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굴복의 사슬과 포식자의 연대기
나타샤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루슬란이 전송한 리스트를 확인했다. 화면 속 이름들은 그녀가 지난 20년간 쌓아온 우정의 증거들이었다. 그녀는 그 리스트를 보며 자신의 존엄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루슬란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답장이 늦는군. 내 인내심은 네가 누리는 그 안락함보다 짧다.’ 나타샤는 자신의 미래, 즉 외교관인 아버지의 정치적 지위와 그녀가 가진 화려한 삶을 지키기 위해 결국 리스트에 적힌 첫 번째 타깃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된 포식자의 대리인이었다. 나타샤는 자신이 엘레나와 소피아에게 했던 방식과 똑같은 기만술을 펼쳤다. 이번 타깃은 대학 내에서 가장 똑똑하고 냉철하기로 유명한 동기, ‘마리나’였다. 나타샤는 마리나에게 접근하며 웃음을 지었지만, 그녀의 내면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그녀는 마리나가 좋아하는 취미와 그녀의 고민을 완벽하게 파악해 덫을 짰다. 이는 범죄라기보다 고도의 심리적 사냥이었다. 나타샤는 마리나에게 고급 와인 파티를 제안하며, 그곳이 사실은 마리나를 파멸로 몰아넣을 도살장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 그녀의 사과는 가짜였고, 친절은 치밀하게 계산된 독극물이었다.
파티 당일, 마리나는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샤의 차에 올랐다. 차 안을 감도는 비릿한 공기는 나타샤가 마시는 호흡보다 무거웠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루슬란이 운영하는 또 다른 비밀 별장이었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도덕적 관념을 완전히 배제한 비열함의 결정체였다. 루슬란과 그 일당들은 마리나를 마치 길 잃은 어린 사슴처럼 몰아세웠다. 그들은 마리나를 물리적으로 구속하기 전, 그녀의 자존감을 먼저 짓밟았다. 마리나가 가지고 있던 지적 우월감을 훼손하기 위해 그녀가 쓴 논문 자료를 해킹해 조롱하고, 그녀의 부모님이 모스크바 외곽에서 작은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그녀를 ‘계급 상승을 꿈꾸는 천박한 야심가’로 몰아세웠다.
마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그 저항은 루슬란의 일당에게 더 큰 유희를 제공할 뿐이었다. 그들은 마리나를 결박한 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안경을 짓밟고 그녀의 옷을 찢어 발겼다. 이 과정은 짧고 강렬한 액션이 아니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집요한 심리적, 육체적 구속이었다. 루슬란은 마리나의 얼굴을 카메라 앞에 고정시키고 그녀에게 자신의 치부를 강제로 발설하게 만들었다. 이는 마리나라는 인간의 인격을 지우고, 그 위에 ‘성착취물’이라는 화폐적 가치를 씌우는 과정이었다. 나타샤는 지켜보았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마리나의 비명이 잦아들 때까지, 마치 건조한 보고서를 작성하듯 그 모든 광경을 카메라로 녹화했다.
사건이 끝난 뒤, 루슬란은 나타샤를 불러 마리나의 영상을 검수하게 했다. 영상 속에서 마리나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엄을 잃고 루슬란의 발치에서 애원하고 있었다. 루슬란은 나타샤에게 물었다. “어떠냐? 그녀의 절망이 네 우정보다 값지지 않나?” 나타샤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슬란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치며, “네가 도망칠 길은 없다. 넌 이미 우리와 같은 짐승이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이것은 완벽한 가스라이팅이었다. 루슬란은 나타샤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할 논리를 제공했다. ‘사회적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이 세계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곳이다’. 나타샤는 이 끔찍한 논리를 내면화하며 점점 죄책감을 마비시켜 나갔다. 그녀는 더 이상 마리나의 눈물을 보며 슬퍼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얼마나 영상 속에서 잘 연기했는지, 가격이 얼마까지 올라갈지를 계산했다. 인간이 스스로 괴물이 되는 과정은 이토록 건조하고 잔혹했다.
이제 나타샤는 캠퍼스 내에서 ‘얼음의 여왕’이라 불리며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이제 루슬란의 파트너로서, 누가 누구에게 사채를 빌렸는지, 누가 다음 사냥감으로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의 삶은 이전보다 더 화려해졌다. 루슬란이 주는 배당금으로 그녀는 모스크바 시내의 최고급 펜트하우스를 구입했고, 아버지는 그녀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붕괴 직전의 사상누각이었다.
어느 날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리나와 마주쳤다. 마리나는 학교를 자퇴하고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녀가 멍한 눈으로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타샤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리나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더러운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타샤는 그 모습을 보며 차 안에서 차갑게 웃었다. “정말 볼품없군.” 그녀의 말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불쾌한 방해물에 대한 혐오감만이 존재했다.
나타샤는 펜트하우스로 돌아와 루슬란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다음 타깃 설정 완료.’ 이제 그녀에게 친구라는 단어는 오직 ‘매물’ 혹은 ‘사냥감’을 지칭하는 용어일 뿐이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화려한 드레스를 점검했다. 완벽한 상류층 여대생, 그러나 그 안은 텅 비어버린 껍데기. 그녀는 루슬란의 시스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루슬란은 나타샤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네 아버지의 외교부 기밀을 빼내라. 그러면 네 빚은 영원히 탕감된다.’ 이것은 범죄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 반역이었다. 하지만 나타샤는 망설임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경매장에 나와 있었고, 그녀가 사고 파는 것은 타인의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남은 생명이었다. 그녀는 딥웹의 어둠 속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이제 그녀 앞에 놓인 길은 파멸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 파멸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차가운 밤이 그녀를 조롱하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