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매달 6000 RON의 침묵
부쿠레슈티의 아침은 늦게 온다.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회색 빌딩 사이로 햇빛 한 줌이 스며든다. 로안나는 그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다. 알람은 오전 6시 30분. 스마트폰도 아니고, 벽에 걸린 낡은 전자시계가 찌르르 울리면 그녀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방은 아파트에서 가장 작은 방이다. 원래 다용도실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그리고 플라스틱 옷장 하나 겨우 들어간다. 창문은 있지만 옆 건물 담장을 마주 보고 있어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로안나는 조용히 옷을 입는다. 유니폼은 이미 다림질해두었다. 빵집 체인의 하늘색 폴로티와 검은색 앞치마. 그녀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볼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쁘지 않다는 걸 안다. 평범하다. 갈색 머리에, 루마니아인 치고는 조금 작은 키, 그리고 오랜 아르바이트와 수면 부족 때문에 눈 밑이 항상 그을려 있다.
현관으로 나가기 전, 그녀는 잠시 멈춘다.
부엌에서 의붓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 아침인데도 벌써 전화 통화 중이다. 누군가에게 화난 투로 말하고 있다. 아마 카드 회사일 것이다. 요즘 거의 매일 그렇다.
로안나는 현관문을 조용히 연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는다. 굳이 할 필요 없다. 어차피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길은 항상 같다. 패널 아파트 단지를 지나, 구멍 난 인도 위로, 길가에 버려진 플라스틱 병과 개똥을 피해 걷는다. 지하철 역사 안은 낡고 어둡다. 에스컬레이터는 절반이 고장 나 있고, 벽엔 낙서가 가득하다.
그녀는 마침 오는 3호선에 몸을 싣는다. 출근 시간은 지나서 차량은 붐비지 않는다. 빈자리에 앉아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낸다. 마케팅 원론. 그녀는 대학교 3학년이다. 국제 마케팅을 전공한다. 성적은 상위 10퍼센트 안에 든다. 하지만 그걸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교 친구들은 그녀의 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로안나는 말하지 않는다. “집에 의붓가족이 있어” 정도가 전부다. 친구들은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지만, 묻지 않는다. 루마니아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산다.
빵집은 유니레아 쇼핑센터 근처에 있다. 관광객들이 많은 동네지만, 로안나가 일하는 곳은 길 한 켠의 작은 프랜차이즈 매장이다.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 후에는 학교 수업, 그리고 저녁에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손을 씻고 앞치마를 두른다. 오늘도 빵 냄새가 그녀를 감싼다.
저녁 7시. 로안나는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일은 동네 슈퍼마켓의 계산대다.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시급은 빵집보다 조금 낮지만, 그래도 모아두면 한 달에 800 RON 정도는 된다.
그녀는 신발을 벗으며 거실을 슬쩍 본다.
의붓언니, 안카는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녀의 손톱은 새로 했는지 반짝인다. 옆에는 또 다른 쇼핑백. 지난주에도 새 가방을 샀는데, 또 샀나 보다.
의붓여동생, 이리나는 자기 방에서 통화 중이다. 큰 목소리로 웃고 있다. 누군가와 데이트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아빠는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TV는 켜져 있지만 아무도 시청하지 않는다.
의붓엄마, 도이나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냄비에서 뭔가 끓는 소리가 난다.
“로안나, 왔어? 좀 도와줘.”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도이나는 키가 크고 당당한 체격의 여자다. 50대 초반이지만, 관리를 철저히 해서 훨씬 젊어 보인다. 머리는 염색한 금발이고, 손톱도 항상 관리되어 있다. 그녀는 로안나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오늘도 늦었네. 너 학교 다니는 게 맞아? 아르바이트만 하는 거 아니야?”
로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도이나는 계속 말한다. “너 요즘 집에 돈 안 내잖아. 보험금으로 다 해결되는 줄 알아? 너도 밥 먹고, 전기 쓰고, 물 쓰잖아.”
로안나는 입을 연다. “엄마, 저 매달 500 RON 드리고 있어요. 아르바이트해서.”
“500 RON이 그렇게 큰 돈이야? 네 엄마가 남긴 보험금, 한 달에 6000 RON이나 되는데, 그건 내가 관리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인 줄 알아? 네가 쓰는 물, 전기, 인터넷, 다 돈이야.”
로안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감자 껍질을 벗기는 손이 조금 빨라진다.
사실 로안나는 알고 있다. 그 보험금 6000 RON이 어디로 가는지. 안카의 새 가방, 이리나의 피부과 시술, 도이나의 주말 여행, 그리고 아빠의 맥주와 담배. 그중 일부는 카드값으로 나간다. 도이나는 카드 빚이 많다. 로안나는 우연히 우편함에서 본 통지서를 본 적이 있다. 세 개의 카드사에 총 3만 5천 RON. 이자만 매달 수백 RON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하면 집에서 쫓겨난다. 어차피 이 집은 원래 친엄마와 아빠가 함께 산 아파트지만, 지금은 도이나 명의는 아니어도 사실상 그녀가 주인이다.
저녁 식사 시간.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는다.
