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그림자 투르크메니스탄편 #001] 마나트의 덫 – 7-4화: 카라쿰의 새벽

7-4화: 카라쿰의 새벽

이스탄불 공항의 환승 라운지는 오후의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활주로에 정렬한 비행기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먼 곳에서 아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진우는 에스프레소를 다 마시고, 주머니 속에서 터키 변호사의 명함을 꺼냈다.

에미르 칸. 이스탄불에 사무소를 둔 국제 상거래 변호사. 구르반의 터키 바이어들이 데려왔던 그 변호사였다. 100만 달러짜리 거래를 검토하던 날, 그는 진우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었다. “이스탄불에서도 일할 생각 없습니까?”

당시에는 그저 형식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 명함이 그에게는 마지막 카드였다.

진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린 후, 저편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미르 칸입니다.”

“칸 변호사님, 저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당신을 만났던 한진우라고 합니다. 면사 거래 서류를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물론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일자리가 아니라, 조언이 필요합니다.”

진우는 자신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의 불법 환치기, 구르반의 조직, 베르디예프와의 거래, 그리고 무라도프의 협박까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칸 변호사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당신은 지금 매우 위험한 위치에 있습니다. MNB의 수사관이 당신을 개인적으로 노리고 있다면,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안전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끝내고 싶습니다.”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무엇입니까?”

“베르디예프를 움직이는 겁니다. 그가 당신의 장부를 받아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장부가 그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만약 그 장부에 또 다른 이름들이 더 있다면? 베르디예프의 상관, 혹은 그를 숙청할 수 있는 더 높은 권력의 비리까지 기록되어 있다면?”

진우는 눈을 감았다. 장부. 그가 구르반의 조직에서 수집한 데이터는 이미 베르디예프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 데이터의 사본은 빅토르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의 USB에도 여전히 암호화된 파일이 남아 있었다.

“제 장부에는 중앙은행 임원과 세관 간부 정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르디예프의 상관까지는…”

“그럼 찾아야죠. 베르디예프가 두려워할 만한 정보를. 지금 당장.”

진우는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빅토르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벽돌폰으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이메일도 보내봤지만 답장이 없었다. 빅토르는 사라진 듯했다. 진우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빅토르가 체포되었거나, 아니면 이미 도망친 것일까.

그러던 중, 익명의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제목은 없었고, 본문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당신의 친구가 남긴 것을 찾으려면,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의 구리 세공점 ‘카라’를 찾아가시오.”

진우는 즉시 택시를 타고 그랜드 바자르로 향했다.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시장은 미로처럼 얽힌 골목과 수천 개의 점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펫, 향신료, 보석, 구리 세공품들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상인들의 흥정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한참을 헤맨 끝에 ‘카라’라는 작은 구리 세공점을 찾아냈다. 가게 주인은 60대의 터키 남자였다. 진우가 빅토르의 이름을 언급하자,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가게 안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고, 창고 구석에는 낡은 금고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당신이 한국에서 온 그 사람이군요.” 주인이 말했다. “빅토르가 이걸 맡기면서 말했소. 언젠가 한국인 친구가 찾아올 거라고.”

금고가 열렸다. 안에는 USB 하나와 서류 봉투가 들어 있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USB를 집어 들었다. 빅토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바자르 인근의 PC방으로 가서 USB의 내용을 확인했다.

USB 안에는 장부의 사본뿐 아니라, 빅토르가 따로 수집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MNB 고위층의 비자금 흐름을 보여주는 문서도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베르디예프의 직속 상관인 MNB 부장과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궁 비서실장 사이의 거래 기록이었다. 그 거래는 베르디예프도 관여하지 않은, 더 높은 차원의 비자금 세탱이었다.

진우는 이 문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시 깨달았다. 이것은 베르디예프가 모르는 정보였다. 그리고 베르디예프에게 이 정보를 넘기면, 그는 자신의 상관을 제거하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무기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동시에, 만약 이 정보가 베르디예프의 상관에게 넘어가면, 베르디예프는 위험해질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이 데이터는 협상의 패가 될 수 있었다.

에미르 칸 변호사는 USB의 내용을 검토한 뒤, 진우에게 전략을 제시했다.

“이 정보를 베르디예프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가 당신을 제거하려 들 수도 있어요. 대신, 우리는 이 정보를 베르디예프의 상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제3자를 통해 전달할 겁니다.”

“제3자라면?”

