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완벽한 가장의 이중성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부, 산타 클라라.
이곳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중 하나였다. 넓은 저택들, 잘 가꾸어진 정원, 그리고 거리를 조용히 지나가는 고급 수입차들. 마치 유럽의 어느 부촌을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유럽이 아니었다. 이곳은 198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였다. 군사독재 정권의 그림자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불안과 공포가 공기 중에 스며있는 시대.
1982년, 어느 늦은 오후.
에스코바르 가족의 저택은 산타 클라라에서도 가장 조용한 골목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 정원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보기 드문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현관 앞에는 아버지 아르만도의 푸조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언봐도 평범한 중상류층의 집이었다.
하지만 이 집의 지하실에서는…
아르만도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50대 중반, 항상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완벽하게 빗어 넘겼다. 그의 이웃들은 그를 ‘존경받는 가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전직 정보기관 요원이었고, 현재는 작은 회계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과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파파, 오늘 저녁은 뭐예요?”
둘째 딸이 부엌에서 나오며 물었다. 아르만도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엄마가 준비하신 대로 먹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완벽한 가장의 목소리.
하지만 그 부드러움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오후 5시, 알레한드로 에스코바르가 집에 돌아왔다.
그는 아르헨티나 럭비 국가대표팀의 일원이었다. 1미터 90이 넘는 큰 키, 탄탄한 체격,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운동선수 중 하나였다. 그의 이름은 이미 스포츠 신문에 자주 등장했다.
“알레한드로, 오늘 훈련은 어땠어?”
“좋았어, 엄마. 코치님이 다음 주 경기에 나간다고 했어.”
어머니 엘레나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50대 초반,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역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이웃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완벽한 아내, 완벽한 어머니.
알레한드로는 거실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파파.”
“응. 수고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대화 속에도 무언가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알레한드로는 아버지의 눈을 직접 마주치지 않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 가족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엘레나가 준비한 아순도(아르헨티나식 스테이크)와 레드와인. 완벽한 중산층 가정의 저녁 식사.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최근에 그에게 한 제안. “도와줘야 할 사람이 있어.”
그 제안의 의미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아르만도는 아들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따라와.”
두 사람은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다. 아르만도는 열쇠꾸러미에서 작은 쇠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계단은 어두웠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알레한드로는 아버지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은 지상의 화려함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낡은 매트리스는 얼룩져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묶인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손목은 전선으로 꽁꽁 묶여 있었고,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네가 알 필요 없어. 그냥 여기서 기다려.”
알레한드로는 피해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아버지가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
알레한드로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물쇠가 채워지는 소리.
그날 밤, 그는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지하실에 갇힌 그 남자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남자가 흘린 피, 그의 떨림, 재갈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소리.
그는 알았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곧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며칠 후, 알레한드로는 아버지로부터 구체적인 임무를 받았다.
“네 친구 중에 돈 많은 놈 있지? 소개해줘.”
알레한드로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은 차가웠다.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었다. 그 눈빛은 이미 여러 번의 죽음을 본 사람의 것이었다.
“…라울 가르시아가 있어요. 럭비 팀 동료인데, 집이 부유한 편입니다.”
“좋아. 다음 주에 저녁 식사에 초대해.”
라울은 알레한드로의 절친이었다. 둘은 함께 훈련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여자를 꼬셨다. 라울은 알레한드로를 형님처럼 따랐다. 몇 년 전, 그가 부상을 당했을 때, 라울은 매일 병원에 찾아와 위로해주었다.
다음 주 금요일, 라울은 에스코바르 가족의 저택에 초대받았다. 아르만도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엘레나는 특별히 요리를 준비했다. 식탁 위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라울, 너 앞으로가 정말 촉망되는 청년이구나. 우리 알레한드로랑 같이 더 열심히 해라.”
“감사합니다, 에스코바르 씨.”
라울은 그날 밤, 아르만도가 건네는 와인을 마셨다. 와인은 평소보다 좀 썼다. 하지만 그는 예의상 끝까지 마셨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지하실에 누워 있었다. 온몸이 전선으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눈을 가린 천은 없었지만, 주변은 거의 깜깜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재갈 때문에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지하실 문이 열렸다. 아르만도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권총이 들려 있었다.알레한드로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라울, 미안하지만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네 아버지한테 전화해. 돈을 좀 보내달라고.”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알레한드로를 바라보았다. 입을 열고 싶었지만, 재갈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왜? 너까지?”
알레한드로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바닥만 바라보았다.
아르만도는 라울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말 잘 듣는 게 좋아. 네가 죽고 싶지 않으면.”
라울의 아버지, 마르코스 가르시아는 돈을 보냈다. 약 30만 달러. 엄청난 액수였다. 마르코스는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며 손이 떨렸다. 그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아들이 죽을까 봐 두려워서 신고하지 못했다.
아르만도는 몸값을 받고도 라울을 풀어주지 않았다.
“증인이 남으면 안 돼.”
그날 밤, 아르만도는 알레한드로를 지하실로 불렀다.
“이걸 해.”
그는 아들에게 권총을 건넸다. 금속이 차가웠다. 총구에서는 아직 화약 냄새가 났다.
알레한드로의 손이 떨렸다. 권총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질 것 같았다. “파파… 저는…”
“해. 너도 이제 우리 일원이야. 뒤로 물러설 수 없어.”
알레한드로는 권총을 들었다. 그의 친구 라울은 바닥에 무릎 꿇고 울고 있었다.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재갈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눈물과 침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알레한드로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공포와 배신감이 섞여 있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라울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어두운 핏물이 콘크리트 바닥에 흘러 퍼졌다. 따뜻한 피가 알레한드로의 신발을 적셨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바닥에 고인 피 때문에 미끄러졌다.
그는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손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었다.
“잘했어. 이제 너는 진짜 내 아들이야.”
아르만도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알레한드로에게는 더욱 소름끼쳤다.
알레한드로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울어도 소용없어. 이제 우리는 함께야.”
그날 밤, 알레한드로는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물은 뜨거웠지만, 그의 몸은 계속 떨렸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라울의 피는 이미 씻겨 내려갔다. 하지만 그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총을 쥐었던 감촉, 방아쇠를 당겼을 때의 저항감, 총성이 울린 후의 정적.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얼굴은 낯설었다. 더 이상 국가대표 럭비 선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살인자의 얼굴. 눈에 생기가 없었다.
그날 이후, 알레한드로는 아버지의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침묵은 이미 소용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범죄는 계속되었다. 두 번째 피해자도 알레한드로의 친구였다. 세 번째는 다른 부유한 사업가.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납치되고, 몸값이 지불된 후에 지하실에서 총살되었다.
그 사이, 에스코바르 가족의 일상은 완벽했다. 아르만도는 여전히 교회에 나갔다. 엘레나는 자선 바자회를 열었다. 알레한드로는 럭비 경기에 출전했다. 관중들은 그를 환호했다.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경기 중에도 라울을 생각했다. 공을 잡을 때마다,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점점 더 과격한 플레이를 했다. 상대 선수들에게 거친 태클을 걸었다. 심판에게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자신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1985년,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납치된 사람들의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모두 알레한드로 에스코바르와 연루되어 있었다. 경찰은 알레한드로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에스코바르 가족은 산타 클라라의 권력자들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만도는 정보기관 시절의 인맥을 이용해 경찰의 수사를 회피했다.
그는 오히려 더 완벽한 가장으로 행동했다. 이웃들에게 더 친절하게 굴었다. 교회에 더 자주 나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언젠가는 끝이 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