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순백의 새장
대리석은 차갑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결코 따뜻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채원은 스무 살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새벽빛 은총회의 본당은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닥은 닦고 닦여 거울처럼 반사되었고, 천장까지 이어진 기둥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천사들의 형상이 부감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천사들은 모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채원은 그 미소가 한 번도 따뜻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석고 눈동자는 언제나 무언가를 심판하는 듯했다. 그 눈동자들은 어디를 봐도 따라오는 듯했다. 채원이 고개를 숙여도, 그녀의 정수리 위로 천사들의 시선이 꿰뚫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들여다보이고 있다는 느낌. 그 시선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천사들의 날개는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 날개는 감싸 안음이 아닌 가둬 두는 형상에 가까웠다. 채원은 어릴 적부터 그 천사들 아래를 걸을 때마다 목덜미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조차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말했다. “마음이 더럽거나 두려우면 천사들의 눈빛이 차갑게 느껴지는 거란다. 네 영혼이 맑으면 그들은 축복의 미소를 보내줘.”
그래서 채원은 매일 아침 본당에 들어서기 전,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맑다. 나는 깨끗하다. 나는 선택받았다. 그렇게 되뇌지 않으면, 그녀의 발걸음은 대리석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늘도 그랬다.
채원은 하얀 드레스 위에 정갈하게 다려진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음대 장학생으로서의 공식 석상에는 항상 이 복장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은 땋아서 한쪽 어깨 위로 내렸고, 목에는 엄마가 건네준 작은 십자가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십자가는 은으로 만들어졌지만, 닿는 피부는 항상 미지근했다. 그 온기가 평온함을 주는지, 불안을 가중시키는지 채원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 카피 모델로, 재단에서 특별히 지원해 준 물건이었다. 나무의 결이 고운 적갈색 표면은 조명 아래서 온기를 머금은 듯했지만, 현을 누르는 채원의 손끝은 시렸다. 그 시림은 오늘따라 유독 깊었다. 마치 손가락 하나하나가 얼음물에 잠긴 듯한 감각이었다.
본당 중앙에 마련된 임시 무대. 오늘은 재단의 정기 후원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수백 명의 후원자들과 인사들이 검은 정장과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채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 재단이 단순한 문화예술 후원 단체인 줄 알았고, 소수만이 이 하얀 대리석 성전 안에 감춰진 진실을 알고 있었다. 객석의 조명은 은은했고, 사람들의 얼굴은 반쯤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채원은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들의 입가에는 예의상의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어떤 이들은 무대 위의 그녀를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전시된 오브제처럼 바라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나이와 외모를 평가하듯 시선을 위아래로 굴렸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녀의 바이올린 너머로, 본당 정면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채원은 그 초상화를 피할 수 없었다. 무대 위에 서면,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하게 되고, 정면에는 항상 백현오가 있었다.
교주 백현오. 백발이 성기게 섞인 회색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중년의 남자. 가느다란 금속 안경 너머로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눈빛이 초상화 속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채원은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미소는 위로를 주는 미소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쥐고 흔든다는 듯한 미소였다. 초상화 속 백현오의 손은 성경을 쥐고 있었지만, 그 성경은 닫혀 있었다. 채원은 그 닫힌 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네가 알아야 할 것만 알려주겠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그 초상화 아래에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연주하고, 잠들었다. 그 초상화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증인이었다. 하지만 증인은 결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채원은 그 시선이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그 초상화 앞에 설 때마다, 그녀의 어깨는 한 층 더 움츠러들었다. 숨이 얕아졌다. 심장이 빨라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연주해야 했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채원은 활을 올렸다.
첫 음이 울려 퍼졌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그녀가 가장 자신 있게 연주하는 곡 중 하나였다. 활이 줄을 스칠 때마다 맑고 고운 음색이 대리석 천장을 타고 올라갔다. 그 음은 기둥에 부딪히고 천사들의 날개 사이를 통과하며 본당 전체를 채웠다. 객석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고, 박수 소리가 이따금 흘러나왔다. 그러나 채원은 그 박수를 듣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오직 자신의 바이올린 소리와,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한 백현오의 침묵이 가득했다. 그녀가 활을 당길 때마다, 그녀의 손목이 떨릴 때마다, 초상화 속 백현오의 눈빛이 그 움직임을 하나하나 추적하는 것만 같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채원은 알고 있었다. 이 연주는 예술이 아니다. 이것은 제물이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은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의식의 일부였다. 그녀가 음을 틀리지 않고, 아름답게,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곧 그녀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가문의 가치를. 엄마의 가치를. 그녀가 무대 위에서 한 음 한 음을 쏟아낼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조금씩 깎여 나가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으로 외웠던 주문을 다시 읊조리며.
