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그림자 두바이편 #002] 대저택의 그림자 – 7-4화: 사막을 넘어

7-4화: 사막을 넘어

리자의 손에 쥔 볼펜 끝이 서류의 사인란에 닿았다. 푸른 잉크가 종이 섬유 위에서 미세하게 번졌다. ‘Sponsorship Transfer Agreement’. 그녀의 이름, 그녀의 여권 번호, 그리고 그녀를 한 인간에서 자산으로 바꾸는 모든 조항들이 그 종이 위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벽시계는 오후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분 후면 경비가 교대하는 시간이었다. 수니타가 알려준 10분의 빈틈. 그녀는 지난 2주 동안 이 순간을 위해 모든 정보를 모았다. 경비 교대 시간은 정확히 3시였다. 교대하는 경비원들은 정문에서 담배를 피우며 5분 이상 잡담을 나누었다. 그동안 뒷문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감시 카메라는 정원 분수대 쪽으로 각도가 고정되어 있었고, 담장을 따라 난 좁은 길은 카메라의 사각지대였다.

그녀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서류 위에 서명은 없었다. 잉크는 볼펜 끝에서 맺힌 채 말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류는 식탁 위에 펼쳐진 채로 남았다.

수니타는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리자가 서류에 사인하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과 안도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녀는 리자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3시 정각이야. 뒷문 경비가 교대하러 정문으로 올라가. 라힘이 자물쇠를 느슨하게 풀어뒀어. 담장 옆 길은 카메라 사각이니까 몸을 낮추고 가.”

리자는 수니타의 손을 꼭 잡았다. 수니타의 손은 차갑고 땀에 젖어 있었다.

“수니타 씨, 같이 가요.”

수니타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가족들이 인도에 있어. 나까지 사라지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너라도 가. 내 몫까지.”

리자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수니타를 한 번 더 껴안고 부엌 뒷문으로 향했다.

2시 59분. 리자는 부엌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섰다. 사막의 오후 햇살이 대리석 바닥을 달구고 있었다. 그녀는 미리 확인해둔 경로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담장 그림자가 드리운 좁은 통로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였고, 숨소리는 분수대 물소리에 묻혔다.

3시 정각. 그녀는 멀리서 경비원 두 명이 정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뒷문 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움직였다.

뒷문은 낡은 철제 문이었다. 라힘이 말했듯이, 자물쇠는 걸려 있었지만 나사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물쇠를 밀어 올렸다.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났지만 분수 소리에 묻혔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 밖으로 나섰다. 4개월 만에 처음으로, 담장 너머의 세상을 밟았다.

그녀는 뛰지 않았다. 뛰면 눈에 띄었다. 대신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따라 큰길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수니타가 준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필리핀 대사관의 주소.

큰길에 도착하자 그녀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뒷좌석에 오르며 운전사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이 주소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하자 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 배터리는 5%였다. 그녀는 쪽지에 적힌 대사관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필리핀 억양의 영어가 들려왔다.

“필리핀 대사관입니다.”

리자는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전달하는 내용은 또렷했다.

“제 이름은 리자 산토스입니다. 두바이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이에요. 고용주에게 여권을 빼앗겼고, 감금 상태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지금 택시로 대사관으로 가는 중입니다.”

“리자 씨, 진정하시고 대사관 정문으로 오세요. 직원이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리자는 택시 좌석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해냈다. 수니타의 정보와, 라힘의 도움과, 그리고 지난 2주 동안 그녀가 모은 모든 관찰이 이 순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대사관 건물은 두바이 시내의 작은 빌딩이었다. 정문에는 필리핀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리자는 택시에서 내려 정문으로 걸어갔다. 영사과 직원이 현관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40대 초반의 남성이었고, 그의 이름은 라몬이었다.

“리자 씨, 이쪽으로 오세요. 안전합니다.”

상담실은 작았지만 깨끗했다. 탁자 위에는 물병과 컵이 놓여 있었다. 라몬은 리자가 물을 한 잔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모두 말씀해 주세요.”

리자는 마닐라의 에이전시에서부터 대저택의 감금, 빚의 함정, 알리 씨의 요구, 나빌의 집으로의 이전, 다락방에서 발견한 다섯 개의 여권, 그리고 오늘 오후의 탈출까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진술은 구체적이었고, 그녀의 기억은 정확했다. 1시간이 넘는 진술 동안 라몬은 거의 말을 끊지 않고 노트에 기록했다.