메뉴는 감자 수프와 구운 소시지, 그리고 샐러드. 별거 없지만, 로안나는 배가 고팠다. 오늘 점심은 빵집에서 못 먹었다. 너무 바빠서.
아빠, 이온은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며 맥주를 들이킨다. 그는 50대 중반, 한때는 괜찮은 용접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하지 않는다.
“요즘 일자리 어떻게 되세요?” 로안나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온은 눈썹을 찌푸린다. “왜, 내가 돈을 더 벌어와야 한다는 거야?”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엄마가 보험금으로 다 해결하는데, 내가 굳이 일할 필요 있나? 그리고 나는 가끔 고액 단기 일을 하잖아. 한 번 하면 2000~3000 RON씩 버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로안나는 고개를 숙인다. 그 ‘가끔’이 작년에 한 번, 재작년에 한 번. 사실상 일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이나가 끼어든다. “네 아빠는 피곤하셔. 평생 용접만 하셨는데, 이제 쉴 때도 됐지.”
로안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빠는 쉰 지 3년째다. 그동안 친엄마는 암으로 죽었고, 보험금은 도이나의 손에 들어갔고, 로안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고, 로안나는 설거지를 한다. 그녀는 늘 이 일을 한다. 아무도 돕지 않는다. 안카는 소파로 다시 돌아가 핸드폰을 보고, 이리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부엌에서 혼자 설거지를 하다 보면, 로안나는 가끔 친엄마가 생각난다. 친엄마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로안나가 어릴 때, 엄마는 아파트에서 소규모 재봉 일을 했다. 이웃들의 옷을 수선해주고 조금씩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로안나의 학용품을 사주곤 했다.
“공부 열심히 해. 그러면 나중에 여기서 나갈 수 있어.”
그게 엄마의 마지막 말 중 하나였다.
로안나는 눈물을 참는다. 울면 안 된다. 울면 그녀의 약함이 드러난다. 이 집에서 약함은 이용당할 뿐이다.
며칠 후, 토요일 오후.
로안나는 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다. 마케팅 조사론. 가상의 제품을 하나 선정해서 소비자 조사 계획을 세우는 과제다. 그녀는 와인을 선택했다. 루마니아는 와인 생산으로 유명하니까.
그때 거실에서 큰 소리가 난다. 도이나의 목소리다. 평소보다 훨씬 크고 날카롭다.
“뭐? 연체라고? 내가 언제 연체했어!”
로안나는 펜을 내려놓고 문을 살짝 연다.
도이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치고 있다. 얼굴이 빨개졌다.
“다음 주까지는 절대 안 돼. 말도 안 돼. 나는 다음 주에 돈이 없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전화가 끊기고, 도이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안카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엄마, 무슨 일이야?”
“아니야. 별거 아니야.”
하지만 로안나는 알고 있다. 그건 별거가 아니다. 도이나의 빚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며칠 후, 로안나는 우편함에서 또 다른 통지서를 발견한다. 이번에는 법원에서 온 공문이다. ‘지급 명령’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그녀는 공문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우편함에 넣는다. 자신이 본 일이 없던 것으로 해야 한다. 그녀가 알게 되면, 의심받는다.
하지만 그날 밤, 로안나는 잠들지 못한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옆 건물 담장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6000 RON. 매달 6000 RON. 엄마가 남긴 돈. 그 돈이면 로안나는 학비와 월세를 내고도 남는다. 그녀는 빵집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되고, 슈퍼마켓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학교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돈은 그녀의 손에 오지 않는다. 도이나가 모두 쓴다. 그리고 빚을 만든다. 그리고 그 빚은 언젠가 터질 것이다.
로안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 한다. 자신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 졸업하고, 취업하고, 이 집에서 나가면 된다. 그게 전부다.
일주일 후. 도이나는 점점 더 초조해진다. 카드사에서 전화가 오고, 법원에서 우편이 오고, 그녀는 갈 곳을 잃은 것 같다.
그때, 오랜만에 찾아온 지인이 있다. 에밀. 중년 남성. 항상 깔끔한 정장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닌다. 그는 도이나에게 말한다.
“도이나, 나 좋은 투자처 하나 알고 있어. 월 15% 수익. 원금 보장. 너 지금 빚 때문에 고민하는 거 나도 알아. 이 기회 한 번 잡아봐.”
도이나는 망설인다. 하지만 빚의 압박은 이미 그녀를 옭아매고 있다.
“얼마 필요해?”
“최소 5만 RON. 너 보험금 있잖아. 그리고 카드 한도도 좀 남아 있을 거 아냐.”
도이나는 생각한다. 5만 RON. 투자하면 매달 7500 RON이 들어온다. 그럼 빚도 갚고, 남는 돈도 생긴다.
그녀는 결정한다. “해볼게.”
로안나는 이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다. 그녀는 에밀의 미소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다. 진짜 투자자를 소개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뭔가 숨기는 느낌.
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면 또 싸운다. “네가 뭘 알아”라는 말을 듣는 게 너무 지겹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책을 펼친다. 마케팅 원론. 7장, 소비자 행동 분석.
그녀는 읽는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에밀의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 미소가 곧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