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파이프라인
한진우는 사흘째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침대 위에는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고, 화면에는 엑셀 시트와 무역 서류 양식들이 빼곡히 떠 있었다. 커튼은 닫혀 있었고, 방 안의 유일한 빛은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뿐이었다. 구르반에게서 받은 벽돌폰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진짜 스마트폰은 여전히 가방 속에서 전원이 꺼진 채였다.
그는 구르반의 제안을 분석하고 있었다. 단순한 환전이 아니었다. 구르반이 원한 것은 국제 무역 거래를 위장한 자금 세탱 파이프라인이었다. 한국에서 달러가 들어오고,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마나트가 나가고, 그 사이를 무역 송장이 메우는 구조였다.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이미 무의미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우선 무역 송장이 필요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한국의 수입업체가 있어야 했고, 실제로 존재하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수출업체도 있어야 했다. 수입업체는 그가 6년간 몸담은 회사의 거래처 리스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수출업체였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출업체를 하나 세워야 합니다. 면사 무역을 하는 업체로 등록해야 해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면 충분합니다.”
“가능합니다.” 빅토르의 대답은 간단했다. “여기서 법인 하나 만드는 건 서류 몇 장이면 끝나요. 문제는 관할 세무서에 내야 할 뇌물이지만, 그건 구르반이 처리할 겁니다.”
“송장을 발행하려면 은행 신용장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수입 신용장을 열고, 여기서 수출 신용장을 받아야 해요.”
“그건 좀 복잡한데…”
“아니, 복잡하지 않습니다.” 진우는 엑셀 시트를 훑어내리며 말했다. “투르크메니스탄 중앙은행은 외환 통제를 하지만, 국영 기업 간의 무역 거래에는 예외 조항이 있어요. 제가 어제 밤새워 분석한 겁니다. 우리가 국영 섬유공장과 거래한다는 서류를 만들면, 공식 환율이 아닌 실질 환율에 가까운 금액으로 거래를 인정받을 수 있어요. 최소한 서류상으로는요.”
수화기 너머로 빅토르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진짜 무역쟁이가 아니라 회계사 아니에요?”
“무역쟁이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계산은 기본이에요. 겉으로 보이는 가격과 실제 가격 사이의 틈을 찾는 게 제 직업이니까.”
통화를 마치고 진우는 다시 엑셀 시트로 돌아갔다. 구르반의 조직은 이제껏 주먹구구식으로 환치기를 해왔지만, 진짜 규모를 키우려면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도시에서 아마 그뿐일 것이었다.
사흘 후, 첫 번째 무역 송장이 발행되었다.
금액은 20만 달러. 한국의 한 섬유 수입업체가 투르크메니스탄의 신생 면사 수출업체로부터 면사 20톤을 수입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거래였다. 서류상으로만 완벽했다. 국영 섬유공장이 발행한 생산 확인서, 통관 대행 업체가 발행한 수출 신고필증, 그리고 빅토르가 뇌물로 확보한 세무서의 납세 증명서까지. 진우가 작성한 서류 더미는 마치 10년 경력의 무역 전문가가 만든 것처럼 완벽했다.
톨쿠치카 바자르의 지하실에서 구르반은 그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연신 혀를 찼다.
“당신, 이런 재주가 있는 줄 진작 알았으면 오래전에 모셔왔을 텐데.” 그가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20만 달러가 이 서류들로 인해 깨끗한 무역 대금으로 위장됐어요. 투르크멘텔레콤도, MNB도, 중앙은행도 이게 가짜라는 걸 증명할 수 없을 겁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방식은 거래 건수가 쌓일수록 위험해져요. 세관 데이터와 은행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으면 언젠가 감사 대상이 될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거래 규모를 키우는 동시에, 서류의 정밀도를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세관 직원을 포섭해야 해요. 실제로 화물이 오간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빈 컨테이너라도 좋으니까.”
구르반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진우 씨. 내가 당신을 만난 건 올해 최고의 운이었어요.”
그의 칭찬에도 진우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가 설계한 시스템은 완벽에 가까웠지만, 완벽할수록 그가 빠져나갈 구멍은 작아지고 있었다. 구르반의 조직에 깊숙이 들어올수록, 그는 더 이상 단순한 무역상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국제 자금 세탱 조직의 핵심 설계자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진우는 택시를 타지 않고 걸었다.
아시가바트의 저녁은 여전히 기묘했다. 흰색 대리석 건물들은 석양을 받아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지만, 거리에는 역시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걸어가는 동안 마주친 보행자는 단 한 명, 개를 산책시키는 노인뿐이었다. 노인은 진우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검은 양복의 MNB 요원은 여전히 호텔 앞에 있었다. 오늘은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진우가 나타나자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초보적인 미행이었다. 상대가 초보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초보는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요원을 지나쳐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프런트 직원이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진우는 평소처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을 바꿔 계단으로 향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서, 그는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앉아 벽돌폰을 만지작거렸다. 구르반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결정은 여전히 내리지 못한 채였다. 탁자 위에는 호텔 금고 열쇠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122만 5천 마나트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구르반에게서 받은 새로운 수수료 5만 마나트가 추가되어 있었다. 첫 번째 송장 설계의 대가였다.
돈은 쌓여가고 있었지만, 그와 비례해 위험도 커지고 있었다.
