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그림자 두바이편 #002] 대저택의 그림자 – 3화: 첫 번째 시험

 3화: 첫 번째 시험

리자가 대저택에 발을 들인 지 4주째 되는 날, 오후부터 집 안의 공기가 평소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담 파티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떠난다는 소식은 아침 일찍 수니타를 통해 전해졌다. 마담은 떠나기 전 부엌에 들러 수니타에게 저녁 식사 메뉴를 지시했고, 리자에게는 “오늘 하루도 네 할 일을 다 하라”는 짧은 말만 남겼다.

오후 4시가 지나자 대저택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마담의 구두 소리가 더 이상 복도에 울리지 않았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도 사라졌다. 그 정적은 리자에게 오히려 불안감을 주었다. 그녀는 걸레를 쥐고 2층 복도를 닦으며 귀를 기울였다. 평소에는 마담의 감시가 두려웠지만, 오늘은 그 부재가 더 두려웠다.

부엌으로 내려갔을 때, 수니타는 평소보다 더 빠른 손놀림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양파를 써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지만, 그 리듬에는 어딘지 모르게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냄비에서는 양고기 스튜가 끓고 있었고, 그 풍성한 향이 부엌을 가득 채웠지만, 리자는 그 냄새 속에서도 수니타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수니타 씨, 괜찮아요?”

수니타는 칼질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도마에 고정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오늘은 주인님 혼자 저녁 드실 거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되도록 주인님 눈에 띄지 말고.”

그 말의 무게를 리자가 완전히 이해한 것은 저녁 7시가 되어서였다. 알리 씨가 식당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평소의 정장 차림이 아니라 느슨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와인 한 병이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리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식탁에 앉으며 리자를 향해 손짓했다.

“리자, 오늘 저녁은 네가 서빙해라. 수니타는 부엌에 있고.”

리자는 수니타를 바라보았다. 수니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 침묵 속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체념이 담겨 있었다.

리자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가락은 와인 병을 딸 때 살짝 떨렸고, 코르크 마개가 빠지는 소리가 적막한 식당 안에 예상보다 크게 울렸다. 그녀는 알리 씨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붉은 액체가 크리스털 잔 안에서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너도 한 잔 마셔.”

“저는 근무 중이라서…”

“내가 마시라고 하면 마시는 거야.”

알리 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그는 빈 잔을 리자 쪽으로 밀며 와인을 따르게 했다. 리자는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와인의 향은 진하고 달콤했지만, 그녀의 위장 속에서는 메스꺼움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이게 좋은 와인이야. 프랑스산이지. 필리핀에서는 이런 와인 못 마셔봤을 거야.”

그는 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향을 맡았다. 그의 눈은 와인이 아니라 리자를 향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그녀의 이마에서 시작해 눈, 코, 입술, 그리고 목선을 따라 내려갔다. 마치 포식자가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여유로운 시선이었다. 리자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떫은 탄닌이 혀를 감싸고 사라졌지만, 그녀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한 그의 시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리자, 너는 필리핀에서 어떤 삶을 살았니.”

“가난했어요. 어머니랑 동생이랑 같이 살았고요.”

“가난은 힘든 거지. 여기서 열심히 일하면 가족도 도울 수 있고, 너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어. 내가 도와줄 수도 있고.”

그의 손이 식탁 위로 올라와 그녀의 손 가까이에 놓였다. 손가락이 식탁보 위를 천천히 기어오듯 다가왔다. 리자는 자신의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입술은 바싹 말라붙었고, 혀끝에는 와인의 떫은 맛만이 감돌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리자는 부엌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시작했다. 싱크대에 물을 틀자 수돗물이 접시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 속에서도 그녀는 알리 씨의 시선을 잊을 수 없었다. 식탁 위로 다가왔던 그의 손, “도와줄 수도 있어”라는 말 속에 숨겨진 기대, 그리고 그가 그녀를 바라볼 때면 방 안의 산소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듯한 압박감.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고, 마치 감각이 마비되어 접시의 온도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수니타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리자, 잠깐 이리 와봐.”

두 사람은 식료품 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공간에는 쌀 포대와 통조림 상자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고, 공기는 건조한 곡물 먼지로 뿌옇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장의 전구는 꺼져 있었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부엌 불빛만이 그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수니타는 문을 반쯤 닫고 리자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아귀는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오늘 밤, 방 문 꼭 잠그고 자. 안 잠기면 의자 같은 걸로라도 막아.”

“왜요. 무슨 일이…”

“마담이 없는 밤이 제일 위험해. 주인님은… 예전에도 그랬어.”

