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그림자 한국편 #001] 욕망의 대가 – 4-2화: 등을 돌린 순간

4-2화: 등을 돌린 순간

서아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맺힌 땀이 금속 손잡이에 옅은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이 곧 사라지는 것을 1초 동안 바라보다가 그녀는 몸을 돌렸다. 구두 굽이 카펫에 박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복도에 울리지 못하고 두꺼운 카펫에 묻혔다.

그녀는 걸었다. 3001호에서 3005호를 지나 3010호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복도를 가로질렀다.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강 회장은 그녀가 돌아선 줄 모를 것이다. 아니,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상관없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구두가 발에 딱 맞지 않아 뒤꿈치가 살짝 까졌지만, 그 통증은 오히려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 되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문이 바로 열렸다. 30층에서 아무도 타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미세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화장은 라운지에서 찬물을 적셨을 때 이미 조금 번져 있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심장이 늑골을 때리는 속도가 엘리베이터의 하강 속도보다 빨랐다. 1층에 도착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로비에 도착하자 그녀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서서 찬물을 틀었다. 물을 두 손에 받아 얼굴에 적셨다. 번진 아이라이너가 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그녀는 종이 타월로 얼굴을 닦아내며 거울 속 자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거울 속 여자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겁먹었고 지쳤지만, 아직 서 있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김 실장의 번호가 최근 통화 목록 맨 위에 있었다. 그녀는 그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서아 씨? 벌써 끝났나요? 강 회장님이 뭐라고…”
“못 하겠어요.”
“…예?”
“못 하겠다고요. 나는 이제 그만둘래요.”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김 실장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3초 후, 그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차가운 금속성을 띠었다.

“서아 씨,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죠?”
“농담 아니에요.”
“강 회장님은 어디 계시고요?”
“모르겠어요. 문을 열지 않았으니까.”
“호텔에서 그냥 나왔다는 말입니까?”
“네.”
“지금, 그냥, 나왔다고요?”

김 실장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더 위협적이었다. 서아는 세면대 가장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알겠습니다, 서아 씨. 그런데 이거 아셔야 해요. 지금 서아 씨가 한 행동은 1,200만 원을 갚지 않겠다는 선언이란 거. 그리고 강 회장님을 모욕한 거라는 것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는 계시죠?”
“…네.”
“그래요? 글쎄, 내일 아침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내일 출근하실 때 조심하시고. 그리고 부모님도.”

전화가 끊겼다. 서아는 핸드폰을 세면대 위에 내려놓았다. 김 실장의 마지막 한마디가 화장실 벽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부모님.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곧바로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그녀는 뒷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남의 불빛들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불빛들 하나하나가 그녀를 향해 열려 있는 덫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오늘 밤은 아무에게도 연락받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월요일 아침 6시 30분.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눈이 떠졌다. 잠은 거의 오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김 실장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내일 출근하실 때 조심하시고.”

그녀는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회색빛 새벽이 창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리는 아직 조용했다. 그녀는 옷장을 열고 출근복을 꺼냈다. 언제나처럼 깔끔한 블라우스와 정장 바지. 그러나 오늘은 액세서리를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 까르띠에 시계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두었다. 오늘은 그 무게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하자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보안 요원이 가볍게 목례를 했고, 동료들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의 자리는 여느 때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너무나 아무 일도 없어서 오히려 불안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팀장이 그녀의 자리로 다가왔다.

“서아 씨, 1층 로비에 손님이 와 있어요. 서아 씨를 찾는데 직접 만나야 한대요.”
“…손님요? 누군데요?”
“모르겠어요. 남자 두 명인데, 뭔가 서류 같은 걸 들고 있던데.”

서아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추었다. 그들이 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열어 지갑을 확인했다. 지갑 속에는 신분증과 카드 몇 장, 그리고 3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닫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층 로비에는 김 실장이 직접 와 있었다. 그의 뒤로 지난번 오피스텔에서 본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김 실장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마치 비즈니스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보자 그가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서아 씨, 여기로 와요.”

서아는 로비 구석으로 걸어갔다. 동료들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며.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김 실장은 일어나지도 않고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오늘은 시간 좀 내줘야겠어요.”
“저는 지금 근무 중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여기서 얘기할까요? 회사 동료들이 다 듣게.”

서아는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김 실장은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일은 정말 유감이에요. 강 회장님한테 사과까지 대신 했어요. 그런데 서아 씨, 이게 현실이에요. 지금 서아 씨는 1,200만 원을 빚지고 있고, 이자는 매일 불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돈은 갚을 거예요.”
“어떻게요? 월급 230만 원으로? 이자가 매달 360만 원인데?”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김 실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른 종류의 서류를 꺼냈다.

“여기, 서아 씨 회사 정보에요. 급여 통장, 직급, 입사 연도. 그리고 이건 서아 씨 부모님 명의로 된 분당 아파트 등기부등본이고요. 우리가 파악한 건 이 정도예요.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대화로 풀고 있는 건, 서아 씨에게 그래도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으로.”

