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핏빛의 질주, 찢겨 나간 장막
인간의 육체는 공포 앞에 얼어붙기도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쥐가 포식자의 눈을 물어뜯듯 찰나의 독기를 뿜어내기도 한다. 문고리가 덜컥 내려앉으며 헥터의 거구자가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직전의 2초, 엘레나의 전신을 지배한 것은 순응의 체념이 아닌 뼛속 깊은 곳에서 솟구친 생존 본능이었다.
“너… 설마 딴맘 품는 건 아니지? 하비에르 님이 알면—”
소파 저편에서 무전기를 쥔 채 경고하려던 제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레나는 테이블 위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하비에르의 가죽 서류 가방 속에 든 이중 계약서와 마약 자금 세탁 장부, 그리고 암호가 풀려 있는 대포폰을 거칠게 낚아챘다.
“미안해, 선배. 난 개처럼 살다 죽진 않을 거야.”
엘레나는 드레스 품 안으로 장부와 폰을 필사적으로 밀어 넣음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무거운 크리스탈 양주병을 움켜쥐고 제시를 향해 휘둘렀다. 쾅-!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제시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그 충격으로 무전기가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룸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헥터가 들어섰다. 난장판이 된 방 안과 엘레나의 품에 안긴 장부를 본 헥터의 눈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 시발년이 미쳤나?! 야! 엘레나 잡아!!!”
헥터가 거친 비명과 함께 손을 뻗었지만, 엘레나는 이미 화장실 안쪽에 숨겨져 있던 비상 탈출용 방화문으로 몸을 던진 후였다. 탕-! 문을 걸어 잠그는 서슬 퍼런 소리와 함께 보스턴 다운타운의 최고급 펜트하우스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엘레나는 굽이 높은 구두를 과감하게 벗어 던진 채, 맨발로 축축하고 차가운 비상계단을 미친 듯이 흘러내려 갔다. 뒤편 위쪽에서 방화문이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헥터와 사채 조직원들의 거친 군화 소리가 계단을 짓밟으며 쫓아왔다.
“거기 안 서?! 잡히면 사지를 찢어발겨 멕시코 드럼통에 쳐넣어 버릴 줄 알아!!!”
귀를 찢는 고함이 계단실을 타고 울려 퍼졌지만, 엘레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시멘트 바닥에 쓸려 발바닥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이 장부를 들고 살아서 나가야만 카르텔의 목숨줄을 끊고 캘리포니아의 가족들을 살릴 수 있다는 집념만이 그녀의 사치를 움직였다.
펜트하우스 지하 주차장의 어두운 구석을 통과해 보스턴의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튀어나왔을 때, 그녀의 드레스는 이미 땀과 피, 그리고 먼지로 얼룩져 엉망진창이었다. 엘레나는 숨을 헐떡이며 보일러실 뒤편 골목에 대기 중이던 야간 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보스턴 시내의 공중전화 부스로 향했다.
손을 벌벌 떨며 하비에르의 대포폰을 켠 엘레나는 가장 먼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수신음이 갈 때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날뛰었다.
“엄마! 엄마, 내 말 똑똑히 들어! 지금 당장 남동생 데리고 집에서 나와!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당장 공항으로 가든, 멕시코 국경 반대편으로 도망치든 해! 내 학비 사채업자들이 카르텔이야, 지금 집 앞에 조폭들이 깔렸단 말이야!!!”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비명과 남동생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엘레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전화를 끊었다. 하비에르 일당이 자신의 도주를 확인한 이상, 가족들을 향한 보복의 칼날은 이미 가동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카르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거대 공권력의 심장으로 직행하는 것. 엘레나는 피가 흐르는 맨발로 보스턴 연방 검찰청이 아닌, 하비에르의 매수 장부에 이름이 없던 ‘연방수사국(FBI) 보스턴 지부’의 육중한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새벽의 정적을 깨고 들어온 엉망진창이 된 하버드 여대생의 모습에 당직 수사관들이 권총을 겨누며 경계했다. 엘레나는 품 안에서 피와 땀에 절은 이중 장부와 마약 대금 세탁 대포폰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리쳤다.
“시날로아 카르텔의 보스턴 자금 세탁 총책 하비에르… 그리고 그놈들에게 매수된 마약단속국(DEA) 부국장과 세관장들의 실시간 뇌물 장부예요. 날 보호해 줘요, 그리고 내 가족들을 구해줘요…!”
실제 북미를 뒤흔들었던 거대 카르텔의 몰락 사례가 그러했듯, 엘레나가 목숨을 걸고 폭로한 장부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FBI 본부와 연방 법무부는 즉각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장부에 적힌 DEA 고위 간부들의 이름과 카르텔의 자금 세탁 루트가 완벽하게 일치하자, 연방 요원들이 투입된 대대적인 기습 단속 수사가 전격적으로 개시되었다.
하비에르의 펜트하우스는 물론, 그들이 은밀하게 운영하던 다크웹 스트리밍 서버 아지트와 유령 법인 사무실들이 줄줄이 압수수색 당했다. 하비에르와 헥터, 그리고 휠체어를 탈 틈도 없이 도주하려던 사채 조직원들은 FBI 전술팀(SWAT)의 칼날 앞에 줄줄이 바닥에 엎어진 채 수갑이 채워졌다. 보스턴 대학가를 좀먹던 거대한 포식자들의 장막이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 지독하고 축축한 노예의 사슬을 제 손으로 끊어낸 것이다. 이전의 참혹한 구토와 착취의 수렁에 비하면, 지옥의 문턱을 부수고 나온 처절한 승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카르텔의 심장을 찌른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혹독하고 잔인했다. 체포되기 직전,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하비에르는 광분하여 다크웹의 자동 유포 마스터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들이 지난 수주일 동안 엘레나를 감금하고 약물로 마비시켜 집단으로 유린했던 치욕적인 성범죄 영상 파일들이, 다크웹을 넘어 인터넷 우회 경로와 하버드 대학교 커뮤니티 전체로 전방위로 유포되어 버린 것이다.
카르텔은 무너졌지만, 안아현… 아니, 엘레나라는 인간의 사회적 생명 역시 그 파편에 맞아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학교 게시판과 뉴스에는 그녀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입에 담기도 추악한 영상의 캡처본들이 가십거리로 떠돌았다. 동기들의 수군거림과 대중의 음란한 시선이 송곳처럼 그녀의 온몸을 찔렀다. 로스쿨을 거쳐 당당한 법조인이 되겠다던 그녀의 미래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수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연방 재판부의 철저한 증인 보호 프로그램 덕분에 하비에르 일당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엘레나의 희생으로 가족들은 무사히 구조되어 신분을 세탁하고 미국의 다른 주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 엘레나 본인의 영혼은 여전히 깊은 트라우마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밤 새벽 4시가 되면 환각 속에서 헥터의 군화 소리를 들으며 온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카르텔의 장부를 짜주는 회계 노예도, 사내들의 배설구도 아니었다. 비록 모든 것을 잃고 꿈마저 찢겨 나간 반쪽짜리 삶일지라도, 자신의 의지로 악마들의 목줄을 끊어내고 지옥에서 걸어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을 이정표 삼아, 엘레나는 상처뿐인 삶의 궤적을 느리게, 그러나 단단히 다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