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그림자 투르크메니스탄편 #001] 마나트의 덫 – 2화: 돈의 무게

2화: 돈의 무게

다음 날 정오, 진우는 다시 톨쿠치카 바자르의 지하실에 서 있었다.

전날과 달리 방 안에는 구르반의 부하들로 보이는 남자 셋이 더 있었다. 그들은 진우가 들어서자 잠시 손을 멈추고 그를 훑어보더니, 곧 하던 일로 돌아갔다. 구르반은 어제와 같은 자리, 같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소형 금고 하나가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마나트 지폐 다발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5만 달러, 가져오셨습니까?”

진우는 서류가방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열자, 100달러 권으로 정리된 5만 달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르반은 지폐 다발을 하나 집어 들어 손끝으로 넘겼다. 그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세어보죠.”

그가 손짓하자 부하 하나가 다가와 달러 뭉치를 계수기로 가져갔다. 기계가 지폐를 삼키며 숫자를 세는 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100, 200, 300… 50,000. 계수기가 멈추고,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125만 마나트.” 구르반이 말했다. “수수료 2만 5천을 제외하고 122만 5천 마나트입니다.”

그는 금고에서 마나트 다발을 꺼내 진우 앞에 쌓기 시작했다. 100마나트 권이었다. 한 다발에 1만 마나트씩, 122개 다발과 반 다발. 진우는 처음 보는 마나트 지폐를 집어 들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섞인 지폐에는 독재자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전 대통령의 초상이 인쇄되어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지폐가 122만 장. 그는 지폐를 다시 내려놓았다.

“이 돈을 은행에 입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르반은 피식 웃었다. “당신, 진짜 이 나라가 처음이군요.”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투르크메니스탄 은행은 외국인의 현금 입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렇게 큰 금액은 더더욱. 게다가 당신이 122만 마나트를 입금하면 은행 직원이 곧바로 MNB에 신고할 겁니다. 24시간 안에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당신의 호텔 방을 찾아올 거예요.”

“그럼 어떻게…”

“현금으로 쓰세요. 이 나라에서는 다들 그렇게 합니다. 호텔비, 식비, 교통비, 뇌물까지 전부 현금입니다.”

진우는 지폐 다발을 바라봤다. 122만 마나트. 이 돈을 호텔 방에 쌓아두고 매일 조금씩 꺼내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마치 1980년대 한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서는 현실이었다.

“한 가지 더 제안이 있습니다.” 구르반이 갑자기 앞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당신 같은 무역상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생각해보시겠습니까?”

진우는 대답을 미뤘다. 일단 돈을 챙겨야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진우는 택시 창밖으로 아시가바트 시내를 바라봤다.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후 2시의 대리석 도시는 태양 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눈부심은 따뜻함이 아니라 냉혹함에 가까웠다. 정부 청사로 보이는 거대한 흰색 건물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그 앞을 지키는 군복 차림의 위병들이 잠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거리에 차량이 많았다. 아니, 많다기보다는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흰색 차량들이 줄지어 어떤 건물로 향하고 있었고, 그 건물 앞에는 대형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스크린에는 거대한 카펫 그림이 펼쳐져 있었고, ‘투르크메니스탄 카펫의 날 기념식’이라는 글자가 투르크멘어와 러시아어로 번갈아 표시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진우가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카펫 데이. 대통령 나오신다.”

기념식장 주변에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진우가 이 도시에 도착한 이후 처음 보는 ‘군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정부 청사에서 동원된 공무원들이었고, 일부는 학교에서 단체로 나온 학생들처럼 보였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똑같은 박수를 치고,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열정도,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이었다.

진우는 그 풍경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려다 멈추었다. 공공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MNB의 감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창밖을 계속 바라봤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로비 한구석에서 낯선 남자 하나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진우는 그를 스쳐 지나가며 잠시 시선을 주었다. 30대 후반,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 투르크멘 남자치고는 드문 차림이었다. 진우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진우는 깨달았다. 이 남자를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어제 호텔 커피숍에서, 그리고 그제 공항 입국장에서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미행당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진우는 서둘러 커튼을 쳤다.

122만 마나트가 든 여행용 보스턴 백을 침대 밑에 밀어 넣고, 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공항에서부터 미행이 시작되었다면, 그는 입국하는 순간부터 이미 MNB의 감시 대상이었다는 뜻이었다. VPN 접속 시도가 포착되었거나, 아니면 단순히 외국인 무역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등록되었을 수도 있었다.

구르반이 건넨 벽돌폰을 꺼내 빅토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연결되었다.

“빅토르 씨, 나 진우입니다.”

“무슨 일이에요?”

“호텔에 MNB 요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항에서부터 따라붙은 모양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빅토르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가만히 계세요. 평소처럼 행동하고, 아무것도 숨기려는 티를 내지 마세요. MNB는 도둑이 아니라 경찰이에요. 숨기면 숨길수록 더 파고들어요.”

“환전한 돈은요?”

“호텔 금고에 맡기세요. 방에 두는 것보다는 안전합니다. 그리고…”

빅토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 낮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구르반이 오늘 제안을 하지 않았어요? 무역 거래 말인데.”

“네, 했습니다.”

“그거, 생각해볼 만한 제안이에요. 당신 같은 무역상이 우리에게 필요하거든요. 구체적인 내용은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오늘 밤은 그냥 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세요. MNB 요원은 당신이 뭘 하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바쁠 테니까.”

