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아니아의 메아리: 피지편 #001] 플라스틱 사슬 – 5-2화: 길들여진 자

5-2화: 길들여진 자

아카시가 사라진 지 두 달이 지났다. 샬리니는 그 두 달 동안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디네시의 부하들도, 새로운 수금원도, 마사지숍의 다른 여자들도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수바의 습한 공기 속으로 증발해 버린 듯했다.

그러나 샬리니는 알고 있었다. 그가 항구의 어둑한 부두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샬리니는… 그녀는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 말은 밤마다 그녀의 귀에 맴돌았다.

그녀의 삶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리듬에 맞춰져 있었다. 아침에는 USP 캠퍼스로 향했다. 경영학 원론 대신 그녀가 듣는 과목은 ‘조직 행동론’과 ‘국제 무역 실무’로 바뀌어 있었다. 졸업까지는 이제 1년 남짓. 그녀는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필기를 했다. 그녀의 노트북 화면에는 더 이상 가상의 무역 서류가 아니라 실제 기업들의 재무제표가 띄워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 학업을 따라가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성적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디네시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격주 목요일, 그녀의 Westpac 카드는 여전히 새로운 수금원의 손에 들려 ATM 기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손에 남는 돈은 20달러도, 35달러도 아닌 80달러였다. 디네시가 약속한 이자율 인하가 적용된 결과였다. 80달러면 식빵 두 봉지와 계란 한 판, 우유 한 통을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녀는 그 남은 돈으로 교재를 샀고, 가끔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마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여유는 그녀에게 안도가 아니라 불안을 가져왔다. 그녀는 디네시의 호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호의에 어떤 대가가 숨어 있는지 모른 채, 그녀는 그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Westpac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부러진 귀퉁이의 날카로운 단면을 엄지손톱으로 누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카드의 플라스틱은 더욱 변색되어 이제 원래의 파란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끝날 무렵, 샬리니는 USP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그녀는 검은색 학위복을 입고, 졸업생 대열에 서서 총장의 연설을 들었다. 고향의 부모님은 오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졸업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 자리가 자랑스러운 자리인지, 부끄러운 자리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졸업장을 받아 드는 순간, 그녀는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을 느꼈다. 4년의 시간이 이 한 장의 종이에 집약되어 있었다. 사탕수수 밭을 떠나 수도로 향하던 날의 설렘, 디네시의 사무실에서 처음 서류에 서명하던 순간의 불안, 아카시가 건넨 10달러짜리 지폐의 감촉, 그리고 항구의 낡은 방에서 천장의 물방울을 세며 보낸 수많은 밤들. 모든 것이 이 한 장의 종이를 위해 바쳐진 시간이었다.

그녀는 졸업장을 가방에 넣고,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뒤에서는 동기들이 가족들과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 웃음소리를 등지고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었다. 정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USP의 시계탑이 오후의 태양 아래 서 있었다. 그녀는 그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졸업 후, 샬리니는 수바 시내의 한 중견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그녀의 전공과 성적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고, 면접에서 보여준 그녀의 침착함과 실무 지식은 면접관들을 만족시켰다. 그녀는 수출입 서류를 관리하는 무역 사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수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7층 건물에 있었다. 그녀의 책상은 창가에 있었고, 창밖으로는 컨테이너선들이 정박한 부두가 보였다. 그녀는 매일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해 커피를 타고, 컴퓨터를 켜고, 선하증권과 송장을 검토했다. 동료들은 그녀를 조용하고 성실한 신입 사원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요일만 되면, 그녀는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와 시내의 Westpac ATM 부스 앞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디네시의 새로운 수금원이 그녀의 Westpac 카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급여가 입금된 계좌의 카드를 그에게 건네고, 그가 기계에서 지폐를 인출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 그녀가 갚아야 할 금액은 매달 월급의 약 40% 정도였다. 처음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조건이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녀의 삶에 단단히 매여 있는 사슬이었다.

저녁이면 그녀는 항구 근처의 마사지숍으로 향했다. 이제는 매일 밤이 아니라, 주말에만 일했다. 디네시가 약속한 대로였다. 그곳은 변하지 않았다. 에어컨 실외기의 굉음이 여전히 벽을 타고 진동해 왔고, 눅눅한 콘크리트 벽에서는 여전히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이제 이 방을 자신의 연장된 신체처럼 느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도, 혐오감도 없었다. 그저 그곳은 그녀가 있어야 할 장소일 뿐이었다.

