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분필 대신 쥐어진 핏빛 청구서 (실제 사건 파일 기반 각색)
시드니 서부 외곽의 파라마타(Parramatta) 공립 고등학교. 34세의 역사 교사 엘레나 매카시(Elena McCarthy)는 지역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신뢰받는 교육자 중 한 명이었다. 언제나 칼같이 다려진 블라우스와 단정한 정장 바지, 흐트러짐 없는 단발머리는 그녀의 철저한 자기관리를 대변했다. 학교에서는 까다로운 역사를 가장 흥미롭게 가르치는 교사로 통했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문제아들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헌신적인 멘토로 존경받았다. 매달 교외에 마련한 아담한 2층짜리 타운하우스의 대출 원리금을 꼬박꼬박 상환하고, 남은 돈으로 은퇴 연금을 적립하는 그녀의 삶은 호주 중산층이 꿈꾸는 가장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궤도 위에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흠집 하나 없어 보이는 단단한 도자기일수록, 아주 미세한 실금 하나로 인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는 법이다. 엘레나의 완벽했던 삶에 실금을 낸 것은, 지독한 업무 스트레스 끝에 우연히 발을 들인 집 근처 RSL 클럽(호주 재향군인회 클럽) 구석에서 번쩍이던 ‘포키스(Pokies, 호주식 슬롯머신)’의 잔인한 네온사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쏟아지는 행정 업무와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으로 가득 찬 머리를 식히기 위한 가벼운 탈출구에 불과했다. 금요일 퇴근길, 차가운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기계에 집어넣은 20달러짜리 지폐 한 장. 그것이 지옥의 시작이었다. 화면 속 알록달록한 심볼들이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회전하다가 잭팟을 알리는 요란한 벨 소리를 터뜨렸을 때, 엘레나의 뇌 속에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도파민이 휘몰아쳤다. 단돈 몇 달러가 순식간에 수백 달러의 현금 다발로 변하는 기적을 맛본 순간, 그녀가 수년 동안 쌓아 올린 이성과 도덕성은 단숨에 마비되었다. 기계가 뿜어내는 최면적인 불빛과 릴이 돌아가는 순간의 숨 막히는 긴장감은 일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증발시키는 독약이었다. 오락은 순식간에 통제 불능의 중독으로 변이했다. 매주 금요일이던 클럽 방문은 매일 밤으로 늘어났고, 서서히 그녀의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석 장이 차례로 한도 초과로 정지되고, 은행으로부터 대출금 연체 독촉 서류가 날아들기 시작했을 때도 엘레나는 멈추지 못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크게 터지면 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그것은 파멸을 향해 폭주하는 모든 중독자가 파놓는 가장 깊은 무덤의 독백이었다.
결국 비극은 그녀가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만들었다. 엘레나는 학교에서 가을 학기 대규모 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학부모들로부터 현금으로 수거해 보관 중이던 기금 1만 5천 달러에 손을 대고 말았다. “월요일 아침 결산 전까지 무조건 채워놓으면 돼. 주말 동안 포키스에서 승부를 본다.” 거센 비가 쏟아지던 토요일 밤, 그녀는 광기에 찬 눈으로 클럽 구석의 기계 앞에 앉았다. 하지만 기계는 자비가 없었다. 100달러짜리 신권 지폐들이 차가운 기계 슬롯 속으로 마술처럼 빨려 들어갔고, 새벽 3시 클럽의 마감 불빛이 켜졌을 때 엘레나의 손에 남은 것은 단 1달러도 없었다. 학부모들의 피땀 어린 돈 1만 5천 달러가 단 몇 시간 만에 허공으로 증발한 것이다. 극도의 공포와 절망감이 해일처럼 몰려와 척추를 짓눌렀다. 월요일 아침이면 횡령 사실이 발각될 것이고, 교사 자격 박탈은 물론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텅 빈 도박장 한가운데서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등 뒤로, 묵직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공립학교 선생이 주말마다 여기서 인생을 배팅하고 계셨군. 오늘 밤은 운이 아주 나쁜 모양이야, 안 그래?”
가죽 재킷 위로 기괴하게 뒤엉킨 해골과 구렁이 문신, 피비린내 나는 호주 지하 세계를 장악한 악명 높은 무장 모터사이클 갱단(Bikie), ‘블러드 하운드’ 산하의 추심업자 믹(Mick)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엘레나의 신상정보는 그녀의 심장을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지옥문의 빗장을 푸는 악마의 첫인사였다.