통화가 끝났다. 진우는 벽돌폰을 내려놓고,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호텔 방은 평범했다. 침대, 책상, TV, 미니바.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서도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전화기, TV 리모컨, 심지어 방 한구석의 콘센트까지도 누군가가 손을 댄 흔적이 느껴졌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VPN은 켜지 않았다. 대신 오프라인 상태에서 엑셀을 열고, 오늘 거래의 내역을 정리했다. 달러 5만 달러가 마나트 122만 5천 마나트로 전환되었고, 공식 환율 기준으로는 약 35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회사가 이 계약에 책정한 예산은 정확히 125만 마나트. 진우는 그 예산을 거의 정확히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계약 이행을 위해서는 국영 섬유공장에 계약금을 지급하고, 생산된 면사를 검수하고, 수출 통관을 진행하고, 카스피해를 건너 바쿠까지 운송하는 모든 과정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 사이의 괴리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힐 것이었다.

밤 11시, 진우는 커튼 사이로 바깥을 내다봤다. 호텔 건너편 가로등 아래, 검은 양복의 남자가 여전히 서 있었다. 손에는 신문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호텔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진우는 커튼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진우는 빅토르와 함께 톨쿠치카 바자르의 지하실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거래가 아니라 제안을 듣기 위한 방문이었다.

구르반은 어제보다 더 편안한 태도로 그들을 맞았다. 책상 위에는 차 세 잔이 놓여 있었고, 부하들은 물러나 있었다. 이곳의 진정한 ‘비즈니스’가 곧 시작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진우 씨, 당신은 한국에서 오셨죠.” 구르반이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당신의 나라는 1960년대에 1인당 GDP가 100달러도 안 되던 나라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죠.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진우는 대답을 기다렸다.

“수출입니다. 무역이죠. 한국은 물건을 팔아서 달러를 벌었고, 그 달러로 다시 기계를 사서 더 많은 물건을 만들었어요. 아주 단순한 원리지만, 그 단순한 원리를 실행한 나라는 몇 개 안 됩니다.”

구르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진우의 눈을 바라봤다.

“투르크메니스탄은 달러를 벌지 못하는 나라예요. 아니, 벌긴 벌지만 벌어진 달러가 국민들에게 가지 않아요. 천연가스 수출로 매년 수백억 달러가 들어오지만, 그 돈은 전부 대통령궁과 중앙은행 금고로 들어가요. 시중에는 달러가 없어요. 외국인 투자자도, 무역상도, 관광객도 달러를 가져오지만, 그 달러는 은행을 통과하는 순간 마법처럼 사라져요.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이 바자르에는 달러가 있죠.” 진우가 말했다.

“정확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가 은행보다 나은 은행이기 때문입니다.”

구르반은 의자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대형 화이트보드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복잡한 도표와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달러 유입 경로, 마나트 환전 경로, 수수료 비율, 그리고 다양한 국가들의 국기와 화살표.

“당신은 무역상입니다. 당신은 물건을 사고팔 때 필요한 서류를 만들 수 있고, 신용장을 개설할 수 있고, 국제 송금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어요. 당신이 가진 그 능력이, 이 나라의 지하 경제에서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진우는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안받은 것은 단순한 환전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지하 경제를 움직이는 금융 시스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역할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입니까?”

“간단합니다. 당신은 한국에서 달러를 받아서, 이곳에서 마나트로 지급합니다. 그 반대도 가능하고요. 당신이 한국의 모회사와 협력해서 무역 송장을 발행하면, 우리는 그 서류를 이용해 자금을 이동시킵니다. 은행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국제 무역 거래로 위장하는 거죠.”

진우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불법이었다. 명백한 자금 세탁이었다. 한국에서든 투르크메니스탄에서든, 이 거래가 발각되면 그는 최소한 사기죄, 최악의 경우 국제 범죄 조직 가담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구르반의 제안은 그가 이 나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구르반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마세요. 시간은 항상 우리 편이 아니니까.”

호텔로 돌아오는 길, 진우는 빅토르에게 물었다.

“빅토르 씨는 어떻게 이 일에 발을 들이게 된 거죠?”

빅토르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택시가 흰색 대리석 건물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동안, 그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연해주에서 이곳으로 오신 게 1937년이었어요.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을 때죠. 기차 안에서 동사한 사람만 수백 명이었대요. 살아서 도착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고요.”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고 다시 집어넣었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어요. 카라쿰 사막 한가운데서 물길을 만들고, 땅을 일구셨죠. 그렇게 3대가 살아남았어요.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가 내 나라예요. 그런데 이 나라는 나를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영원히 ‘고려인’일 뿐이에요. 취직도, 사업도, 해외여행도 제한됩니다. 그게 이 나라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은 전부 지하 경제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체념이 묻어 있었다. 80년 넘게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후손이,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는 현실. 진우는 그 말에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검은 양복의 MNB 요원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신문 대신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진우는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요원이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온 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구르반의 제안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역 송장을 위조해 국제 송금을 중개하는 일. 그가 IT 엔지니어로 일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역 실무와 국제 금융에 대한 지식은 충분히 있었다. 그 지식을 범죄에 사용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이 나라에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 자체가 무의미했다. 공식 환율이 합법이고, 암시장이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 합법을 따르면 회사는 파산했고, 개인은 횡령범이 되었다. 불법을 따르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벽돌폰을 바라봤다. 구르반이 건넨 그 작은 기계는, 이제 그의 유일한 연결 통로였다. 스마트폰은 여전히 가방 속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전원이 꺼져 있었다. 가족과의 연락, 친구와의 연락, 회사와의 연락. 모든 것이 차단된 상태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이미 이 게임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MNB 요원이 그를 감시하고 있고, 구르반이 그를 필요로 하고 있고, 빅토르가 그를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이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첫 결정도 내리지 않았지만,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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