김 실장은 서류를 도로 봉투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까지 생각을 정리해요. 어제 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만약 또 이런 식이면, 우리는 더 이상 대화로 풀지 않아요. 그때는 서아 씨 회사와 부모님이 먼저 알게 될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죠?”

서아는 고개를 들고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거래를 제안하는 사업가의 눈빛이 아니라, 마감을 독촉하는 사채업자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는 그런 일 다시는 안 해요.”
“서아 씨.”
“돈은 다른 방법으로 갚을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는 뒤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김 실장이 조용히 말했다.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서아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오늘 내일 당장 무너지지 않는다. 일단 버티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다.

그날 저녁, 서아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장을 열었다. 선반 위의 명품 가방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넬 클래식 플랩백, 구찌 마몽 숄더백, 루이비통 네오노에, 프라다 사피아노 토트백, 발렌시아가 클러치, 셀린느 트리오페. 총 여섯 개. 구매 총액은 대략 1,800만 원 정도. 지금 그녀가 진 빚보다 더 큰 금액이었다.

그녀는 가방들을 하나씩 꺼내 침대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가죽 냄새, 금속 버클의 광택, 정교한 박음질.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가방들을 모으는 데 그녀는 3년을 썼다.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명품 매장으로 달려갔고, 할부 개월 수를 늘려가면서까지 이 선반을 채웠다. 이 가방 하나하나는 그녀의 자존심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던 방패였다.

그러나 지금, 이 가방들은 방패가 아니라 쇠사슬이었다. 그녀를 사채 빚으로 끌어들인 원인이자, 김 실장이 그녀를 옭아맨 족쇄였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중고 명품 거래 앱을 열었다. 샤넬 플랩백, 구매가 580만 원. 중고 시세는 상태 좋은 것이 300만 원대. 그녀의 것은 1년 정도 사용했으니 280만 원 정도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방의 정면, 측면, 내부, 시리얼 넘버까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샤넬 클래식 플랩백 스몰, 블랙 램스킨. 280만 원에 급처합니다. 보증서, 더스트백 포함.” 그녀의 엄지가 등록 버튼 위에서 떨렸다. 이 가방은 그녀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이걸 파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그 특별한 서아가 아닌 것 같았다. 대학 시절, 20만 원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의 시선에 움츠러들던 그 서아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버튼을 눌렀다. 등록 완료. 이어서 구찌 마몽도 등록했다. 120만 원. 루이비통 네오노에도 등록했다. 150만 원. 침대 위의 가방들이 하나씩 앱의 상품 리스트로 옮겨졌다. 그녀는 세 개의 가방을 올린 후 잠시 멈추었다. 프라다 사피아노는 엄마가 처음으로 선물해준 명품이었다. 그녀는 프라다를 다시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발렌시아가 클러치도 남겼다. 면접에 합격했을 때 스스로에게 준 첫 명품 선물이었다.

나머지 셋은 팔기로 했다. 예상 총액은 약 550만 원. 빚의 절반 가까이를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녀는 앱을 종료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방을 판다는 것은 그녀의 세계에서 가장 큰 패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빚은 여전히 컸고, 위협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결정했다. 스스로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대신, 그 욕망의 증거물을 자신의 손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흘렀다. 중고 거래 플랫폼에 올린 가방 중 두 개가 팔렸다. 샤넬 플랩백은 270만 원, 구찌 마몽은 110만 원. 합계 380만 원이 통장에 들어왔다. 루이비통 네오노에는 아직 팔리지 않았다. 서아는 380만 원 전액을 김 실장의 계좌로 이체했다. 계좌 이체 내역을 캡처해서 김 실장에게 보내며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 “원금에서 차감해 주세요.”

김 실장은 즉시 답장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난 저녁에야 문자가 왔다.

“입금 확인했어요. 잔여 채무액 820만 원. 그런데 서아 씨, 이러다 명품 다 팔겠네요. 어제 인스타 보니까 아직 샤넬은 들고 다니시던데, 그건 팔린 거 아니었나 봐요?”

서아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손이 차가워졌다. 김 실장은 여전히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가방을 팔고 어떤 가방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답장하지 않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다음 날, 서아는 점심시간을 쪼개 동사무소를 방문했다. 신용회복위원회 상담을 예약하러 간 것이었다. 상담 예약은 일주일 뒤로 잡혔다. 그녀는 접수증을 받아 핸드백에 넣으며 생각했다. 나 혼자 이 빚을 감당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경찰일 수는 없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김 실장은 바로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부모님이 위험해진다.

그날 저녁, 그녀는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피드에는 여전히 화려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친구들의 쇼핑 인증, 핫플레이스 방문 인증, 명품 언박싱 영상. 그녀는 그 사진들을 스크롤하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피드에서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낯선 풍경처럼 보였다.

