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균열의 설계
창고 안은 고요했다. 소형 발전기가 돌아가는 낮은 윙윙거림만이 공기를 진동시킬 뿐, 밖에서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 소리조차 이곳에서는 희미하게 들렸다. 한진우는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첫 번째 송장 양식을 불러왔다.
구르반이 그의 뒤에 서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하들은 창고 입구에 흩어져 있었고, 그중 둘은 바깥을 감시하고 있었다.
“카자흐 쪽 바이어들은 30분 후에 도착합니다. 현금 50만 달러를 가져올 거예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엑셀 시트를 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구르반이 건넨 메모지에는 바이어 회사의 정보가 적혀 있었지만, 진우는 그 정보를 입력하면서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 거래의 모든 데이터가 그의 노트북을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그 데이터는, 그가 어떻게 저장하느냐에 따라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는 송장을 작성하며, 동시에 엑셀 시트의 숨겨진 탭에 별도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실제 거래 내역과 수수료, 관련 인물들의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거래가 이루어진 장소와 시간. 모든 것이 암호화된 파일로 저장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무역 서류 템플릿이었지만, 그 안에는 구르반 조직 전체의 자금 흐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창고 밖에서 차량 엔진 소리가 들렸다. 카자흐스탄 바이어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구르반이 진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두려움을 극복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거래가 끝나면, 그는 구르반에게서 단순한 설계자가 아니라 협상할 수 있는 상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완벽하게 충성하는 척해야 했다.
카자흐스탄 바이어들이 떠난 후, 진우는 구르반에게 요청했다.
“조직의 모든 거래 기록을 디지털화해야 합니다. 지금은 종이와 구두로만 전달되고 있는데, 이대로는 규모를 키울 수 없어요. 제가 회계 시스템을 만들겠습니다.”
구르반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진우의 능력을 이미 신뢰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진우가 조직의 살림을 자청해서 맡겠다고 나선 것을 충성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진우는 그날부터 톨쿠치카 바자르의 지하실에 상주했다. 그는 구르반의 부하들이 각자 관리하던 종이 장부를 모두 수거해 하나의 엑셀 파일로 통합했다. 표면적으로는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그 엑셀 파일의 숨겨진 시트에는 또 다른 장부가 작성되고 있었다.
그는 지난 3년간 구르반의 조직이 처리한 모든 불법 거래의 내역을 하나씩 입력했다. 날짜, 금액, 거래 상대방, 사용된 대포 통장, 그리고 관련된 현지 관료들의 이름과 직책까지. 구르반은 뇌물을 줄 때마다 그 내역을 어딘가에 기록해두었고, 진우는 그 기록들을 설득해서 넘겨받았다. “세금 추적을 피하기 위한 회계 처리에 필요합니다”라는 명목이었다. 구르반은 의심하지 않았다.
진우가 가장 주목한 것은 현지 고위 관료들의 비자금 흐름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 중앙은행의 한 임원, 국영 섬유공장의 부사장, 그리고 세관의 고위 간부까지. 이들은 구르반의 환치기 시스템을 통해 매달 수십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고 있었다. 진우는 그들의 이름과 계좌 번호, 그리고 거래 내역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 정보는 그에게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구르반을 압박할 수 있는 지렛대이자, MNB가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보험. 동시에, 만약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가 대한민국 대사관에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다.
밤마다 호텔 방에서, 진우는 노트북을 열고 암호화된 파일을 확인했다. 데이터는 매일 조금씩 쌓여갔다. 그리고 그 데이터의 무게는, 그가 이 조직 안에서 품고 있는 비밀의 무게이기도 했다.
호텔 앞의 MNB 요원은 이제 두 명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진우가 바자르에서 돌아왔을 때, 호텔 로비에는 새로운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40대 중반, 깔끔한 양복과 잘 손질된 구레나룻, 그리고 차가운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그가 진우에게 다가와 러시아어로 말했다.
“한진우 씨, 저는 MNB 제4국의 무라도프입니다.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진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쁩니다.”
“바쁘실 거 압니다. 톨쿠치카 바자르에서의 일들로.”
진우의 걸음이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무라도프가 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진우의 모든 움직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우는 걸음을 재촉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무라도프는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뒤에서 말을 던질 뿐이었다.
“시간이 있을 때 연락 주십시오. 조만간 제 도움이 필요해질 테니까.”
