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깨어진 방패막이 (실제 사건 파일 기반 각색)
“…못 해. 난 이런 쓰레기 같은 종이에 서명 안 해!”
흐엉은 손가락이 부러질 듯 힘을 주어 쥐고 있던 몽블랑 만년필을 대리석 테이블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쨍강 하는 날카로운 파편음과 함께 만년필이 바닥을 굴렀다. 탕의 독소 조항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고결한 엘리트로 살아온 그녀의 영혼을 시궁창에 처박는 성적 노예 계약서였다. 당장 공안에게 연행되어 감옥에 썩는 한이 있어도, 이 조폭 새끼의 노리개로 전락해 부모님 얼굴에 똥칠을 할 수는 없다는 마지막 이성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탕은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흐엉 대표, 역시 중산층 엘리트라 그런지 깡다구가 보통이 아니군. 그래, 그 알량한 자존심이 언제까지 버티나 한 번 볼까? 남 실장, 문 열어라. 보내드려.”
탕의 예상외로 순순한 태도에 흐엉은 땀으로 젖은 명품 클러치백을 움켜쥔 채 허겁지겁 VIP 룸을 뛰쳐나왔다. 45층 레지던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1군 중심가의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숨이 가빠오고 사지가 덜덜 떨리는 공포 속에서 그녀가 떠올린 유일한 구원줄은 2년 동안 자신을 목숨처럼 아껴준 연인, ‘민(Minh)’이었다.
흐엉은 눈물 범벅이 된 손으로 스마트폰을 켜 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민의 다정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흐엉?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민… 민아… 나 지금 너무 무서워.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쳤었나 봐. 제발 나 좀 살려줘…….”
흐엉은 강남의 세련된 여왕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길바닥에 주저앉아 비참하게 오열했다. 하노이 명문가 출신의 올곧은 건축가인 민은 흐엉의 횡설수설하는 고백—불법 리딩방 자금 동결, 카지노 고리사채 30억 동, 그리고 조폭 탕의 협박—을 들으며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이성을 찾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흐엉, 진정해. 지금 당장 내 사무실로 와. 내가 가진 적금이랑 펀드 다 깨고, 하노이 본가에 무릎을 꿇어서라도 30억 동 어떻게든 맞춰볼게. 공안 조사도 내 사촌형이 법조계에 있으니까 알아볼 수 있어. 그러니까 절대 그 조폭 놈들 만나지 말고 내 구역으로 와.”
민의 든든한 목소리에 흐엉은 겨우 지옥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깨지고 치부가 낱낱이 드러난 비참함보다, 이 끔찍한 조폭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흐엉은 즉시 택시를 잡아타고 민의 건축 디자인 사무실이 있는 3군의 한적한 골목으로 향했다.
새벽 5시, 민의 사무실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이 굳은 얼굴로 흐엉을 꼭 안아주었다. 그의 따뜻한 품에 안기자 흐엉은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에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민은 책상 위에 서류들을 펼쳐놓으며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현금 흐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쾅—!!!
그 순간, 사무실의 두꺼운 유리문이 거칠게 부서져 내리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악!”
흐엉의 비명과 함께 들어선 것은, 탕의 아지트 문을 지키고 있던 그 험악한 문신 사내들과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브로커 남 실장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쇠파이프와 잭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남… 남 실장? 당신들이 여기를 어떻게…….”
흐엉이 새하얗게 질린 채 뒤로 물러서자, 남 실장이 쯧쯧 혀를 차며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흐엉 대표, 우리가 당신 동선 하나 파악 못 하고 놀아주는 줄 알았어? 이 대단하신 건축가 양반이랑 연애하는 거, 우리 회장님이 진작에 다 알고 계셨지. 30억 동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나 보네? 어디서 푼돈 몇 푼 모아서 메우겠다고?”
민이 본능적으로 흐엉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당신들 뭐야! 당장 나가! 공안에 신고하기 전에—”
“공안? 신고해 봐, 새끼야. 네가 먼저 뒤지나 공안이 먼저 오나.”
덩치 큰 문신 사내 하나가 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쇠파이프로 민의 옆구리를 거칠게 가격했다. 퍽!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민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민아!!!”
흐엉이 scream을 지르며 민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다른 사내가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낚아채 소파 위로 던져버렸다. 사내들의 무자비한 폭행이 민에게 쏟아졌다. 구두발이 민의 얼굴과 척추를 사정없이 짓밟았고, 깔끔하던 건축 사무실의 모형들과 도면들이 핏자국과 함께 엉망진창으로 짓개겨졌다. 흐엉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그녀를 지켜주겠다던 연인의 존엄성이 처참하게 박살 나고 있었다.
“커흑… 흑…”
민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서 경련을 일으켰고, 사내들은 폭행을 멈춘 뒤 민의 한쪽 손가락을 밟아 뭉개버렸다. 건축가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오른손이었다.
남 실장이 피투성이가 된 민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리며 흐엉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흐엉 대표, 똑똑히 봐. 당신의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 불쌍한 건축가 새끼 손가락이 다 부러졌네? 내일 아침까지 30억 동 안 들어오면, 다음엔 이 새끼 목숨줄이 끊어질 거고, 그다음엔 푸미흥에 있는 당신 부모님 자택에 불이 날 거야. 우리 회장님 인내심 바닥났어.”
남 실장은 피 묻은 계약서를 흐엉의 얼굴 던졌다.
“사인해. 그리고 오늘 밤부터 회장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네 년이 몸뚱이를 굴려 고위층 새끼들 정보 빼 오고 자금 세탁 통로 만들지 않으면, 네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차례대로 지옥을 보게 될 테니까.”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민, 그리고 파괴된 사무실. 흐엉은 탕이 파놓은 덫이 얼마나 잔인하고 촘촘한지 그제야 뼛속 깊이 깨달았다. 자신이 도망치려 발버둥 칠수록,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먼저 찢겨 나가는 지옥.
흐엉은 초점 없는 눈으로 피 묻은 만년필을 다시 쥐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순응 외에는 그 어떤 선택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패막이가 되어줄 줄 알았던 연인의 존재는, 오히려 그녀의 목을 가장 잔인하게 죄어오는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