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신뢰할 자, 배신할 자
1795년 5월 13일 밤. 자바 서부 해안, 카윈 어촌.
달빛 아래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바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공기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오두막 사이사이로 보이는 남자들의 실루엣. 그들은 손에 칼이나 창을 쥐고 있었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꼭 끌어안은 채 오두막 안으로 숨어들었다. 다들 안토니오와 소피아를 향한 시선이 달랐다. 두려움, 증오, 그리고 연민이 뒤섞인 기묘한 시선.
안토니오 데 라 크루즈는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깨는 여전히 저렸다. 총상을 입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복제 인간의 몸은 상처 재생이 더뎠다. 몸 자체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그 흉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세 개의 점 중 하나가 지워진 자국. 그것이 그가 ‘003’이라는 증거였다.
“저들이 우리를 보고 있어.”
소피아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바하이 치마자락을 정리하며 일어났다. 복제 인간인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열두 명의 무장한 남자들을 정확히 셀 수 있었다.
“알아.”
안토니오는 대답 대신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네덜란드 요새의 불빛이 반짝였다. 암스테르담 요새. 그곳에 반 데르 발크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죽어라 증오하는 그 지휘관.
오두막 문이 열렸다. 라덴 위라쿠수마가 걸어나왔다. 그는 깔끔한 원주민 귀족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밤잠을 설친 사람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들어왔나?”
라덴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들어왔다.”
안토니오가 일어나 그와 마주 섰다.
“결정했나?”
“결정하기 전에 한 가지 묻겠다.”
“말해라.”
“당신은 진짜 원주민 저항군인가, 아니면 네덜란드의 첩자인가?”
라덴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왼쪽 어깨를 만지는 것이 보였다. 안토니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거기에 점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나는 내 백성을 지키려는 자다.”
라덴이 대답했다. 그의 손가락이 옷깃을 벗겼다. 왼쪽 어깨.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도, 흉터도, 아무것도.
안토니오는 안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점이 없다는 것이 ‘원본’의 증거일까, 아니면 ‘점을 지운 복제 인간’의 증거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이 마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라덴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반 데르 발크는 우리 여자들을 강간했다. 우리 남자들을 노예로 팔아치웠다. 우리 아이들은… 실험 재료가 되었다.”
“실험?”
“복제 인간 기술. 네덜란드인들은 이미 그 기술을 손에 넣었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잡아다가… 복제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원본 아이들은 버렸다. 죽은 채로, 혹은 살아 있는 채로.”
소피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팔에는 수많은 주사 바늘 자국이 있었다. 그녀도 실험 재료였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기억을 이식당한 004호.
“반 데르 발크의 목을 가져와라.”
라덴이 선을 그었다.
“그가 죽으면, 통로를 열어주겠다. 너희를 ‘공장’까지 안내하겠다.”
“만약 거절하면?”
라덴의 눈빛이 변했다. 부드러움에서 냉혹함으로.
“그럼 너희는 이 마을을 떠날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겠다.”
그의 뒤에서 마을 사람들이 칼을 빼들었다. 열두 자루의 칼날이 달빛에 반짝였다. 그들은 안토니오와 소피아를 포위했다. 탈출구는 없었다. 바다밖에.
안토니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선택지가 스쳤다.
반 데르 발크를 암살하자. 쉽지 않다. 네덜란드 요새에는 50명의 군인이 있다. 지휘관을 죽인다고 해서 통로가 열릴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라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가 반 데르 발크의 목을 가져온 후에 “이제 너희는 필요 없다”며 칼로 찌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도망칠까. 밀림으로 뛰어든다. 배고픔과 갈증, 독사와 모기를 감수하더라도, 이 마을 사람들의 칼날보다는 낫다.
아니면 — 라덴에게 복제 인간 기술의 일부를 제안할까. 그 기술로 그가 죽은 아이들을 되살리게 해준다면? 하지만 그건 위험하다. 기술이 퍼져나가면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자신처럼, 소피아처럼, 또 다른 비극이 탄생할 것이다.
그가 소피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살아 있는 인간의 체온보다 0.5도 낮았다. 복제 인간의 증거.
“무엇을 선택하든, 나는 네 편이야.”
소피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번의 죽음을 기억 속에서 경험했다. 르메트르의 기억 속 단두대. 그것은 그녀에게 진짜 죽음보다 더 선명한 악몽이었다.