다음 날, 진우는 빅토르를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작은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이라고 해봐야 바자르 인근의 낡은 건물 2층에 위치한 방 한 칸이었지만, 빅토르에게는 이곳이 20년간의 비즈니스 거점이었다.
벽에는 소련 시절의 낡은 지도가 붙어 있었고, 책상에는 10년은 된 구형 데스크톱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찻잔들이 쌓여 있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창밖으로는 톨쿠치카 바자르의 북문이 내려다보였다.
“여기가 제 본거지입니다.” 빅토르가 낡은 사무용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30년 전에는 여기서 할아버지가 농산물 중개를 하셨어요. 그다음에는 아버지가 섬유 도매를 했고. 지금은 제가… 뭐, 이것저것 하고 있고요.”
진우는 창가에 서서 바자르를 내려다봤다. 북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손수레와 지게차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에서는 구르반의 달러와 마나트가 돌고 있었고, 지상에서는 평범한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빅토르 씨,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진우가 창가에서 돌아서며 말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거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빅토르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당신이 한국인이니까.”
“그게 이유의 전붑니까?”
“아니요. 하지만 큰 이유예요. 내가 이 나라에서 50년 넘게 살면서 한국 사람을 만난 건 손에 꼽아요. 1992년에 한국 대사관이 생기고 나서는 조금 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드물어요.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 와서, 나라의 시스템에 갇혀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니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요.”
빅토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재털이에 담배를 비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평생 이중간첩처럼 살아왔어요. 한국계 피를 가졌지만 소련 국민으로 태어났고, 소련이 망한 후에는 투르크멘 국적을 받았지만 투르크멘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죠. 어디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인생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오니까… 이상하게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처음으로 뿌듯해지더군요.”
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빅토르의 말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무거운 진심이었다.
“빅토르 씨, 저는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죠. 당신은 여기 온 지 아직 10일도 안 됐으니까.”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구르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빅토르는 대답하기 전에 긴 침묵을 흘렸다.
“구르반은 사업가예요. 사업가는 믿음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이익으로 움직이죠. 당신이 그에게 이익을 주는 한, 그는 당신을 보호할 거예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당신을 잘라낼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세요. 그것이 이 나라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날 밤, 구르반에게서 벽돌폰으로 호출이 왔다.
“내일 아침 6시. 바자르 북문으로 오세요. 혼자 와야 합니다. 빅토르도 말고요.”
진위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구르반이 그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가 보여준 것은 서류 위의 능력이었다. 이제는 현장에서의 충성심을 증명할 차례였다.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곱씹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회사에 상황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을 MNB에 신고하고 보호를 요청할 수도 있었다. 대사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이미 시작된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122만 5천 마나트는 호텔 금고에 있었고, 첫 번째 위조 송장은 이미 발행되었다. 구르반의 조직은 그가 설계한 파이프라인을 통해 첫 20만 달러를 움직였고, 그 자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제 금융 네트워크를 타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진우는 호텔을 나섰다. 로비에는 아직 MNB 요원이 보이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교대가 이루어지기 전인 모양이었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톨쿠치카 바자르의 북문으로 향했다.
새벽의 바자르는 낮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점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철제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 사이로 바람만이 먼지를 휘날리고 있었다. 북문 앞에는 낡은 흰색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는 구르반의 부하가 앉아 있었고, 뒷좌석 문이 열려 있었다.
진우는 차에 올랐다. 부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승합차는 바자르를 빠져나와 아시가바트 외곽으로 향했다. 도시의 흰색 대리석 건물들이 점점 사라지고, 대신 카라쿰 사막의 황토빛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달렸을 무렵, 차가 멈춘 곳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낡은 창고 건물이었다. 구르반이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검은 지프 두 대가 주차되어 있었고, 지프 주변에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불룩하게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오늘은 당신의 충성심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구르반이 진우를 맞으며 말했다. “여기서 한 시간 후에, 카자흐스탄에서 오는 바이어들과 만날 겁니다. 그들은 현금 50만 달러를 가져올 거예요. 당신이 그 자리에서 송장을 발행하고, 무역 대금으로 위장하는 겁니다. 실시간으로.”
진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목소리는 평온했다.
“노트북은 가져왔습니까?”
“물론입니다.”
구르반이 손짓하자 부하 하나가 진우의 노트북 가방을 건넸다. 진우는 가방을 받아 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안은 의외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벽 쪽에는 소형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은 연결되지 않았지만, 필요한 서류 양식과 엑셀 시트는 모두 오프라인 상태에서도 작동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진우는 손가락을 풀며 키보드에 올렸다. 50만 달러. 지금까지 그가 다뤄본 것 중 가장 큰 금액이었다. 50만 달러를 무역 송장으로 위장해 카자흐스탄 바이어들에게 전달하는 것.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불법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창고 밖에서는 구르반과 부하들의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사막의 바람이 창고 문을 간간이 두드렸다.
진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첫 번째 양식에 데이터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선택은? (1차 분기점)
이제 당신이 한진우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선택 1] 진우가 구르반의 제안을 완전히 수용하고, 국제 자금 세탱 파이프라인의 설계자로 완전히 편입됩니다.
[선택 2] 진우가 구르반의 거래를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날 출구를 찾기 위해 내부에서 기회를 모색합니다. (무료)
(※ 선택하신 분기점의 다음 화를 결제하시면 한진우의 잔혹한 운명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