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그림자 필리핀편 #001] Sigue-Sigue 사기극 – 2화: 「복제의 밤」

2화: 「복제의 밤」

*1795년 4월 13일, 마닐라 투손 지역, 라 크루즈-가르시아 무역상사 지하실 — 그로부터 24시간 후*

안토니오 데 라 크루즈(003)의 왼쪽 어깨는 붕대로 감겼다. 총상을 입었지만, 림 시옹의 개인 의사가 긴급 처치했다. 총알은 어깨뼈를 스쳐 지나갔고, 세 개의 점 중 하나는 지워졌다. 정확히는 ‘003’의 마지막 숫자 ‘3’이 파괴되었다.

“이제 너는 00이야.”

소피아 데 라 크루즈가 비꼬듯 말했다.

“0은 시작이자 끝. 무한성을 상징하지. 복제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숫자야.”

안토니오는 대답 대신 일어나 벽에 걸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미겔 데 로스 산토스’라는 이름의, 형과 닮은 얼굴. 그는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진짜 내 형이 아니라고 했잖아.”

“저 사람은… 너의 형의 기억을 이식받은 필리핀 원주민이야.”

림 시옹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지하실 중앙의 탁자 위에 낡은 지도를 펼치고 있었다. 지도는 자바 섬의 서부, 바타비아 항구 인근을 상세히 그린 것이었다.

“‘프로젝트 미러(Mirror)’의 첫 번째 실험체. 스페인 신부가 유럽에서 들여온 ‘망명 귀족의 기억 샘플’을 현지인에게 이식했어. 그런데 결과는… 재앙이었지. 이식받은 원주민은 귀족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일으켜, 결국 자살했어.”

“그래서 저 그림은… 기념 초상화?”

“아니. 경고야.” 림 시옹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기억 이식만으로는 인간을 복제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해. 육체 자체를 복제하는 것. 그리고 지금, 그게 가능해졌어.”

그가 탁자 아래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유리병 하나. 그 안에 든 것은… 투명한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조직 조각.

“이게 뭐지?”

“너의 피부 조직이야. 어젯밤 네가 총을 쏘고 튄 피를 내가 수거했지. 이걸로 우리는… ‘너의 복제품’을 만들 수 있어.”

안토니오는 선택해야 했다.

림 시옹은 그에게 두 가지 항로를 제시했다.

항로 A: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로 직행
“가장 빠르다. 2주일이면 도착. 하지만 영국 해군의 초계선이 자바해를 돌아다니고 있어. 위험하다.”

항로 B: 보르네오(칼리만탄) 경유
“안전하다. 대신 6주일 걸린다. 그 사이에 ‘공장’에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안토니오는 항로 B를 선택했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더 오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을 그는 며칠 뒤 깨닫게 된다.

1795년 4월 20일, 마닐라만, 무역선 ‘라 호네스타 호’

배는 항구를 떠났다. 안토니오와 소피아, 그리고 림 시옹의 심복 셋. 파드레 이그나시오와 린 펑, 디와타 마카파갈은 마닐라에 남았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복제 인간 기술’의 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 안에서, 안토니오는 소피아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왜 ‘004’인지 알아?”

“네가 네 번째 복제품이라서?”

“아니. 내가 ‘네 번째 시도’의 결과물이라서. 001은 네 형. 002는… 네 어머니야.”

안토니오의 숨이 멎었다.

*“네 어머니, 마리-안투아네트 드 라클로(가명)는 1792년에 죽지 않았어. 그녀는 프랑스를 떠나 필리핀으로 왔고, 여기서 복제 실험의 피험자가 되었지. 그런데 실패했어. 그녀의 복제품(002)은 원본의 기억을 이식받은 후 48시간 만에 심장 마비로 죽었어. 원본인 네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죽었지.”*

“그럼 나는?”

“너는 003. ‘완전한 복제’의 첫 번째 성공 사례. 너는 원본 없이 태어났어. 즉, 너는 누군가의 복제품이 아니라… ‘기억만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인공 인간’이야.”

안토니오는 배의 난간을 붙잡았다. 파도가 거칠었다. 마닐라만의 물은 검푸르렀다.

“그럼 소피아, 너는?”

“나는 004. ‘여성 버전의 복제 인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너와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어.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나는 제작자의 기억을 이식받았다는 거야.”

“제작자?”