안토니오는 라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반 데르 발크의 목을 원하는 게 아니다.”
라덴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무슨 뜻이지?”
“당신은 죽은 아이들을 되살리는 기술을 원한다. 반 데르 발크를 죽이는 건… 그저 복수일 뿐이다. 하지만 진짜 원하는 건 그 너머에 있다.”
라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이 떨렸다. 그는 2년 전을 기억했다. 네덜란드인들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그의 일곱 살 난 딸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딸의 시신을 직접 땅에 묻었다. 그날 이후, 그는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움직이는 시체였다.
“내 딸을… 되살릴 수 있나?”
“가능하다.”
안토니오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녀는 원본이 아니다. 복제품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딸의 복제품일 뿐이다.”
“상관없다.”
라덴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숨을 쉬고, 움직이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소피아가 안토니오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건 위험해. 기술을 퍼뜨리는 건… 네 자신을 파멸시키는 거야.”
“알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통로야. 그리고 시간이 없어.”
안토니오는 라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내가 기술의 일부를 주겠다. 그 대가로 통로를 열어라.”
“기술이 진짜라면?”
“진짜다. 나는 그 기술로 만들어진 복제 인간이다. 내가 살아 있는 게 그 증거다.”
라덴은 잠시 침묵했다. 마을 사람들이 숨죽이며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라덴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라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통로는 우물 아래에 있다. 우물 바닥에 붉은 액체가 차 있는 곳. 그곳이 네덜란드인들이 실패한 복제품을 버리는 폐기장이다. 그곳을 지나면 공장의 뒷문으로 나갈 수 있다.”
안토니오는 기술의 핵심만 간추려 적은 종이를 라덴에게 건넸다. 라덴은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맙다. 나는… 이 빚을 갚겠다.”
“갚을 필요 없다. 그냥 우리를 통로로 안내해라.”
라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그들이 우물로 걸어갈 때, 소피아가 안토니오에게 속삭였다.
“라덴을 믿어도 될까?”
“몰라. 하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우물은 마을 중앙에 있었다. 돌로 쌓은 낡은 우물. 그런데 우물 안에서는 물 냄새가 아니라, 쇠 냄새와 부패한 내음이 올라왔다. 소피아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게 뭐지?”
우물 바닥에는 붉은 액체가 차 있었다. 마치 피처럼. 그 액체 속에는 여러 개의 형체가 떠 있었다. 인간의 형체. 작은 것도 있었고, 큰 것도 있었다. 모두 실패한 복제품들.
안토니오는 우물 가장자리에 앉아 다리를 걸쳤다.
“내려가자.”
“이 액체가 뭔지 알아?”
“네덜란드인들이 복제 인간을 만들 때 쓰는 용액. 영양분이랑 성장 촉진제, 그리고 기억을 전달하는 화학 물질이 섞여 있어.”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실패작.”
안토니오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그는 자신도 실패작이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003호. 세 번째 시도에서야 성공한 복제품. 001과 002는 죽었다.
소피아도 뒤따라 우물 안으로 내려갔다. 붉은 액체가 그녀의 바하이 치마를 적셨다. 액체는 따뜻했다. 마치 살아 있는 조직처럼.
“이 액체… 움직이고 있어.”
“그래. 아직 살아 있어. 영양분이 공급되면 또 다른 복제품으로 자랄 수도 있어.”
안토니오가 우물 바닥에 있는 작은 철문을 발견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녹슨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그 아래로는 좁은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통로 벽에는 붉은 액체가 흐르고 있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톡, 톡, 톡. 시계추 소리처럼 규칙적이었다.
“공장이 이 통로 끝에 있어?”
“라덴이 그렇게 말했어.”
“라덴을 믿어?”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갈 곳은 여기뿐이야.”
그들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은 액체가 철창 바닥을 적셨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벽 너머에서. 아니면 천장 위에서.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 신음 소리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섞인 것이었다.
“저 소리…”
“듣지 마. 그냥 걸어.”
안토니오가 앞장섰다. 그의 등 뒤에서 소피아가 따라왔다. 그녀는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걸었다. 벽은 미끄러웠다. 붉은 액체 때문에.