믹은 사시나무 떨듯 떠는 엘레나의 맞은편 의자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잔인한 포식자가 사냥감을 완전히 구석으로 몰아넣었을 때 짓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선생, 너무 겁먹지 마. 난 자비로운 사람이야. 은행처럼 까다로운 신용조회나 소득 증빙 같은 건 요구 안 해. 당장 월요일 아침에 학교 통장에 채워 넣어야 할 돈이 필요한 거잖아? 우리가 깔끔하게 해결해 줄 수 있지.”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부드럽고 다정하게 들렸다. 당장 감옥으로 끌려가 인생이 매장당할 위기에 처한 엘레나의 눈에는, 믹의 양팔에 새겨진 갱단 문신보다 그가 제시한 현금 2만 달러라는 숫자가 더 먼저 들어왔다. 공포에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던 이성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믹이 건넨 명함을 움켜쥐었다.
다음 날 일요일 오후, 시드니 외곽의 외진 산업단지 공터. 검은색 홀덴 코모도어(Holden Commodore) 차량의 짙은 선팅 창문 너머 뒷좌석에서 밀회가 이루어졌다. 엘레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믹이 내민 사채 계약서에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이어나갔다. 원금은 당장 급전을 메울 2만 달러였다. 하지만 계약서 뒷면에 인간의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인쇄된 독소 조항들은 악마의 계약 그 자체였다. 연체 시 주당 50%에 달하는 살인적인 복리 이자, 그리고 채권자가 임의로 지정하는 ‘추심 방식’에 무조건 동의한다는 문구. 믹은 엘레나의 운전면허증과 여권을 가차 없이 빼앗아 가죽 가방에 넣으며 낮게 읊조렸다. “매주 금요일 밤 9시까지, 이자 5천 달러를 들고 지정된 장소로 와야 해. 단 1분이라도 늦으면 우리가 직접 학교나 집으로 찾아갈 테니까. 선생이라는 고상한 신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신용을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일요일 저녁, 엘레나의 계좌로 약속된 돈이 입금되었고, 그녀는 월요일 아침 눈물겨운 심정으로 학교 기금을 채워 넣어 파멸을 면했다. 주위 교사들과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엘레나는 자신이 위기를 극복했다고 착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은 덫에 발목이 완전히 잘려 나가기 직전, 사냥꾼이 허락한 짧고 잔인한 유예기간에 불과했다. 첫째 주와 둘째 주에는 그녀의 주급 전액과 비상금까지 영혼까지 끌어모아 이자를 감당해 냈다. 하지만 셋째 주가 되자 주택 담보 대출 이자와 각종 공과금이 겹치면서 수중의 돈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약속된 금요일 밤, 엘레나는 이자를 지불하지 못했다. 단 하루의 연체. 그것은 친절한 구원자의 가면을 쓰고 있던 사냥꾼이 굶주린 야수의 본색을 드러내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월요일 저녁, 폭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엘레나는 거실에서 공포에 질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순간, 와장창!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거실 통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며 거대한 물체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 온 거실에 비산하는 가운데, 카펫 위로 구른 것은 사설 도축장에서 막 잘려 나간 듯한 피비린내 나는 돼지 대가리였다. 잘린 목 단면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와 엘레나가 아끼던 하얀색 카펫을 더럽혔고, 돼지의 이마에는 칼로 조잡하게 파낸 글씨로 ‘TICK TOCK (째깍째깍)’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도망친 엘레나의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울려 댔다. 발신자 제한 표시. 수화기를 들자마자 믹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찢었다.
“하루 늦을 때마다 원금에 페널티가 복리로 붙는다고 경고했지? 네가 약속을 어긴 대가로 이제 빚은 6만 달러로 불어났다. 감당이 안 돼?” 믹은 광기 어린 비웃음을 흘렸다.
“경찰에 신고하고 싶으면 해봐. 네가 학부모 돈 훔쳐서 도박장에 처박았던 장부와 CCTV 원본, 그리고 사채 계약서까지 전부 교육청과 언론사에 제보해 줄 테니까. 네가 평생 쌓아 올린 명예와 교사 자격증이 단 몇 분 만에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꼴을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짭새들을 불러보라고. 아, 그리고 네 반에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찰리라는 꼬마 있지? 걔 집 주소가 파라마타 3번가 맞지? 하교할 때 덤프트럭 조심하라고 해. 요즘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들이 많거든.”
그 순간 엘레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단순히 돈을 빌린 것이 아니라, 출구도 법의 보호도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악의 구렁텅이에 온몸이 묶여버렸다는 것을. 호주의 무장 갱단(Bikie)들은 공권력조차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초법적인 폭력 집단이었다. 그들은 이미 파라마타 지역 경찰의 일부 부패한 경관들과 유착되어 있었고, 평범한 시민 한 명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육체적으로 도륙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엘레나는 산산조각 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존엄했던 인간 엘레나의 영혼은 피를 흘리는 돼지 대가리와 함께 철저히 짓밟히고 있었다.
