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붉은 먼지 속의 신기루
한연우의 세계는 오직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매달 지불해야 하는 시드니 시내 중심가의 미친 듯한 방세, 숨만 쉬어도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물가, 그리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 채워야 하는 학비의 잔고. 24세의 유학생 연우에게 호주는 낭만의 휴양지가 아닌, 매일같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서바이벌의 현장이었다. 시드니 센트럴 역 근처의 어두컴컴한 식당 주방에서 매일 열 시간씩 설거지를 하고, 밤에는 카페 청소를 해도 통장의 잔고는 늘 바닥을 기었다. 손끝이 락스 물에 불어 터져 진물이 흐르던 어느 날 밤, 연우는 워킹홀리데이 커뮤니티에서 운명을 바꿀 글을 발견했다.
[호주 내륙 대농장 워커 급구 – 주 2,000달러 보장, 숙식 무료 제공, 세컨드 및 서드 비자 일주일 내 승인 확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안전하게 일하실 성실한 한국인 학생 환영합니다.]
주 2,000달러. 시드니 시내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만져볼 수 없는 거금이었다. 숙식까지 무료라면 석 달만 버텨도 다음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자 연장까지 확실하다는 감언이설은 연우의 흐려진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연우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글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믿음직스럽고 다정했다. 자신을 농장의 총관리자 ‘마크’라고 소개한 남자는 연우의 절박한 처지를 단박에 간파했다.
“연우 양, 여기는 법이 보장하는 정식 등록 농장이에요. 돈 때문에 고생하는 한국 학생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아파. 우리 농장에 오면 그런 걱정은 한 번에 끝낼 수 있으니 당장 짐을 싸서 오세요. 시드니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 우리가 마중을 나가니까.”
그 다정한 친절이 연우의 목덜미를 낚아채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올가미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연우는 다음 날 새벽 곧바로 낡은 캐리어 하나만을 챙긴 채 시드니를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고층 빌딩들이 사라지고, 푸른 초원이 지나가며, 마침내 지평선 끝까지 메마른 붉은 대지가 나타날 때까지 연우는 가슴속에 품은 가짜 희망만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기차는 시드니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더 깊은 내륙으로 향했다. 열두 시간이 넘는 이동 끝에 연우가 내린 곳은 이름조차 생소한 사막 초입의 작은 간이역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이 막힐 듯한 뜨거운 열기와 함께 미세한 붉은 흙먼지가 연우의 눈과 코로 밀려들었다.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콘크리트 건물 몇 채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황무지뿐이었다. 휴대전화를 꺼냈지만, 화면 상단의 안테나는 이미 한 칸도 뜨지 않는 ‘서비스 없음’ 상태로 변해 있었다.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기 시작할 무렵,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거대한 픽업트럭 한 대가 역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트럭에서 내린 남자는 거구의 체구에 햇빛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마크였다. 그는 전화 통화 때처럼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연우의 캐리어를 트럭 뒷자리에 거칠게 던져 넣었다.
“반가워요, 연우 양! 생각보다 더 가냘프네. 이런 황무지는 처음이지? 겁먹을 것 없어요. 우리 농장은 여기서 차로 한 두 시간만 더 들어가면 되니까.”
트럭은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붉은 먼지가 와이퍼를 가릴 정도로 사납게 피어올랐다. 창밖의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괴할 정도로 단조로워졌다. 전신주도, 이정표도, 지나가는 다른 차량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오직 붉은 흙과 가시덤불 같은 낮은 관목들만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트럭은 멈추지 않았다. 연우는 문득 자신이 문명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지고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마크, 아직 더 가야 하나요? 휴대전화 신호가 전혀 안 잡혀서요.” 연우가 조심스럽게 묻자, 운전대를 잡은 마크의 눈이 백미러를 통해 연우를 서늘하게 응시했다. 그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다. “아, 아웃백 깊은 곳은 원래 기지국이 없어요. 외부랑 연락할 생각은 당분간 접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나가려면 내 차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냥 마음 편히 일에만 집중해요.”