“응. ‘그림자 기술’을 동남아로 가져온 그 사람. 프랑스 귀족이자 과학자, 연금술사, 그리고 사기꾼. 이름은… 피에르 르메트르.”

낯선 이름이었다. 프랑스편에서 등장하지 않은 인물.

소피아는 말을 이었다.

“르메트르는 1793년, 프랑스 혁명 중에 죽었어. 단두대에서. 그런데 그의 제자인 누군가가 그의 기억을 추출해서, 나에게 이식했지. 그래서 나는 르메트르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복제 인간 제조 기술, 기억 이식 방법, 그리고… ‘진짜 시구르’의 의미.”

“진짜 시구르?”

“Sigue-Sigue. 필리핀 아이들이 하는 숨바꼭질 놀이에서 유래한 말이야. 술래가 ‘시구르!’(따라와!) 외치면, 다른 아이들이 뒤쫓아. 그런데 절대 잡히지 않는 술래가 있어. 그 술래가 바로 ‘그림자’야. 따라잡을 수 없는 환상. 영원히 앞서가는 목표. 그게 바로… 우리의 운명이야.”

1795년 5월 2일, 보르네오 서부, 폰티아나크 항구

배는 폰티아나크에 정박했다. 보르네오는 말레이 해적과 영국, 네덜란드 세력이 뒤얽힌 혼란의 땅. 안토니오 일행은 항구 근처의 낡은 창고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창고 문을 두드린 것은 한 중국인 노인. 흰 수염에 낡은 청포(靑袍),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 그는 말레이어와 중국어, 그리고 깨진 스페인어를 섞어 말했다.

“당신들… ‘그림자’를 찾는 사람들이지? 나도 찾고 있어. 30년 동안.”

노인의 이름은 ‘리웨이’(李威). 복제 인간의 선구자? 아니, 그는 말했다.

“나는 ‘원본’이야. 복제 인간 기술에 사용된 최초의 ‘기억 샘플’을 제공한 사람. 내 기억은 도둑맞았어. 프랑스인들이… 피에르 르메트르 일당이. 1760년대에.”

그는 옷깃을 열어 자신의 왼쪽 어깨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세 개의 점. 안토니오와 똑같은 패턴.

“이게 뭐지?” 안토니오가 물었다.

“‘원본’의 표시야. 나는 복제 인간이 아니야. 그런데 내 기억이 도둑맞아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복제 인간들은… 내 기억의 변종들이야. 즉, 너희는 모두… 나의 분신(分身)이야.”

소피아가 경계하며 말했다.

“거짓말. 나는 르메트르의 기억을 이식받았어.”

“르메트르도 내 기억의 복제품이야. 그도 복제 인간이었어.”

리웨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창고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이 간 틈 사이에서 무언가 빛이 났다. 푸른 빛.

“이게 ‘진정한 그림자 기술’이야. 너희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자바의 ‘공장’은 사실… 거대한 기억 추출 장치야. 거기서 복제 인간들을 양산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원본 인간들의 기억을 빨아들여 복제 인간들에게 나눠주는’ 시스템이 가동 중이야.”

안토니오는 이해했다.

“그럼… 내 기억은 가짜가 아니라, 누군가의 진짜 기억을 이식받은 거였어?”

“맞아. 너는 ‘리웨이’의 기억 중 일부 + ‘마리-조제프 드 라클로’의 기억 중 일부 + ‘피에르 르메트르’의 기억 중 일부… 이렇게 세 명의 기억을 섞어 만든 ‘키메라(Chimera)’야.”

그리고 리웨이는 결정적인 말을 했다.

“그리고 지금, 자바의 공장에서는… ‘복제 인간의 복제 인간’을 만들고 있어. 무한 복제. 기억이 희석될수록 인간성은 사라지고, 순종적인 노예만 남아. 그게 ‘림 시옹’의 진짜 계획이야.”

안토니오는 즉시 림 시옹을 찾았다. 그러나 림 시옹은 배에 없었다. 그는 폰티아나크에서 안토니오 일행과 따로 움직이기로 했고, 지금은 행방불명.

소피아가 말했다.

“림 시옹을 믿었어? 그는 중국 상인일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스파이야. 그는 복제 인간 기술을 네덜란드에 팔 계획이었어.”

“그럼 왜 나를 자바로 데려가려 한 거지?”