그녀의 마지막 게시물은 2주 전 생일 파티 사진이었다. 600개가 넘는 좋아요와 수십 개의 댓글. 그녀는 그 게시물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편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게시물을 비공개 처리했다. 좋아요 600개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무도 그 게시물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어서 두 개의 게시물을 더 비공개로 전환했다. 화려한 저녁 식사 사진, 호텔 뷔페 인증샷. 모두 사라졌다.

그녀의 피드는 점점 텅 비어갔다. 마치 그녀가 지난 3년 동안 쌓아온 가면을 하나씩 벗겨내는 것처럼.

바로 그때였다. 민영에게서 카톡이 왔다.

“서아야 너 무슨 일 있어? 인스타 게시물들 왜 지웠어? 혹시 해킹 당한 거 아니지?”
“…아니, 그냥 좀 정리하려고.”
“왜? 그렇게 예뻤는데! 특히 생일 파티 사진 진짜 부러웠는데.”
“그냥, 이제 좀 질렸어.”

답장을 보내고 나자 민영은 잠시 후에야 짧은 답을 보내왔다. “너 원래 안 그랬잖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요즘 통 연락도 안 되고.” 서아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흐렸고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괜찮아질 거야.”

수요일 오후, 서아는 사무실에서 프로모션 기획안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엑셀 시트의 숫자들이 더 이상 그녀에게 낯선 암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집중해서 숫자를 입력했고, 오타 없이 서식을 정리했다. 일이 끝나갈 무렵,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서아 씨, 나야. 김 실장.”

서아는 몸을 곧추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김 실장의 목소리는 지난번보다 더 딱딱했다.

“며칠 동안 생각할 시간을 드렸는데, 서아 씨 태도는 변한 게 없네요. 가방 세 개 팔아서 380만 원 보낸 거, 잘 봤어요. 그런데 그걸로는 턱도 없어요. 그리고 며칠 전에 동사무소 갔다 오셨더라고? 신용회복 상담 예약까지 하고. 그걸로 뭘 어쩌려고?”
“…제 빚을 합법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는 거예요.”
“합법적? 서아 씨, 지금 우리를 상대로 합법적인 방법이 어디 있어요? 서아 씨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그냥 우리를 무시하는 거예요. 돈 빌려놓고 갚기 싫다고 버티는 거랑 다를 바 없다고요. 강 회장님 일도 그렇고, 이제는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겁니까?”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 창밖으로 맞은편 건물 옥상이 보였다. 바람이 불어 간판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서아 씨, 솔직히 말할게요. VIP 접대 거부하고, 명품 팔고, 동사무소 가고. 그런 소소한 저항 다 좋아요. 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아요. 돈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자는 계속 붙고, 우리는 서아 씨가 뭘 하든 끝까지 따라붙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안 해요.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안 합니다.”

김 실장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이전까지의 그였다면 곧바로 협박을 퍼부었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다른 선택지를 준비해둔 사람처럼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서아 씨, 우리도 사업이에요. 사업이 잘 안 풀리면 저도 제 윗사람에게 보고해야 해요. 내가 아무리 서아 씨를 봐주고 싶어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선이 있어요. 다음 주까지 갚을 의지가 없다는 걸 최종 확인하면, 그때부터는 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압박이 들어갈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해준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요.”
“…알겠어요.”
“그리고 하나 더.”

김 실장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서아 씨 부모님 댁에 지난주에 택배 하나 보냈어요. 별건 아니고, 서아 씨가 찍힌 사진 몇 장이랑 빚 내역서. 이제 이틀쯤 됐으니 부모님이 열어보셨을 수도 있고, 아직 모르실 수도 있고. 어머니 건강 안 좋으시다던데, 충격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네.”

서아의 손이 핸드폰을 쥔 채로 떨렸다. 복도 벽이 그녀 주변에서 회전하는 듯했다. 부모님. 부모님께 사진이. 그녀가 W호텔 32층 라운지에서 찍혔을 사진인지, 아니면 다른 순간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끔찍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서아 씨 결심을 듣기로 해요. 그때까지 좋은 선택하기를 바랄게요.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 기회예요.”

전화가 끊겼다. 서아는 복도 벽에 기대어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회사 복도에서는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와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이 아주 멀게 느껴졌다. 두려움이 여전히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모님에 대한 걱정도 컸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하게도 후회하지 않았다. 돌아선 그 밤, 문을 열지 않은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어머니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멈추었다. 지금 전화를 걸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엄마, 혹시 택배 받으셨어요? 그녀는 통화 버튼 대신 메시지를 열었다.

“엄마, 주말에 집에 갈게요. 그때 할 말이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녀는 복도에서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여전히 엑셀 시트가 떠 있었다. 그녀는 커서를 빈 셀에 올려놓고, 숫자를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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