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반격의 실마리
플로렌스의 체어시 아파트에서 일주일이 지났다.
클로에는 그곳의 고급스러운 환경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숫자와 영상, 그리고 알렉스의 협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빚은 이미 45만 파운드에 육박하고 있었다. 매일 2,000파운드 넘게 불어나는 이자는 그녀의 잠을 앗아갔다.
플로렌스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돌보았다. 아침마다 직접 커피를 타주고, 점심은 그녀가 좋아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배달을 시켰다. 하지만 클로에는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의무적으로 입에 넣고 씹고 삼켰다.
“클로에, 오늘 엘리너 변호사 만나는 날이야. 준비됐어?”
플로렌스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이었다. 엘리너가 알렉스의 신원을 추적한 결과를 알려주기로 한 날.
클로에는 플로렌스가 빌려준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그녀의 옷들은 대부분 알렉스의 돈으로 산 것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그 옷들을 입고 싶지 않았다.
엘리너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녀는 평소보다 더 진지한 표정이었다.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서류와 사진들이 펼쳐져 있었다.
“클로에 씨, 앉으세요. 말씀드릴 것이 많습니다.”
엘리너는 서류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알렉스 레인이라는 이름은 가짜입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알렉산더 보리소프입니다. 34세, 러시아 태생으로, 10대 때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클로에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만난 완벽한 영국 신사는 사실 러시아인이었다.
“그는 금융 사기, 마약 밀수, 성착취 등 여러 범죄로 인터폴에 수배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정체를 파악한 경찰은 없었어요. 그가 사용하는 가짜 신분만 7개에 달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네, 당신은 위험한 인물과 얽힌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기회이기도 해요. 당신의 증언으로 그를 잡을 수 있다면, 당신은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클로에의 귀에 낯설게 들렸다. 그녀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른 피해자들은 찾으셨어요?”
엘리너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운영하는 VIP 클럽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런던 외곽의 한 저택입니다. 불법 촬영물 유통, 성매매 알선 등 여러 혐의를 적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증명하죠?”
“당신이 직접 잠입 수사를 해야 합니다.”
클로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가요?”
엘리너의 제안은 이러했다.
클로에가 알렉스의 VIP 파티에 다시 참석하되, 이번에는 피해자가 아닌 ‘정보 수집자’로서. 그녀는 작은 녹음 장치와 버튼형 카메라를 몰래 휴대하고, 현장의 증거를 수집해야 했다.
“제가 다시 그곳에 가라고요? 당신은 제가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세요?”
“압니다. 그래서 더욱 당신이 해야 합니다. 당신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요. 경찰은 잠입 수사를 하려면 몇 달이 걸립니다. 그 사이에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 수 있어요.”
클로에는 손을 떨었다. 그녀는 그 저택의 붉은 융단, 2층의 어두운 복도, 그리고 마틴의 손길을 떠올렸다.
“만약 제가 들통나면요? 알렉스가 저를 죽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당신을 보호할 겁니다. 저는 경찰과 협력 중입니다. 당신이 위험에 처하면 즉시 출동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요.”
플로렌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클로에, 하지 않아도 돼. 다른 방법을 찾자.”
하지만 클로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할게. 만약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그녀는 엘리너를 바라보았다.
“도와주세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첫째, 제 신분은 철저히 보호해주세요. 둘째, 다른 피해자들도 처벌하지 말아주세요. 그들도 피해자예요.”
엘리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합니다.”
그날부터 클로에는 다시 알렉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반항을 포기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알렉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알렉스, 미안해. 내가 너무 무모했어. 아직 기회가 있다면, 그 파티에 가고 싶어.”
알렉스의 답변은 빠르게 돌아왔다.
“현명한 선택이야. 내일 저녁, 준비해. 차를 보낼게.”
클로에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기가 있었다.
다음 날 저녁, 클로에는 알렉스의 차를 탔다. 그녀의 속옷 안에는 엘리너가 준비한 초소형 카메라와 녹음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자신이 놀랐다.
저택에 도착하자 알렉스는 그녀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클로에. 역시 너는 똑똑한 아이야.”
“빚 좀 깎아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오늘 잘하면 빚의 10%를 탕감해줄게.”
로비에 들어서자, 그녀는 낯익은 여성들을 보았다. 소피아도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클로에의 얼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 또 왔어? 도망쳤다면서?”
“도망칠 곳이 없더라.”
클로에는 소피아에게 다가가 작은 속삭임을 했다.
“나, 녹음하고 있어. 증거를 모으는 중이야. 너도 도와줄 수 있어?”
소피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작게 대답했다.
“위험해. 들키면 넌 2층에서 영원히 못 나와.”
“이미 2층은 경험했어.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소피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조심해.”
파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VIP 손님들이 참석했다. 클로에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그녀의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을 조용히 촬영하고 있었다.
마틴이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클로에, 보고 싶었어.”
“저도요, 마틴 씨.”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그의 팔짱을 끼었다. 그의 팔 안에는 그녀가 몰래 붙인 작은 녹음기가 있었다.