어떤 토요일 밤, 그녀는 탁자 위에 Westpac 카드와 직장 출입증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두 장의 플라스틱 카드. 하나는 그녀의 새로운 정체성을 증명하는 카드였고, 다른 하나는 그 정체성을 여전히 저당 잡고 있는 카드였다. 그녀는 두 카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Westpac 카드를 집어 들고 손가락으로 부러진 단면을 따라 쓸었다. 그녀가 이 카드를 부러뜨렸던 날 밤, 그녀는 아카시와 함께 도망치려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이 카드를 쥐고 있었다. 부러졌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끊어지지 않은 사슬처럼.

어느 날 오후, 샬리니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디네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사무실 구석으로 걸어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 퇴근 후에 사무실로 와요. 이야기할 게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그녀에게는 가장 위험한 신호였다.

저녁 7시, 그녀는 디네시의 사무실로 향했다. 건물 1층의 선박 부품 가게는 여전히 영업 중이었고, 3층 계단 벽에는 여전히 가짜 금융 인가증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더 이상 새롭게 느끼지 않았다. 이것들은 이제 그녀의 일상이 된 풍경이었다.

디네시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익숙한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서류를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샬리니, 당신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에요. 졸업도 하고, 좋은 직장에도 취직하고. 나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당신의 빚이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요? 원금 3,000달러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1,800달러까지 줄었어요. 당신이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갚아온 덕분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마지막 제안을 하려고 해요.”

그는 서류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당신이 여기 서명하면, 이자율을 12%에서 8%로 낮춰줄게요. 대신 당신은 내 무역 회사의 서류 정리를 도와주는 거예요. 당신의 전공을 살려서 말이에요. 물론, 합법적인 일이에요. 내 회사는 실제로 존재하고, 실제로 수출입을 하고 있으니까. 당신은 그냥… 회계 장부를 조금 다듬어주기만 하면 돼요.”

샬리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고용 계약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디네시의 모든 계약서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함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거절하면요?”

“거절해도 괜찮아요. 당신은 지금처럼 계속 갚아나가면 돼요. 하지만… 당신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1년 안에 빚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을 거예요.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샬리니.”

자유. 그 단어가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Westpac 카드를 손에 쥔 채, 디네시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했다. 그녀는 그 눈빛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진실을 찾으려 애썼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명했다.

다음 날 아침, 샬리니는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Westpac ATM 부스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그녀는 기계에 카드를 넣고 잔액을 조회했다. 화면에 표시된 숫자는 여전히 적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줄어들지는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영수증을 뽑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카드를 기계에서 빼내 지갑에 넣었다. 지갑 안에는 그녀의 직장 출입증과, USP 졸업증 사본과, 그리고 고향에서 온 마지막 편지가 접혀 있었다. 그 편지 이후로, 그녀는 아버지께 어떤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아버지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갑을 닫고, 수바의 아침 거리를 걸었다. 항구에서는 화물선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고, 시내의 카페에서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함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두 얼굴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세련된 오피스 우먼으로, 무역 서류를 검토하고 이메일에 답장하는 사람. 밤에는 항구의 낡은 방에서, 여전히 디네시의 사슬에 묶인 채무자로 살아가는 사람. 그녀의 Westpac 카드는 여전히 그녀의 지갑 속에 있었고, 그녀의 학생증은 여전히 가방 속에 있었으며, 그녀의 졸업장은 책상 서랍 속에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껴안고, 수바의 습한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도 목요일이었다. 저녁이면 그녀는 다시 Westpac ATM 부스 앞에 서서, 자신의 카드가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계가 카드를 뱉어내면, 그녀는 다시 그 카드를 지갑에 넣고, 내일을 향해 걸어갈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다. 길들여진 자의 삶. 시스템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납작한 일상의 영속이었다. 그러나 그 납작한 일상 속에서도, 그녀의 지갑 속 부러진 Westpac 카드는 여전히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모서리가 언젠가 다시 그녀의 손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녀는 오늘도 떨쳐내지 못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