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반격의 준비
새벽 4시, 한진우는 잠에서 깼다.
호텔 방은 여전히 어두웠고, 커튼 사이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이 켜지자 숨겨진 장부가 떠올랐다. 지난 3주 동안 그가 축적한 데이터였다. 구르반 조직의 모든 거래 내역, 대포 통장 번호, 그리고 현지 고위 관료들의 비자금 흐름까지. 이 장부는 이제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기였다.
그러나 무기는 사용하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진우는 장부를 다시 한 번 훑어내리며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무라도프는 일주일의 시한을 줬다. 그 안에 장부를 넘기지 않으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부를 넘긴다고 해서 살아날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를 제거할 가능성이 더 컸다.
그가 생각해낸 시나리오는 하나였다. 무라도프의 상관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 구르반의 인맥을 통해 MNB의 더 높은 사람을 만나고, 장부를 그에게 건네는 대가로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것. 이것이 가능하려면 구르반이 협조해야 했다. 그리고 구르반이 협조하려면, 이 거래가 그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진우는 노트북을 닫고 벽돌폰을 집어 들었다.
“구르반 씨, 오늘 아침에 뵐 수 있을까요? 중요한 제안이 있습니다.”
아침 8시, 트럭 정비소 창고.
구르반은 진우의 설명을 듣는 동안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무표정이 흘렀지만, 눈빛만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계산하고 있었다. 진우가 모든 설명을 마치자, 구르반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니까 요지는 이거군요. 당신이 가진 장부를 MNB 고위층에 넘겨서, 그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겠다.”
“정확합니다. 무라도프는 지금 우리를 압박하고 있지만, 그의 상관이 우리 편이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MNB 내부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세력이 생기는 거죠.”
“그런데 그 상관이라는 사람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습니까?”
“장부에 적힌 고위 관료들의 비리 때문입니다. MNB 내부에서도 이 정보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특히 출세를 노리는 사람이라면요. 무라도프가 중간에서 정보를 가로채려는 것일 뿐, 그의 상관은 이 정보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구르반은 한참을 생각했다. 그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규칙적으로 두드려졌다.
“가능한 얘기예요. 하지만 그 상관이라는 사람에게 접근하려면 누군가의 소개가 필요합니다. 내 인맥 중에 MNB와 연결된 사람이 한 명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 사람은 배신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패하면, 우리 모두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국가 반역죄로 처벌받을 겁니다. 당신은 그걸 감당할 수 있습니까?”
진우는 구르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미 저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감당하지 못해도 감당해야 합니다.”
구르반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내일 저녁, 그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습니다. 그때까지 당신의 장부를 완벽하게 준비해두세요. 단 한 글자의 오류도 없이.”
진우는 이틀 동안 호텔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축적된 장부 데이터를 완전히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거래 일자, 금액, 관련자 이름, 계좌 번호. 모든 정보가 정확해야 했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신뢰는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거래는 성립되지 않았다. MNB 고위층에게 제출할 자료였기 때문에 더욱 완벽해야 했다.
그는 장부를 세 개의 섹션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섹션은 구르반 조직의 거래 내역. 두 번째 섹션은 현지 고위 관료들의 비자금 흐름. 그리고 세 번째 섹션은 무라도프가 지금까지 이 정보를 알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정황 증거였다.
세 번째 섹션이 특히 중요했다. 무라도프의 상관에게 이 자료를 보여줄 때, 단순히 “당신의 부하가 모르는 정보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당신의 부하가 당신을 속이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후자는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충성 경쟁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었다.
진우는 엑셀 시트에 마지막 데이터를 입력하고 파일을 저장했다. 그리고 USB에 암호화된 사본을 만들고, 다시 클라우드에 비상용 사본을 업로드했다. 인터넷이 차단된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클라우드 접속이 불가능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조치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는 이틀째 밤 10시였다. 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내일 저녁, 구르반의 소개로 만나게 될 MNB 고위 관계자. 그 자리에서 그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었다.
벽돌폰이 진동했다. 구르반이었다.
“내일 저녁 8시, 장소는 아시가바트 시내의 VIP 레스토랑입니다. 그 사람이 지정한 장소예요. 혼자 오세요. 빅토르도 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우 씨.”
“네.”
“내일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저녁 식사가 될 겁니다.”
통화가 끝났다. 진우는 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호텔 건너편 가로등 아래, MNB 요원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감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곧 진우가 넘어야 할 장애물의 일부에 불과했다.