“네가 ‘003’이기 때문이야. 최초의 성공 사례. 네 몸에는 완벽한 복제 코드가 담겨 있어. 네덜란드인들은 네 몸을 해부해서 그 코드를 추출하려는 거야.”

그때, 항구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안토니오가 창문 밖을 보니, 네덜란드 군인들이 항구를 포위하고 있었다.

“도망쳐!” 리웨이가 외쳤다. “나는 늙었어. 여기서 막을게. 너희는 자바로 가. 공장을 파괴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전 세계가 복제 인간의 노예가 될 거야.”

안토니오와 소피아는 창고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보르네오의 밀림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는 총성과 비명, 그리고 리웨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구르! 시구르! 그림자는 따라잡을 수 없어—!”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졌다.

안토니오와 소피아는 밀림에서 사흘을 헤맸다. 먹을 것은 거의 없었고, 모기에 물렸으며, 말레이 해적들의 영토를 지나쳐야 했다.

셋째 날 밤, 그들은 버려진 사원 하나를 발견했다. 힌두-자바 양식의 오래된 건축물. 벽에는 낡은 벽화가 있었다. 어떤 장면들이었을까?

  1. 인간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는 장면 → ‘기억 이식’의 은유?

  2. 여러 명의 똑같은 얼굴을 가진 군대가 행진하는 장면 → ‘복제 인간 군대’의 예언?

  3. 한 왕이 자신의 복제품을 참수하는 장면 → ‘원본과 복제의 갈등’?

소피아가 말했다.

“이건… 르메트르의 기억 속에 있던 장면이야. 그는 이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어. 그런데 그때 벌써 이 벽화는 낡아 있었지. 즉, ‘복제 인간’이라는 개념은 유럽인이 아니라… 이 땅에 원래 존재했던 것일지도 몰라.”

안토니오는 벽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찾는 건… 정체성이 아니야. 우리가 찾는 건… ‘자유 의지’야. 복제 인간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 그게 이번 시리즈의 진짜 질문이야.”

그는 일어나서 말했다.

“자바로 가자. 공장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공장을 ‘내 것’으로 만들 거야.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복제품이 아니야. 나는 안토니오 데 라 크루즈. 그리고 나는… 선택한다.”

소피아가 미소 지었다.

“드디어 각성했구나. 그런데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나도 선택할 거야. 우리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 ‘그림자 제국’이 아니라, ‘복제 인간의 공화국’을.”

그들은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사원 천장에 있던 돌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그 안에는 작은 금속 판. 거기에는 프랑스어로 쓰여 있었다.

*“누구든 이 금속 판을 발견한 자는… ‘진짜 시구르’의 소유자가 된다. 시구르는 따라잡을 수 없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도망치는 자’를 뜻한다. 즉, 진정한 자유는 ‘영원히 선택하는 것’에 있다. – 피에르 르메트르, 1790년”*

1795년 5월 10일, 보르네오 남부 해안, 어촌

안토니오와 소피아는 현지 어부의 도움으로 작은 배를 구했다. 자바로 가는 마지막 항해. 그들은 앞으로 3일이면 바타비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는 또 다른 승객이 있었다.

한 젊은 필리핀 여성.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귀는 남들보다 뛰어났다.

“당신들의 심장 소리가 들려요.” 그녀가 말했다. “하나는… 원본의 심장. 하나는… 복제품의 심장. 그런데 신기하게도, 둘 다 같은 속도로 뛰고 있어요.”

안토니오가 물었다.

“어느 쪽이 원본이고, 어느 쪽이 복제품인지 구분할 수 있어요?”

“몰라요. 그리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둘 다 살아 있다는 거죠.”

소피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름이 뭐예요?”

“마리야.”

“마리야… 우리와 함께 자바에 갈래?”

“저는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당신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당신들이 가져올 ‘새로운 세상’의 소식을 들려주세요.”

배는 떠났다. 마리야의 모습은 점점 작아져 갔다.

안토니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십자성이 반짝였다.

“소피아, 우리가 성공한다면… 그 후엔 뭘 할 거야?”

“글쎄… 아마 또 다른 ‘시구르’를 시작하지 않을까? 사기(Scheme)는 끝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게… 우리의 자유야. 영원히 도망치는 자. 따라잡히지 않는 환상. 그게 우리야.”

그들은 침묵했다. 파도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안토니오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복제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원본으로 죽겠다. 그게 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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