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그림자 그리스편 #001] 0에 수렴하는 비명 – 7-4화: 0에서 시작하는 삶

7-4화: 0에서 시작하는 삶

니코스와 엘레니가 아파트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니코스는 책상 서랍에서 낡은 USB 메모리를 꺼냈다. 14년 동안 통제실에서 조금씩 빼내온 데이터였다. 계좌 번호, 송금 경로, 피해자 명단, 경찰 내부의 비호 세력 명단.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는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 엘레니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거… 뭐예요.”

“14년 동안 모은 거야.”

니코스는 파일을 열었다. 3,200명의 피해자 명단. 47개의 계좌 번호. 12명의 경찰 고위 간부 이름. 그는 이 데이터를 익명으로 전송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엘레니는 그의 옆으로 다가와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도 있어요.”

GR-0214. 엘레니의 등록 번호 옆에 그녀의 실명이 적혀 있었다. 니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지울 거야.”

그는 엘레니의 데이터를 파일에서 삭제했다. GR-0227도 삭제했다. 그리고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전 10시, 니코스는 아테네 중심가의 한 인터넷 카페로 향했다. 엘레니는 아파트에 남았다. 그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익명 브라우저를 열었다. USB의 데이터를 압축하여 7개의 언론사와 3개의 국제 인권 단체, 그리고 그리스 금융 범죄 수사대에 전송했다. 전송 완료까지 12분이 걸렸다.

이후 니코스는 USB를 카페 화장실 변기 물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조용히 카페를 나왔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엘레니가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니코스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끝난 거예요?”

“끝났어.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

이틀 후, 아테네 전역의 뉴스가 폐창고의 실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건물을 급습했고, 상위 관리자 2명이 체포되었으며, 32명의 채무자가 구출되었다는 속보가 TV를 통해 흘러나왔다. 엘레니는 TV 앞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특별한 표정이 없었다. 니코스는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잡혔네요.”

“그래.”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니코스는 커피를 두 잔 따라 식탁으로 가져왔다. 한 잔을 엘레니 앞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여기 있는 거야.”

사흘째 되는 날, 변호사가 찾아왔다. 아테네의 한 시민 단체에서 파견한 젊은 변호사였다. 그는 니코스와 엘레니에게 법적 조언을 해주었다. 피해자 신분으로서의 권리, 채무 무효화 소송, 그리고 조직에 대한 증언의 필요성.

엘레니는 자신의 채무가 무효화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 서류에 서명했다. 니코스는 그녀의 옆에서 같은 서류에 서명했다. 그의 손글씨는 여전히 또박또박했다.

법정 출석은 한 달 후로 잡혔다. 니코스는 그동안 임시 직업을 구했다. 항구 근처의 작은 정비소였다. 자동차 정비공. 14년 전, 그가 시청 공무원이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손에 기름을 묻히는 일이 싫지 않았다. 기계는 말이 없었다. 부품을 교체하고, 엔진을 수리하고, 오일을 갈았다. 그 모든 동작은 조용하고 명확했다. 그는 이 새로운 일에 천천히 적응해 갔다.

엘레니는 직업 훈련 센터에 등록했다. 컴퓨터 기초 과정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니코스의 낡은 운동화를 신고 센터로 걸어갔다. 수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다. 그녀는 타이핑을 배우고,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익혔다. 강사는 그녀가 습득이 빠르다고 말했다. 엘레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녀는 니코스에게 처음으로 수업 내용을 설명했다.

“오늘은 표를 만드는 걸 배웠어요.”

“그래.”

“어렵지 않았어요.”

니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엘레니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으로 표를 만들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울렸다.

한 달 후, 법정이 열렸다. 니코스와 엘레니는 나란히 증언대에 섰다. 엘레니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진술했다. 47,300유로의 빚, 계약서의 함정, 폐쇄된 방에서의 12개월, 그리고 폐기 통보까지.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니코스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의 차례가 되자, 그는 14년 동안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설명했다. 32대의 모니터, 알고리즘, 반응 점수, 폐기 프로토콜. 그리고 자신이 두 번 내렸던 주 전원 스위치.

재판은 3개월 동안 이어졌다. 조직의 핵심 인물 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 32명에 대한 채무는 전액 무효화되었다. 니코스의 손해배상 청구도 취소되었다. 법정에서 나오는 길, 니코스와 엘레니는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햇빛이 따가웠다.

“이제… 빚이 없어요.”

엘레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니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의 옆에서 걸었다.

봄이 왔다. 니코스는 정비소에서 정식 직원이 되었다. 월급은 950유로. 예전보다 적었지만, 빚은 없었다. 엘레니는 직업 훈련 센터의 고급 과정에 등록했다. 회계 과정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니코스처럼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니코스는 그 말을 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72도. 뜨거웠다.

어느 일요일 오후, 니코스와 엘레니는 피레우스 항구의 부두를 걸었다. 바다 냄새. 경유 냄새. 갈매기 울음소리. 엘레니의 신발은 이제 낡지 않았다. 그녀는 부두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니코스는 그녀의 옆에 섰다.

“그날… 왜 스위치를 내렸어요.”

엘레니가 물었다. 니코스는 바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고장 나지 않았으니까.”

엘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파도를 바라보았다. 갈매기가 하늘을 돌고 있었다.

그날 저녁, 니코스는 책상에 앉아 낡은 수첩을 꺼냈다. 페이지를 넘겼다. GR-0214의 기록이 있던 자리는 찢겨 있었다. 그는 빈 페이지에 볼펜을 대고 한 줄을 적었다.

‘0.’

그리고 수첩을 덮었다.

엘레니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더 이상 팔찌의 흔적이 없었다. 니코스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일은 뭐 할 거야.”

“내일은… 출근이죠.”

엘레니는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당신도요.”

니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불을 끄고 바닥에 누웠다. 담요는 얇았고, 바닥은 차가웠다. 내일이면 그는 다시 정비소로 출근할 것이다. 엘레니는 다시 훈련 센터로 갈 것이다. 지루하고 평범한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지루함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승리였다.

END—————————————————-목록으로 (클릭)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