리자의 숨통이 조여들었다. 폐부가 오그라드는 듯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숨을 들이쉬었다. 저장실 안의 공기는 눅눅했고, 쌀 포대에서 나는 먼지가 코를 찔렀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수니타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예전에도 그랬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수니타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녀의 눈이 저장실 문 너머를 향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냉장고 모터 소리만이 침묵을 채웠다.

“나보다 먼저 여기서 일하던 필리핀 여자가 있었어. 이름은 안젤라. 24살이었고, 너처럼 착했어. 작은 체구에 웃음이 많았지. 그 애도 처음에는 주인님의 관심을 받았어. ‘네가 특별하다’, ‘도와주고 싶다’는 말을 들었대. 그리고 어느 날 밤… 마담이 없는 날이었지.”

수니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마치 말 자체가 위험한 증거라도 되는 듯이.

“그 애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수니타는 침묵했다. 그녀의 손이 리자의 팔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저장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남겼다.

“아무도 몰라. 그냥… 사라졌어.”

리자는 저장실에 혼자 남았다. 쌀 포대에 기댄 그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끝의 핏기가 완전히 가셔 가죽처럼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만이 미세하게 엇갈렸다. 안젤라. 그 이름은 이제 그녀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날 밤, 대저택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지하 층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리자는 수니타의 말대로 방 문을 확인했다. 문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손잡이는 낡은 금속으로 되어 있었고, 손바닥으로 밀어보았지만 안쪽에서 잠글 수 있는 장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방 한구석에 놓인 작은 나무 서랍장을 문 앞으로 끌어당겼다. 서랍장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고, 그녀가 온 힘을 다해 밀자 문에 겨우 닿을 정도의 위치까지 옮겨졌다. 누군가 문을 세게 밀면 금세 밀려날 장애물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문이 쉽게 열리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지하 복도의 모든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샤워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울렸고, 환풍구를 지나는 사막의 밤바람이 낮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벽 너머로는 다른 노동자들의 불규칙한 숨소리와 뒤척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밤 11시가 지났을 무렵,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리자의 몸이 즉시 경직되었다. 발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지하 복도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하나씩 밟는 무거운 소리가 벽을 타고 그녀의 방으로 전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발소리는 무거웠고, 바닥의 콘크리트가 그의 체중에 미세하게 울리는 진동까지 전해졌다.

발소리는 복도에 있는 다른 방들 앞을 지나쳐, 마침내 그녀의 방 앞에서 멈추었다. 리자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고막에는 갑자기 찾아온 적막이 오히려 이명처럼 울렸다. 핏줄 속에서 피가 흐르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손에 쥔 성모 마리아 상본을 움켜잡았고, 나무 조각의 모서리가 그녀의 손바닥을 세게 눌렀다.

문고리가 살짝 움직였다. 금속이 금속에 닿아 비벼지는 낮고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 바깥에서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려는 소리였다. 서랍장이 문에 걸려 삐걱거렸고, 그 작은 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리자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몇 초의 정적. 문고리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서랍장은 여전히 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발소리는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1층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리자는 그 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등에서는 땀이 흘러내려 얇은 셔츠를 적셨고, 그녀의 손은 여전히 성모 마리아 상본을 쥔 채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서랍장 너머의 문이 다시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의 눈을 계속해서 뜨게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마담 파티마가 대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완벽한 화장과 값비싼 디자이너 드레스 차림으로 부엌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녀의 입술은 더 얇게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커피도 마시지 않고 리자를 식탁 앞으로 불러세웠다. 그녀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재판관의 망치 소리처럼 단호했다.

“리자, 너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니.”

리자의 명치끝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순간적으로 그녀를 관통했다. 그녀는 애써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 근육은 마비된 듯 굳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정말이니.”

마담 파티마의 눈이 리자를 꿰뚫어보듯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리자의 머릿속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려는 듯 집요했다. 리자는 그 시선을 견디며 입술을 깨물었다.

“주인님께서 네가 어젯밤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고 말씀하셨어. 와인을 권했는데도 제대로 감사 인사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부엌으로 갔다고. 게다가 식사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고 하셨어.”

리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리 씨가 저녁 식사에서 있었던 모든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서 마담에게 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 그의 손길, 그리고 “도와줄 수도 있어”라는 협박은 모두 삭제되고, 그녀만이 무례한 피고용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려 했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는 순간, 그녀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몸이 안 좋았어요.”

“몸이 안 좋아도 예의는 지켜야지. 네 나라에서는 상사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대하니? 필리핀에서는 다 그렇게 가르치니? 아니면… 굶주리느라 예의를 배울 시간도 없었니?”

마담 파티마의 말은 차가운 독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리자의 가난을 알고 있었고, 그 가난을 모욕의 칼날로 갈아 그녀를 찔렀다. 리자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굴욕감으로 달아올랐고, 턱관절을 악다물어 입 안이 비릿하게 조여들었다. 그녀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싱크대 앞으로 돌아서서 물을 틀었다.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 속으로 그녀의 숨소리가 묻혔다.