“리자 씨, 당신이 제공한 정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다락방의 여권들은 다른 실종자들의 행방을 추적할 결정적 단서가 될 거예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말씀드리면, 카팔라 시스템 아래에서 스폰서의 권한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법적 공방을 준비해야 해요.”

리자가 대사관에 머문 지 사흘째 되던 날, 라몬이 무거운 표정으로 상담실에 들어왔다.

“리자 씨, 고용주 측에서 당신을 ‘도주 및 계약 위반’으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식탁 위에 남아 있던 서류에는 당신의 친필 서명이 없었기 때문에 법적 효력은 제한적이지만, 초기 계약서의 채무 조항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리자의 손이 탁자 위에서 굳어졌다. 그녀는 서류에 사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최초에 사인했던 고용 계약서는 여전히 유효했고, 거기에는 20,000디르함의 빚이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카드가 있습니다.”

라몬은 서류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진이었다. 대저택 다락방에서 발견된 다섯 개의 필리핀 여권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이 여권들의 원본은 현재 대사관 금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증거를 바탕으로 현지 외교부에 강한 압박을 넣었고, 알리 씨와 나빌 씨 측에 ‘인신매매 및 강제 감금’ 혐의에 대한 국제 공조 수사 가능성을 통보했어요.”

“그 사람들이 체포된 건가요?”

라몬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에는 조심스러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니요. 체포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문의 명예와 외교적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고소를 취하하기로 했어요.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리자 씨의 빚 21,400디르함을 전액 탕감할 것. 둘째, 리자 씨가 두바이를 자진 출국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종결할 것.”

리자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탕감. 출국. 그녀는 감옥에 갇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용주들도 감옥에 갇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대저택에서 살 것이고, 다른 가사도우미들을 고용할 것이며, 시스템은 계속될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 최선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예. 카팔라 시스템 아래에서 스폰서를 상대로 한 법적 소송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승소를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그동안 리자 씨는 두바이를 떠날 수 없고, 대사관 안에 머물러야 하고요. 이 합의는 불완전하지만, 당신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리자는 탁자 위의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다섯 개의 여권. 다섯 명의 여성들. 안젤라, 마리아, 조세핀. 그들의 행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바로 이 협상의 지렛대가 되었다. 그녀는 그들이 남긴 흔적 덕분에 자유를 얻고 있었다.

“알겠어요. 받아들일게요.”

석 달 후, 두바이 국제공항. 리자는 출국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필리핀 대사관이 발급해준 임시 여행 증명서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빚은 탕감되었다. 그녀의 출국 금지 조치도 해제되었다. 그녀는 이제 자유롭게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니타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 그녀의 탈출 이후, 알리 씨의 보복으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왼쪽 폐에 타박상을 입었다. 대사관의 개입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회복 후 필리핀으로 송환될 예정이었다. 라힘은 무릎이 더 심하게 망가져 더 이상 정원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무릎은 평생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라몬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는 리자에게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대사관에서 준비한 거예요. 마닐라에 도착하면 현지 지원 단체에서 연락이 갈 거예요.”

“감사합니다, 라몬 씨. 정말… 모든 것에 감사드려요.”

“당신이 용기를 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아직 진행 중인 수사도 있어요. 다락방의 여권들… 그 여성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거예요.”

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바이의 마천루들이 오후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8개월 전, 그녀는 이 도시에 도착했다. 그때 그녀는 가난을 벗어날 꿈을 품고 있었다. 그 꿈은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는 살아서 돌아가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창밖으로 사막의 모래빛이 펼쳐졌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래 아래에는 아직도 수많은 대저택이 있었고, 수많은 지하실 방이 있었으며, 수많은 리자와 수니타와 안젤라가 있었다.

몇 시간 후, 마닐라 공항. 출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머니와 미겔이었다. 어머니는 더 늙어 보였고, 미겔은 더 자라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자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거칠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그 손의 온기는 진짜였다.

쿠타이시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리자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푸른 논과 코코넛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풍경은 8개월 전과 똑같았다. 가난도 그대로였다. 마을 입구의 판자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길가의 하수구에서는 썩은 생선 비린내가 올라왔다. 그녀가 돌아온 곳은 그녀가 떠났던 바로 그 가난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내부는 8개월 전과 같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더 이상 물집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8자리 대사관 번호가 남아 있었고, 수니타의 부러진 갈비뼈가 남아 있었고, 라힘의 망가진 무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락방 상자 속에 갇혀 있던 다섯 개의 여권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미겔은 그녀의 옆에 앉아 쿨쿨 잠들었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쿠타이시로 향하는 낡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END —————————————-목록으로 (클릭)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