“터키 정보부(MIT)입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불법 자금이 이스탄불을 통해 세탱되고 있다는 점에서, 터키는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어요. 게다가 저는 MIT와 몇 가지 일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칸 변호사는 진우에게 이스탄불에 며칠 더 머물 것을 권했다. 그는 자신의 인맥을 통해 MIT에 연락을 취했고, 진우는 MIT 요원들과 비공식적인 면담을 가졌다. 요원들은 진우가 가진 정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터키로 흘러들어온 불법 자금의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당신이 가진 이 문서는 베르디예프의 상관이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궁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MIT 요원이 말했다. “이 정보가 공개되면, 투르크메니스탄 내부에서도 권력 투쟁이 시작될 겁니다. 베르디예프 같은 인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고요.”

“제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저와 제 가족을 위협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움직여야 해요. 베르디예프에게 연락해, 당신이 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세요. 그리고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그가 원하는 정보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하는 겁니다.”

아시가바트와의 국제 전화는 여전히 연결이 불안정했다. 그러나 진우는 벽돌폰을 통해 베르디예프의 개인 비서와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베르디예프는 처음에는 진우의 전화를 거부하려 했지만, “당신의 상관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라는 한마디에 태도를 바꿨다.

“당신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베르디예프의 목소리는 냉소적이었다.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뭡니까?”

“당신이 받은 장부에는 포함되지 않은 정보가 있습니다. MNB 부장과 대통령궁 비서실장 사이의 거래 기록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진우는 베르디예프가 계산기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베르디예프는 자신의 상관을 제거하고 MNB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 정보를 어떻게 얻었죠?”

“빅토르가 남겼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빅토르는 구르반을 통해 더 높은 곳의 비자금까지 추적하고 있었던 겁니다.”

또 한 번의 침묵. 그런 다음 베르디예프가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간단합니다. 무라도프를 영원히 무력화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제 가족에 대한 모든 위협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 정보는 당신의 것입니다.”

“무라도프는 이미 좌천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추적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죠. 그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더 큰 명분이 필요한데… 당신이 가진 정보가 그 명분이 될 수 있겠군요.”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단,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영원히 침묵해야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야 해요.”

“이미 그럴 생각입니다.”

베르디예프는 짧게 웃었다. “좋습니다. USB를 전달할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다시는 이 번호로 연락하지 마십시오.”

일주일 후, 에미르 칸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시가바트에서 소식이 왔어요. MNB 내부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베르디예프가 부장의 비리 증거를 대통령궁에 제출했고, 부장과 비서실장이 동시에 체포되었대요. 그리고…”

“그리고?”

“무라도프도 체포되었답니다. 부장의 최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오단데페로 이송되었다고 하더군요.”

진우는 전화를 든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라도프가 오단데페에 갔다. 그가 진우에게 보내려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공포와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게임은 끝났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당신에 대한 모든 혐의를 철회했어요. 국제 소송도 취하되었고, 인터폴 적색 수배도 해제되었답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예요, 진우 씨.”

진우는 이스탄불의 창밖을 바라봤다.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유럽과 아시아가 갈라져 있었다. 두 대륙 사이에 놓인 이 도시에서, 그는 마지막 도박을 완수했다.

“감사합니다, 칸 변호사님.”

“감사는 됐고, 이제 한국에 돌아가서 평범하게 사세요. 그게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이겨낸 이유니까.”

사흘 후, 진우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진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울먹였다. 진우는 아내에게 다가가 천천히 그녀를 껴안았다.

“미안해. 이제 진짜로 끝났어.”

아내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화로웠다. 올림픽대로는 주말 오후의 한가로운 차량들로 채워져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한국어 노래가 흘러나왔다. 진우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진정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진우는 회사에 복귀하지 않았다. 대신 터키 변호사 에미르 칸의 소개로 이스탄불과 서울을 오가는 무역 컨설팅 일을 시작했다. 합법적인 무역 상담과 서류 검토가 주된 업무였고, 더 이상 암시장이나 환치기와는 상관없는 세계였다. 그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배운 무역 실무 지식은 이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내와의 관계는 천천히 회복되었다. 그녀는 진우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겪은 일들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다시는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주말이면 부모님을 찾아뵈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감사기도를 올렸으며, 아버지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느 날 밤, 진우는 집 앞 작은 마당에 나갔다. 서울의 밤하늘은 별이 몇 개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하늘은 그에게 자유를 의미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빅토르가 건넨 낡은 흑백 사진을 꺼내 잠시 바라봤다. 카라쿰 사막을 배경으로 선 고려인 가족.

빅토르는 끝내 사라졌다. 베르디예프의 숙청 이후, 그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진우는 믿고 싶었다. 빅토르가 어딘가에서 자신과 같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그가 남긴 마지막 USB가 진우를 구원했듯이.

진우는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카라쿰 사막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서울의 조용한 별빛이었다. 그리고 그 별빛 아래서, 그는 마침내 평화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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