“오늘 2층에서 좀 더 재미있는 거 할까?”
“무슨 재미있는 건데요?”
“내가 새로 가져온 약이 있어. 같이 해보지 않을래?”
클로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약. 그녀는 알렉스의 VIP 파티가 단순한 성착취를 넘어 마약까지 연루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어떤 약인데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거야. 너도 요즘 힘들었잖아.”
그녀는 “좋아요”라고 말하고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카메라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2층 207호. 마틴은 테이블 위에 작은 봉지를 펼쳐놓았다.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콜롬비아 직수입이야. 품질 죽여줘.”
그는 코카인을 코로 흡입했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너도 해봐. 처음엔 조금만.”
클로에는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하면 마틴이 의심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오늘 와인을 좀 마셔서… 다음에 할게요.”
“에이, 재미없게.”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클로에는 놀랐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틴 씨, 저 알렉스 불러야 해요?”
“알렉스? 그 자식은 내 발 아래 개나 다름없어. 네가 무서우면 내가 전화하지.”
그는 휴대폰을 꺼내 알렉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클로에는 그 통화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알렉스, 네 여자 말 잘 안 들어. 좀 교육시켜줘.”
“마틴 경, 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봅니다. 제가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2분 후, 알렉스가 방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마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틴 경.”
“네가 알아서 해. 나는 다른 여자 볼게.”
마틴이 방을 나가자, 알렉스는 클로에에게 돌아섰다. 그의 눈빛이 차가웠다.
“네가 뭔 짓을 한 거야?”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싫다고 했을 뿐.”
“여기서 ‘싫다’는 말은 통하지 않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그녀는 알렉스가 처음으로 화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녹음했다.
“알렉스, 당신은 나에게 6개월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피아는 1년째예요. 당신은 거짓말쟁이예요.”
알렉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가 소피아랑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충분히 들었어요. 당신의 사업 구조, 빚의 덫, 그리고 2층의 진실.”
알렉스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의 손아귀가 거셌다.
“클로에, 네가 누구랑 싸우는 줄 알아? 네가 가진 건 지성뿐이야. 하지만 여기서는 지성이 통하지 않아. 내가 가진 것은 돈과 권력이야. 네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저는 당신을 이기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살아남으려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들 사이로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로비에 도착하자, 그녀는 소피아에게 작은 신호를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가 끝난 후, 클로에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옷 속에서 카메라와 녹음기를 꺼내 엘리너에게 전달했다.
“충분할까요?”
엘리너는 녹음된 내용을 들으며 표정이 굳어졌다.
“마약 혐의가 추가되었습니다. 손님 중에는 상당히 높은 인사들도 있는 것 같고요. 이건 단순한 성착취가 아니라, 국가적 스캔들로 번질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합니다. 특히 알렉스가 직접 범죄를 지시하는 장면이요. 다음 파티에서 그가 운영하는 방식, 돈의 흐름, 그리고 피해자 관리 시스템을 더 자세히 녹음해야 합니다.”
클로에는 다시 한 번 그 지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주일 후, 클로에는 다시 저택에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더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갈 방법을 찾았다.
파티가 한창일 때, 그녀는 로비를 빠져나와 알렉스의 1층 사무실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컴퓨터와 서류들이 있었다. 그녀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개의 USB와 함께, 여성들의 신분증 사본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중 자신의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서류들을 사진 찍기 시작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클로에는 숨을 죽이고 책상 아래로 숨었다.
알렉스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무언가를 확인했다. 클로에는 그의 모든 동작을 녹음했다.
“마틴 경, 다음 주에 새로운 물건 들어옵니다. UCL 출신, 20살, 깨끗합니다. 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전화 통화 내용은 클로에의 녹음기에 고스란히 담겼다.
알렉스가 사무실을 나간 후, 클로에는 빠르게 나와 로비로 돌아갔다. 그녀는 소피아에게 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어.”
“잘했어. 이제 빨리 나가.”
하지만 그 순간, 알렉스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클로에, 잠깐 얘기 좀 하자.”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에요?”
“네가 내 사무실에 들어갔지? 내가 CCTV로 다 봤어.”
클로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가 누구 편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이제 선택해. 내가 제안하는 조건을 받아들일래, 아니면 내가 직접 경찰에 신고할래? 물론 증거와 함께.”
“무슨 증거요?”
“네가 내 사무실에 몰래 들어간 장면. 그건 불법 침입이야. 네가 수집한 증거는 법정에서 무효가 될 거야.”
클로에는 절망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걸었지만, 알렉스는 항상 한 발 앞서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그동안의 모든 빚을 탕감해줄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무슨 조건?”
“소피아를 대신해서 2층 책임자를 맡아. 그녀는 곧 나갈 거야. 네가 그 자리를 채워.”
클로에는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소피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클로에에게 말없이 입을 움직였다.
“하지 마.”
하지만 클로에는 선택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