그날 밤의 경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블러드 하운드’ 조직원들은 이제 대낮에도 엘레나의 일상을 잔인하게 유린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진행 중인 교실 창문 너머로 육중한 할리 데이비드슨 오토바이를 몰고 온 문신투성이 사내들이 기분 나쁜 배기음을 울려 대며 그녀를 노려보았고, 퇴근길에는 검은색 SUV 두 대가 그녀의 소형차를 앞뒤로 바짝 압박하며 피 말리는 공포를 선사했다. 한 달 만에 이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10만 달러에 육박했다. 엘레나는 타운하우스를 매각해 빚을 갚으려 했으나, 믹은 이미 위조된 서류를 이용해 그녀의 주택에 3중으로 저당을 잡아 법적으로 꼼짝도 할 수 없게 손발을 묶어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지옥의 가장 깊은 밑바닥이 열린 것은 어느 비바람이 몰아치던 목요일 밤이었다. 믹과 그의 부하인 거구의 조직원 두 명이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엘레나의 집 현관문을 거칠게 걷어차며 들어왔다. 엘레나는 공포에 질려 침실 구석으로 도망쳤지만, 사내들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거실로 가차 없이 끌고 나왔다. 거실 소파에 거만하게 주저앉은 믹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엘레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선생,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성의를 표시하고 이자를 까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오늘 밤은 우리 애들이 직접 수금을 하러 왔어.” 믹의 잔인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명의 문신투성이 사내들이 엘레나를 가차 없이 낚아채 거실 카펫 위로 내팽개쳤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돈은 어떻게든 갚을게요! 제발!”
엘레나가 절규하며 발버둥 쳤지만, 사내들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블라우스를 난폭하게 찢어발겼다. 단정한 역사 교사로서 그녀가 지녀온 모든 인간적 존엄성과 수치심이 그 자리에서 무참히 짓밟혔다. 사내들은 빚 상환의 대가라는 명목하에 틈만 나면 그녀의 집을 침범해 가학적이고 잔인하게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고 성적으로 유착된 폭력을 일삼았다. 진저리치며 온몸을 떨고 구토를 하면서도, 학교의 아이들과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잡은 야수들의 요구를 엘레나는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매번 가해지는 유린의 흔적은 그녀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 깊숙한 곳까지 회복 불가능한 흉터를 남겼다. 그러나 믹의 진짜 목적은 그녀의 육체를 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자포자기하고 심리적으로 노예화되었음을 확신한 믹은, 큼지막한 군용 더플백 여러 개를 거실에 쏟아놓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수십 개의 유리 플라스크와 화학 약품 통, 그리고 고무 호스들이었다.
“자, 엘레나 선생님. 오늘부터 여기가 선생의 새로운 교실이야. 과목은 화학이지.” 믹은 방독면 한 개를 엘레나의 멍한 얼굴 앞에 던지며 비릿하게 웃었다.
“교사라는 완벽한 신분 덕분에 네 집은 경찰의 마약 단속반이 절대 의심하지 않을 최고의 위장막이거든. 우리가 알려주는 배합 비율대로 이 약품들을 끓이고 젓기만 해. 호주 전역으로 나갈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이야. 만약 수율이 떨어지거나 약을 태워 먹으면, 그 대가로 오늘 밤 네가 치러야 할 이자가 얼마나 더 가혹하고 끔찍해질지 기대해도 좋아.”
그날 이후 엘레나의 삶은 완벽한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긴 소매 옷과 짙은 파운데이션으로 온몸의 멍 자국과 화학 화상 자국을 필사적으로 감춘 채,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호주의 역사를 가르치며 위태로운 가면을 썼다. 그리고 밤이 되면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와 독성 가스가 가득한 거실에서 방독면을 쓴 채, 조직원들의 감시 속에 필로폰을 끓여 대는 마약 제조 노예로 전락하는 잔인한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강제적인 육체적 유린과 지독한 가스 흡입, 극도의 수면 부족으로 인해 그녀의 이성과 육체는 서서히 부서져 갔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존경받던 교사가 아니었다. 눈은 휑하게 꺼졌고, 피부는 마약 가스독으로 인해 붉은 발진과 진물이 가득했다.
학교의 동료 교사들이 그녀의 피폐해진 안색과 급격히 줄어든 체중을 걱정하며 다가올 때마다, 엘레나는 행여 자신의 끔찍한 비밀과 몸에서 배어 나오는 쾌쾌한 화학 약품 냄새가 들킬까 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이제 ‘블러드 하운드’가 마음대로 유린하고 버리는 고기 방패이자, 살아있는 범죄 공장일 뿐이었다. 믹은 매번 제조된 마약의 가치를 터무니없이 깎아내리며 그녀의 빚이 여전히 10만 달러에 묶여 있다고 협박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끈적하고 더러운 절망의 늪 속에서, 멍하니 화공약품을 젓던 엘레나의 시선이 주방 조리대 구석에 숨겨둔 날카로운 식칼로 향했다. 이대로 짐승들의 노리개이자 쓰레기로 파멸하며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 지옥 같은 목줄을 쥐고 있는 놈들의 심장을 향해 마지막 반항의 칼날을 겨눌 것인가. 기어이 눈물이 말라붙은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핏빛 광기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