“마스터의 은총이 나를 정화한다. 나는 두렵지 않다.”
연주가 끝났다. 마지막 음이 대리석 벽에 부딪혀 잔향으로 사라질 때,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채원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본당 정면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가 다시 들어왔다. 초상화 속 백현오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 미소가 말하는 것 같았다. 잘했어. 하지만 그 ‘잘했어’는 칭찬이 아니라, 평가였다. 그리고 그 평가는 그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채원은 활을 내리고, 바이올린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끝은 시렸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무대 뒤로 내려가자, 조유정이 재빨리 다가왔다.
“채원아, 정말 아름다웠어. 엄마는 네가 연주할 때마다 하늘이 열리는 기분이란다.”
유정은 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고, 목소리는 애틋했다. 채원은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아직 떨리고 있었다. 유정이 그 떨림을 느꼈는지, 그녀는 딸을 더욱 꼭 안았다.
“엄마, 너무 칭찬하시는 거 아니에요?”
“칭찬이 아니야. 사실이지. 너는 마스터가 직접 선택한 그릇이니까 당연한 거야.”
그 말에 채원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유정은 눈치채지 못했다. 혹은 눈치채지 않으려 했다. 유정은 딸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 눈물은 자랑스러움과 감동,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채원은 그 눈빛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엄마가 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아왔다. 그 눈빛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오히려 밑을 알 수 없는 어둠과도 같았다.
“엄마, 그런데 마스터님…… 오늘 제 연주 보셨을까요?”
“물론이지. 마스터는 항상 너를 지켜보고 계셔. 너는 모르지만, 마스터는 네가 연주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셨어. 그분이 인정하신다는 뜻이야.”
유정의 말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채원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스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표현이 두려웠다. 지켜본다는 것은, 언제든지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언제든지 꺼낼 수 있다는 것이니까.
“자, 이제 옷을 갈아입자. 오늘은 중요한 날이란다.”
“중요한 날이요?”
채원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유정은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지만, 채원은 그 온기가 자신의 떨림을 감추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마스터가 너를 부르셨어. ‘은총의 천사들’로 선발됐단다. 너는 이제 마스터의 직속 수행원이 되는 거야.”
채원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은총의 천사들’. 그 단어는 교단 내부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 중 하나였다. 마스터의 곁에서 직접 수행하며, 그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에서 받을 수 있는 선택받은 자들. 그러나 채원은 그 ‘선택받은 자들’의 대부분이 다시는 교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소문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영적 완성’을 이루었다며 더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채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 중 한 명이 탈의실 구석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너무나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했지만, 그 여성의 눈에는 무언가 꺼져 있었다.
“엄마, 저……”
“기쁘지 않니? 네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엄마는 네가 이 날을 위해 준비해 왔어.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네가 걸음마를 뗄 때부터. 네가 바이올린을 처음 쥐었을 때부터. 이 모든 것이 마스터를 위한 준비였단다.”
유정은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열정적으로 변했다.
“채원아, 너는 모를 거야. 엄마가 얼마나 많은 밤을 울었는지. 네가 태어나기 전, 엄마의 가문은 완전히 무너졌어.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대학을 중퇴해야 했어. 그때 엄마는 아무것도 없었어. 믿을 것도, 기댈 것도. 그런데 마스터가 나타나셨어. 그분은 엄마에게 말했지. ‘네 가문의 저주는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니, 오직 순결한 제물을 바쳐야 끊을 수 있다’고.”
유정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광신자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마스터는 네가 바로 그 제물이라고 하셨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네가 선택받았다는 걸 알려주셨지.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감사했어. 네가 이 가문을 구원할 거라고. 네가 엄마의 죄까지 씻어줄 거라고.”
채원은 숨을 삼켰다. 그 말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된 것이었다. 차이가 있었다. 전자는 능동적인 것이고, 후자는 수동적인 것이었다.
“엄마, 제가…… 정말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건가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당연한 거지. 너는 마스터의 은총을 받은 거야.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 수많은 사람들이 저 초상화 아래서 기도하지만, 마스터가 직접 부르시는 사람은 극소수야. 너는 그중 하나란 말이야.”
유정은 딸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엄마는 네가 마스터의 곁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네가 그분의 은총을 받아 완전히 정화되는 그 순간을. 그때가 되면 우리 가문은 다시 일어설 거야. 할아버지의 명예도, 할머니의 영혼도, 모두 구원받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탁할게. 두려워하지 마.”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채원은 그 차이를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네, 엄마.”