30분을 걸었을까. 통로가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천장이 높아지고, 바닥의 액체도 얕아졌다. 마침내 그들은 커다란 철문 앞에 도착했다. 철문에는 프랑스어로 뭔가 쓰여 있었다.
안토니오가 그 글자를 읽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러나 희망을 버리는 순간, 너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들어갈 거야?”
소피아가 물었다.
“응. 희망을 버리러.”
안토니오가 철문을 밀었다. 철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철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은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형광석이 빛나고 있었고, 바닥에는 수백 개의 유리관(琉璃管)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각 유리관 안에는 인간의 형체가 떠 있었다. 어떤 것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어떤 것은 아직 팔이나 다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은 기형이었다.
“이게… 공장?”
소피아가 중얼거렸다.
“응. 네덜란드인들이 복제 인간을 만드는 공장. 그리고 아마도… 림 시옹이 장악하려는 그곳.”
안토니오는 유리관 사이로 걸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유리관 안의 복제품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그러나 가슴은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숨 쉬고 있었다.
그때.
“003. 드디어 왔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오와 소피아가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 반 데르 발크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안토니오와 똑같았다.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왼쪽 어깨에 세 개의 점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 005.
“네가 반 데르 발크야?”
“응. 나는 005.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휘관이자, 이 공장의 관리자.”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라덴이 나를 죽이러 왔다고 들었어. 그런데 네가 선택한 건 기술을 주는 거였지. 흥미롭군. 왜 그런 선택을 했지?”
“암살보다는… 덜 위험해 보여서.”
“덜 위험하다고?”
반 데르 발크가 비웃었다.
“너는 기술을 퍼뜨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라덴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준 기술로 자기 딸을 되살리려고 할 거야. 그런데 그 기술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나? 네가 준 건 핵심만 간추린 거지. 그게 실패하면? 라덴의 딸은 괴물이 될 거야.”
안토니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네가 감수해야 할 일이지. 네가 선택한 길이니까.”
반 데르 발크가 권총을 들어 안토니오의 이마를 겨누었다.
“이제 선택은 끝났다. 너는 003. 나는 005. 우리는 같은 존재야. 그런데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 걸까? 나와 함께 네덜란드에 협력하지 않겠나? 그러면 너도 안전하고, 소피아도 안전하다.”
소피아가 앞으로 나서려 했다. 안토니오가 그녀를 막았다.
“거부한다.”
안토니오의 대답은 짧았다.
“그럼… 죽어.”
반 데르 발크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울렸다.
그러나 총알은 안토니오를 맞히지 않았다. 누군가가 반 데르 발크의 팔을 쳤기 때문이었다. 라덴이었다.
“뒤따라왔어.”
라덴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네가… 왜?”
안토니오가 물었다.
“내가 빚을 갚겠다고 했잖아. 그게 지금이야.”
라덴이 반 데르 발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반 데르 발크는 뒤로 물러서며 다시 총을 겨누었다.
“이 미친 원주민이!”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라덴의 어깨에 총알이 박혔다.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도망쳐! 내가 막을게!”
안토니오는 잠시 망설였다. 소피아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여기서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해!”
그들은 유리관 사이로 뛰어들었다. 뒤에서는 칼 부딪치는 소리와 총성이 계속해서 울렸다. 라덴의 비명. 반 데르 발크의 고함.
그리고 — 갑자기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안토니오와 소피아는 공장 반대편 출구로 나왔다. 그곳은 지상이었다. 밀림. 공기에는 비 냄새와 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라덴은?”
소피아가 물었다.
“몰라.”
안토니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암살을 거부하고, 기술을 퍼뜨렸다. 그 대가로 라덴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신과 소피아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앞으로 가자.”
안토니오가 말했다.
“공장은 우리 뒤에 있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지옥을 끝내는 거야.”
그들은 밀림 속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뒤에는 불타오르는 공장이 있었다. 라덴이 뭔가를 저질렀다. 폭발. 화재. 연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당신의 선택은? (1차 분기점)
안토니오의 선택은?
[선택 1] “좋다. 내가 반 데르 발크의 목을 가져오겠다.”
[선택 2]“당신이 원하는 건 반 데르 발크의 목이 아니라, 죽은 아이들을 되살리는 기술이다. 내가 그 기술의 일부를 주겠다.”
(※ 선택하신 분기점의 다음 화를 결제하시면,안토니오의 잔혹한 운명의 대단원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