방으로 돌아온 진우는 곧바로 벽돌폰을 꺼내 빅토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라도프라는 자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직접이요?” 빅토르의 목소리에 긴장이 감돌았다. “이상하군요. 보통 MNB는 체포할 증거가 있으면 바로 잡아들입니다. 직접 찾아와서 말을 거는 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거죠.”
“무슨 의도일까요?”
“협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을 구르반에게 심리적 압박 카드로 쓰려는 걸 수도 있고요. 어쨌든 조심하세요. 무라도프는 MNB 내에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는 소문이니까.”
진우는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앉았다. 무라도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구르반의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조직의 일부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것일까.
그는 노트북을 열고 숨겨진 장부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중앙은행 임원의 비자금 내역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무라도프가 이 정보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MNB는 이 정보를 이용해 고위 관료를 숙청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무라도프 자신이 이 정보를 빌미로 그 관료를 협박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진우는 장부를 다시 암호화해 저장했다. 이 데이터는 아직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바로 그 데이터가 그의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진우는 빅토르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은 여전히 낡고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빅토르는 책상에 앉아 구형 컴퓨터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진우가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요.”
“빅토르 씨, 제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우는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들을 털어놓았다. 숨겨진 장부, 축적된 데이터, 그리고 무라도프의 접근까지. 빅토르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진우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당신은 지금 아주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똑똑한 선택이기도 해요. 그 장부는 당신의 유일한 보험이에요. 구르반이 당신을 배신할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MNB가 당신을 쉽게 제거하지 못하게 하는 카드죠.”
“문제는 무라도프입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요.”
빅토르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라도프는 이 나라에서 몇 안 되는,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 경찰이에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다른 것으로 움직이죠. 출세, 권력, 혹은 복수. 그가 당신에게 접근한 이유는… 아마도 구르반보다 더 큰 물고기를 낚으려는 걸 수도 있어요.”
“더 큰 물고기라면?”
“중앙은행 임원이라든가, 세관 고위 간부라든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장부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 있잖아요.”
진우는 침묵했다. 만약 무라도프가 원하는 것이 구르반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라면, 진우의 장부는 단순한 보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협상 테이블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패였다.
“빅토르 씨,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당신은 왜 아직도 저를 돕는 거죠? 이쯤 되면 당신도 위험해질 텐데.”
빅토르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내가 전에 말했죠. 당신이 한국인이라서. 그런데 그 말,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이에요.”
“거짓이라면?”
“나는 이 나라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소련 사람도 아니고, 투르크멘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당신이 오니까… 내 안에 아직 한국인의 피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신을 돕는 건, 나 자신을 돕는 일이기도 해요.”
빅토르는 진우에게로 돌아서며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이 구르반에게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은 지금도 싸우고 있죠. 그게 보기 좋아서 돕는 거예요.”
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빅토르의 말은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변명보다도 진실에 가까웠다. 그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 적어도 완전히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 구르반이 진우를 불렀다.
“새로운 거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터키 바이어들과 함께하는데, 금액이 좀 큽니다. 100만 달러.”
진우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100만 달러. 지금까지 그가 처리한 거래 중 가장 큰 규모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100만 달러짜리 거래의 데이터가 숨겨진 장부에 추가된다면, 그 장부는 이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거대한 폭탄이 될 것이었다.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구르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에요, 진우 씨. 이제 당신 없이는 이 조직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니까.”
그 말이 진우에게는 족쇄인 동시에 무기였다. 구르반은 진우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진우는 그 의존을 조용히 이용하고 있었다. 조직의 모든 비밀을 쥔 사람은 구르반이 아니라 이제 진우였다. 구르반은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거래가 끝난 후, 진우는 호텔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숨겨진 장부에 새로운 데이터를 추가했다. 터키 바이어들의 회사명, 거래 금액, 사용된 대포 통장의 번호, 그리고 구르반이 이 거래에서 챙긴 수수료까지.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호텔 건너편 가로등 아래, MNB 요원 두 명이 여전히 서 있었다. 그들은 이제 진우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진우는 조용히 자신의 퇴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구르반에게 굴복한 척했다. 그러나 그 굴복은 가면이었다. 그 가면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출구를 설계하고 있었다. 숨겨진 장부가 완성되는 날, 그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구르반에게도, 무라도프에게도, 이 나라의 기형적인 시스템 그 자체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