유정은 환하게 웃으며 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은 뜨거웠다.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좋아. 그럼 저녁에 다시 보자. 마스터의 은총이 너와 함께하길.”
유정은 홀연히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뒷모습은 경쾌했고, 어깨에는 기쁨이 실려 있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하나 덜어낸 사람처럼. 채원은 혼자 남겨진 탈의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은 창백했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천천히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스쳤다. 그 표정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씌워놓은 가면 같았다. 그녀는 그 가면을 벗을 수 있을까? 아니, 벗어서는 안 되었다. 벗으면 엄마가 무너지니까.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다. 채원은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되뇌었다. 나는 선택받았다. 나는 두렵지 않다.
그날 저녁, 채원은 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엄마가 직접 골라준 옷이었다. 드레스는 그녀의 몸을 감싸며 흘러내렸고, 목선은 깊게 파여 있었다. 얇은 천이 살갗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평소에는 입지 않던 스타일이었다. 채원은 그 드레스가 부끄러웠지만, 엄마가 “마스터 앞에서는 가장 고운 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기에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천천히 드레스의 자락을 정리했다. 얇은 천 아래로 그녀의 어깨와 쇄골이 드러났다. 그 모습이 너무나 나약해 보였다. 마치 제물로 바쳐질 양처럼.
산정 처소로 향하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대리석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교주의 개인 공간이 나오는 구조였다. 평소에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기에, 채원은 이 길을 걸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길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올라야 할 계단이라는 것도.
계단 양쪽에는 초가 켜져 있었다. 낡은 놋쇠 촛대 위에 꽂힌 흰 초들은 타들어 가며 어둑한 불빛을 뿜어냈다. 그 불빛은 계단의 대리석 표면에 반사되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림자는 벽을 타고 길게 늘어져,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뒤쫓는 듯했다. 채원은 한 계단 한 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그녀의 맨발이 대리석에 닿을 때마다 차가움이 전해져 왔다. 그 차가움은 점점 더 깊어졌다. 계단을 오를수록 공기는 더 차가워지고, 더 정적이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툭, 툭, 툭. 마치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양쪽 벽에는 성화들이 걸려 있었다. 성모 마리아, 사도들, 천사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그들은 채원을 바라보았지만,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채원은 그 시선들이 무거웠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드레스의 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스치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너무도 작아서, 그녀 자신에게만 들리는 듯했다.
계단을 오를수록 촛불은 더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환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점점 작아지며, 그녀의 주변을 어둠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어둠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채원은 자신의 숨소리만이 유일한 생명의 증거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멈추고 싶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엄마의 기대가, 할아버지의 명예가, 가문의 저주가 깔려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짓밟고 올라가야 했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거대한 나무 문이 나타났다. 문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태양의 중심에는 눈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은총의 눈’이라고 불리는 상징이었다. 그 눈은 채원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채원은 그 눈이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서 등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손이 떨렸다. 그녀는 드레스의 자락을 꼭 쥐고,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속에는 무언가 단단한 것이 숨어 있었다. 마치 비단으로 감싼 칼날처럼.
채원이 문을 밀자, 넓은 방이 펼쳐졌다. 방은 은은한 촛불로 가득 차 있었고, 중앙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백현오가 앉아 있었다. 그는 고급스러운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회색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넘겼고, 금속 안경 너머의 눈은 온화했다. 그의 미소는 마치 아버지와도 같았다. 그러나 채원은 그 미소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미소는 계산된 것이었다. 그가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익힌, 가장 완벽한 가면이었다.
“채원, 오랜만이구나. 와서 앉아라.”
채원은 떨리는 다리로 걸어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마스터를 직접 쳐다봐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네 어머니가 많은 말을 했겠지. 너는 드디어 그릇을 갖추게 되었다고.”
백현오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그는 술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거야. 이 의식은 단순한 통과 의례가 아니란다. 너는 가문의 더러운 피를 닦아내는 성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는 거야.”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채원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마스터님,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백현오는 조용히 웃었다.
“착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거야. 왜냐하면 네가 지금부터 겪을 일은, 네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정화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이 채원의 어깨에 살짝 얹혔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모든 것을 인도하겠다.”
그 손길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온도였다. 채원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엄마, 이게 맞는 거죠?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촛불이 흔들렸다. 방 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백현오의 얼굴에 어두운 음영을 드리웠다. 그의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미소 아래에서, 채원은 천천히 자신의 영혼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