그의 어조는 친절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명확한 경고였다. 연우는 침을 삼키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트럭은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힌, 축구장 수십 개 크기의 거대한 대농장 경계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농장의 중심부에 들어서자 사방으로 드넓은 오렌지 밭과 낡은 조립식 컨테이너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농장 곳곳에는 연우와 비슷해 보이는 동양인 워커 몇 명이 초점 없는 눈으로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묵묵히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기계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연우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마크는 연우를 농장 한구석에 위치한 아연도금 철판으로 둘러싸인 낡은 숙소 건물로 안내했다.
“여기가 연우 양이 지낼 곳이에요. 짐을 풀기 전에, 우리 농장의 규칙에 따라 서류 절차부터 진행해야 합니다.” 마크는 연우를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낡은 책상 위에는 정체불명의 영어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마크는 연우에게 펜을 쥐여주며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여권하고 지갑, 그리고 휴대전화 이리 줘요. 아웃백에서는 분실 위험이 커서 사무실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하는 게 원칙입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나면 정식으로 일과가 시작됩니다.”
여권과 신분증을 넘기라는 말에 연우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여권은 제가 보관하면 안 될까요? 신분증이라 늘 소지해야 해서요.” 그러자 사무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마크는 책상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연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연우 양, 내가 말했지? 여기는 내 농장이고, 내 규칙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지금 당장 이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도 좋아.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걸어서 사흘이 걸리는데, 물 한 모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의 눈빛에는 자비라곤 없었다. 사방이 황무지로 둘러싸인 이 고립된 공간에서, 여권과 차편을 쥔 마크는 왕이자 법이었다. 연우는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손을 떨며 여권과 지갑을 건넸고, 마크는 그것들을 철제 금고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영혼을 저당 잡힌 서명이 끝난 순간이었다.
지옥 같은 첫날의 노동이 끝났다.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무거운 오렌지 상자를 나르느라 연우의 온몸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손등은 뜨거운 태양에 붉게 타올랐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연우를 짓누른 것은 숨 막히는 고립감이었다. 저녁이 되자 아웃백의 사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농장 주변에는 단 하나의 가로등도 없었고, 오직 별빛만이 황량한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밤이 되자 낮의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뼈를 찌르는 듯한 서늘한 한기가 숙소를 감쌌다.
연우가 컨테이너 숙소 침대에 누워 떨고 있을 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마크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독한 보드카 병이 들려 있었고, 낮의 공적인 관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이 풀린 포식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숙소 안의 다른 워커들은 겁에 질린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 죽였다. 마크의 시선은 곧바로 연우에게 고정되었다.
“연우 양, 첫날인데 잠은 잘 오나? 아웃백의 밤은 아주 외롭고 무섭지. 고향 생각도 많이 날 테고.” 마크는 연우의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알코올 향이 연우의 코를 찔렀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벽 쪽으로 붙었다. “괜찮습니다. 피곤해서 그냥 자고 싶어요. 나가주세요.” 연우의 거절에 마크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연우의 타버린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가락끝에 힘이 들어가며 연우의 살을 파고들었다.
“치기 어리게 굴지 마. 네가 시드니에서 어떤 쓰레기 같은 삶을 살다 왔는지 다 알아. 여기선 내가 주는 돈과 내가 주는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어. 나한테 잘 보이면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해?” 그의 두꺼운 손가락바람이 연우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연우는 온몸의 털이두 세워지는 듯한 혐오감과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그를 자극했다가 이 외딴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르르 떨 뿐이었다.
마크는 연우의 턱을 거칠게 돌려 자신의 풀어헤쳐진 눈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의 거친 숨결이 연우의 얼굴에 닿았다. “여기선 아무도 널 찾지 못해. 네 신분증도, 네 돈도 다 내 금고에 있으니까. 네가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내 말에 절대복종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거야.” 마크는 연우의 얇은 셔츠 깃을 잡아당기며 은밀하고 강압적인 구속을 시도했다. 자극적인 위협과 함께 서서히 연우의 방어벽을 무너뜨리려는 가스라이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연우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내뿜는 가학적인 지배욕 앞에 무력하게 짓밟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농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외딴 아웃백의 붉은 흙먼지 아래 교묘하게 은폐된, 인간의 존엄성을 사냥하는 화려한 포식자들의 잔혹한 감옥이었다.
연우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을 도와줄 공권력도, 가족도 없는 이 붉은 감옥에서 과연 신체 건강하게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포식자의 숨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가운데, 아웃백의 첫 번째 잔혹한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