿으면 안 돼. 마담이 감시하려고 우리 중에 첩자를 둔다는 소문도 있어.”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배수관은 다시 조용해졌다. 리자는 벽에서 떨어져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려 셔츠를 등판에 달라붙게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금 들은 대화가 반복해서 울리고 있었다.
도망가려다 잡혀 지하실에 갇힌 사람. 하루 한 끼만 먹으며 2주째 갇혀 있는 사람. 일요일 밤마다 복도를 서성이는 알리 씨의 발소리. 그리고 벽에 귀가 있다는 경고.
리자는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공포를 느꼈다. 이 대저택은 단순한 감금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완전한 감시 체제였다. 벽은 듣고 있었고, 동료는 서로를 의심해야 했으며, 도망가려는 사람은 지하실이라는 이름의 무덤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막연하게 느껴왔던 불안은 이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고 그녀 앞에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풍구 너머로 사막의 밤바람이 들려왔다. 바람 소리는 낯설었고, 공기는 건조했다. 리자는 땀에 젖은 손으로 성모 마리아 상본을 더 꽉 움켜잡았다. 나무 조각의 모서리가 그녀의 손바닥을 눌렀지만, 그녀는 그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문 밖에서는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무겁고, 더 느렸다. 그 발소리는 그녀의 방 앞에서 멈추었다. 리자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고, 목구멍에서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직접 들리는 듯했다.
문손잡이가 살짝 움직였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손잡이를 돌리려는 듯한 미세한 소리였다. 리자는 침대에 엎드린 채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에는 안쪽에서 잠글 수 있는 자물쇠가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문손잡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발소리는 다시 천천히 멀어졌다. 리자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성모 마리아 상본을 움켜잡고 있었고, 손톱 밑이 파고든 살점 표면이 허옇게 죽어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삐걱거리는 침대, 축축한 시트, 곰팡이 냄새, 그리고 벽 너머로 여전히 희미하게 이어지는 누군가의 숨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