다음 날 오후 6시, 진우는 호텔을 나서기 전에 철저히 준비했다.
여분의 옷을 입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평소 쓰지 않던 선글라스를 썼다. 완벽한 변장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호텔 앞에서 대기 중인 MNB 요원들의 시선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는 호텔 주차장으로 내려가 빅토르가 미리 준비해둔 낡은 라다 승용차에 올랐다. 빅토르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MNB 요원들은 아직 정문에 있어요. 하지만 이 차는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빅토르 씨, 혹시 모르니까 말씀드립니다. 오늘 밤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 USB를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달해주세요.”
진우는 작은 USB 하나를 빅토르에게 건넸다. 장부의 사본이 들어 있었다. 빅토르는 USB를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라다는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와 아시가바트 시내로 향했다. 백미러 속에서 MNB 요원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들은 진우가 호텔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차는 시내 중심가로 접어들었다. 흰색 대리석 건물들이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고, 오직 흰색 차량들만이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진우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도시의 모든 것이 흰색인 이유는, 어쩌면 색깔을 지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개성도, 저항도, 진실도. 모든 것을 지우고 오직 통제만을 남기는 것.
6시 45분, 차가 VIP 레스토랑 근처에 멈췄다. 진우는 차에서 내리기 전 빅토르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한 시간 후에 연락이 없으면, 곧바로 대사관으로 가세요.”
빅토르는 대답 대신 진우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라다는 조용히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레스토랑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로비에는 정장 차림의 웨이터가 대기하고 있었고, 벽에는 고급스러운 카펫이 걸려 있었다. 손님은 단 한 테이블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저녁 이곳은 특별 예약으로 막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웨이터가 진우를 2층 VIP 룸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구르반이 먼저 와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50대 중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짧게 민 머리, 그리고 차가운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구르반이 진우를 소개했다.
“이쪽은 아시가바트의 무역상, 한진우 씨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구르반이 잠시 뜸을 들였다.
“MNB 제2국장, 세르다르 베르디예프입니다.”
진우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2국장. MNB에서 제4국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무라도프의 직속 상관이 아니었다. 무라도프의 상관보다 두 단계나 더 높은 사람이었다. 구르반의 인맥은 진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었다.
베르디예프는 진우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유명한 한국인 설계자군요. 구르반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닙니다. 100만 달러짜리 거래를 완벽하게 설계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만나고 싶어 한 겁니까?”
진우는 심호흡을 하고 USB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가진 정보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USB에는 지난 3년간 톨쿠치카 바자르를 통해 세탱된 자금의 전모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금의 일부는 MNB 제4국의 수사관 무라도프가 이미 파악하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베르디예프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그는 USB를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라도프가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그는 이 정보를 이용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취하려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도, 원래는 무라도프가 저에게 요구한 거래의 일환이었습니다. 정보를 넘기면 출국을 보장해주겠다고 했지만, 저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르디예프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구르반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봤다.
“재미있군요.” 베르디예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MNB 요원의 비리를 고발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불법 환치기와 자금 세탱 혐의를 면제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면제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나라를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출국 보장뿐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 USB를 나에게 주겠다?”
“이미 드렸습니다. USB 안에는 모든 데이터가 들어 있습니다.”
베르디예프는 천천히 USB를 집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방 안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구르반의 이마에서 땀이 솟아올랐다.
“좋습니다.” 베르디예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출국을 보장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무라도프에 대한 증언. 그가 이 정보를 알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공식 증언을 문서로 남겨야 합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성하겠습니다.”
베르디예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일주일 안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할 겁니다. 그때까지 당신은 이 호텔에 머물러야 하고, 그 어떤 외부 접촉도 하지 마세요. 구르반을 통해서만 연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만약 오늘 이 대화가 밖으로 샌다면, 거래는 없었던 것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베르디예프가 방을 나서자 구르반은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숨을 내쉬었다.
“당신, 방금 MNB 제2국장과 협상을 끝냈어요.”
“협상이 아니라 거래였습니다.” 진우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류가 준비될 때까지가 진짜 승부입니다.”
그날 밤, 진우는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호텔 앞의 MNB 요원들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상관을 등에 업고 있었다.
탁자 위의 벽돌폰이 진동했다. 익숙하지 않은 번호였다. 진우가 받자, 무라도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방금 한 짓을 압니다.”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전화가 끊겼다. 진우는 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무라도프는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관이 이미 진우의 손을 들어준 이상, 무라도프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일주일. 그 안에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었다. 자유든, 파멸이든. 그는 더 이상 굴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