“오늘 청소는 3층 다락방부터 시작해. 거기 먼지가 많이 쌓였어. 그리고 저녁에는 주인님께 직접 사과드리도록 해. 무릎 꿇고.”

마담 파티마는 그 말을 남기고 부엌을 떠났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점점 멀어졌다. 리자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은 싱크대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있었고, 그녀의 온몸은 모욕감이라는 이름의 독이 퍼져나가는 듯이 떨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리자는 마담 파티마의 명령대로 알리 씨에게 사과하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복도를 걸을 때마다 다리가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느껴졌다. 서재 문 앞에 서서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문 너머에서는 TV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알리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리자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재 안은 어두웠고, TV 화면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알리 씨는 가죽 소파에 깊숙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제와 같은 와인 잔이 들려 있었고, 탁자 위에는 이미 반쯤 비워진 와인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리자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올렸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무례했어요.”

리자는 문 가까이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다. 그녀의 손은 문손잡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이해해. 처음 와서 긴장했겠지. 이리 와서 앉아.”

“저는 서 있는 게…”

“앉으라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은 이제 어떤 거절도 용납하지 않는 강제력을 띠고 있었다. 리자는 그가 가리킨 소파의 반대쪽 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소파의 가죽은 차가웠고, 그녀의 등은 곧게 굳어 있었다.

알리 씨는 일어나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서재 안에 무겁게 울렸다. 그는 리자에게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소파가 그의 무거운 체중을 받아내며 깊게 가라앉았고, 리자의 몸은 그 경사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조금 기울어졌다. 그녀의 허벅지가 그의 무릎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리자,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너는 다르니까. 순종적이고, 조용하고… 그리고 꽤 예쁘기도 해.”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올려졌다. 손바닥은 뜨겁고, 땀이 배어 끈적거렸다. 그 무게와 열기가 얇은 셔츠 너머로 그녀의 피부에 전해졌다. 리자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의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늑골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 박동은 너무 강렬해서 그녀의 귀에까지 울렸다.

“주인님, 저는 그냥 일하러 왔을 뿐이에요.”

“물론이지. 일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런데 내가 조금만 더 도와주면 네 빚도 더 빨리 줄어들지 않겠어? 네 가족한테 더 많은 돈을 보낼 수 있고. 네 동생 병원비도 해결할 수 있고.”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졌다. 손가락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치며 천천히, 집요하게 움직였다. 천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손가락 마디의 감촉에 리자의 위장이 뒤집혔다. 그녀는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소파 등받이가 그녀의 도피를 막았다.

“이러지 마세요.”

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작고 약하게 흩어졌다.

“왜, 싫어? 나는 네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더러운 지하 방에서 사는 것보다, 위층에 있는 좋은 방을 쓰는 게 낫지 않겠어? 창문도 있고, 에어컨도 나오는 방.”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의 입김에서 와인의 단내와 양고기의 기름진 냄새가 뒤섞여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리자는 얼굴을 돌렸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억세게 돌려 다시 그를 향하게 했다. 그의 엄지와 검지가 그녀의 턱뼈를 압박하며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턱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압통이 그녀의 두개골 아래로 번져갔다.

“거절하는 거니.”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부드러움이 없었다. 그 안에는 오직 노골적인 위협만이 숨 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리자는 자신의 턱을 쥔 그의 손아귀에서 풍겨오는 폭력의 예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대답해. 거절하는 거야, 아니야.”

리자의 눈앞에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떠올랐다. 미겔의 뜨거운 이마가 떠올랐다. 수니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던 ‘안젤라’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지하실에 갇혀 하루 한 끼만 먹는다던 그 익명의 희생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방 문 앞에서 멈추었던 발소리가 떠올랐다.

알리 씨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얼굴이 한 뼘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이제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하고, 두려움에 질린, 그러나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은 어떤 여자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 당신의 선택은? (1차 분기점)

그녀는 지금 필리핀에 있는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떠올리며, 한 번의 거절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공포에 짓눌려 있습니다. 이 순간 그녀가 내리는 선택이 그녀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 선택 1: 리자는 알리 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굴복한다. 가족의 안전과 당장의 생존 앞에, 그녀는 침묵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 선택 2: 리자는 남은 힘을 쥐어짜 알리 씨를 밀쳐내고 서재를 뛰쳐나간다. 그녀는 더 이상 침묵만으로 견디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 대저택이라는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관찰과 저항을 시작한다.

(※ 선택하신 분기점의 다음 화를 결제하시면, 리자의 잔혹한 운명의 최종장 엔딩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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