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유령 도시의 입구
아시가바트 국제공항의 유리문이 열리자, 한진우는 자신이 우주정거장에라도 도착한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사방이 흰색이었다.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온 순간 펼쳐진 풍경은 건축물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에 가까웠다. 바닥의 보도블록부터 저 멀리 솟아오른 빌딩의 첨탑까지, 모든 것이 마치 설탕을 정제해 찍어낸 듯한 순백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후 2시의 중앙아시아 태양이 그 흰색을 정통으로 내리꽂고 있었고, 빛은 대리석 표면에 부딪혀 사방으로 산란하며 눈을 찔렀다.
34세, 중소 무역상사의 중앙아시아 지사 대리. 한진우는 손에 든 서류가방을 고쳐 쥐고 주차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방 안에는 현금 5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회사가 투르크메니스탄 국영 섬유공장과 체결한 면사 수입 계약의 계약금이었다. 평소 같으면 은행 송금으로 처리했을 금액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달러를 은행으로 보내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양옆으로 늘어선 대리석 건물들 사이로, 진우는 점점 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오후 2시, 평범한 평일 오후인데도 보행자의 모습은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마치 세트장처럼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지만, 그 안에 생명체는 단 한 마리도 살지 않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아니, 단 한 마리도 ‘허락되지 않은’ 생명체는.
넓은 8차선 도로 위로 차량 몇 대가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차량들은 모두 흰색이었다. 도요타 코롤라, 기아 쏘울, 메르세데스 벤츠 할 것 없이 모든 차가 마치 도료를 흰색으로만 찍어낸 듯 백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진우는 공항으로 오는 길에 현지 가이드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개인 소유 차량의 색상이 사실상 흰색으로 제한되어 있고, 검은 차는 정부 고위 관료만 탈 수 있으며, 유색 차량은 수도 아시가바트 진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믿기 어려운 규제였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택시 승강장으로 다가가자 흰색 도요타 코롤라 한 대가 조용히 다가왔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중년의 투르크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짧은 투르크멘어와 러시아어 단어 몇 개를 섞어 행선지를 전달했다. 시내 중심가의 한 비즈니스 호텔.
차는 소리 없이 출발했다. 진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무심코 카카오톡을 열었다. 아내에게 도착 메시지를 보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화면에는 ‘연결 실패’라는 알림만이 떠올랐다. 와이파이는 잡혀 있었지만 인터넷은 연결되지 않았다. 셀룰러 데이터로 전환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SNS 앱도, 구글도, 네이버도 전부 동일한 무응답 상태였다.
그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령처럼 텅 빈 대리석 도시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비즈니스 호텔 로비도 흰색 대리석이었다. 진우는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짐을 풀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트북을 켜고 호텔 와이파이에 접속하는 것이었다. 연결은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그는 VPN을 켰다. 회사 보안 지침에 따라 업무용 노트북에는 NordVPN이 설치되어 있었다. 연결 시도. ‘연결 실패.’ 프로토콜을 바꿔봤다. OpenVPN TCP, UDP, IKEv2. 전부 실패. 다른 서버 위치로 바꿔봤다. 독일, 네덜란드, 일본.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멈추고 화면을 노려봤다. 누군가가 VPN 패킷을 감지하고 차단하고 있었다. 그것도 국가 단위로.
진우는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인터넷은 정부가 운영하는 유일한 국영 통신사 투르크멘텔레콤을 통해 제공되며, 모든 트래픽은 국가안전부 산하 사이버감시국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출장 전에도 조사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전혀 다른 차원의 압박이었다. SNS 차단, 메신저 차단, VPN 차단. 그리고 모든 차단 시도는 곧바로 감시 대상으로 분류된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는 재빨리 노트북을 닫았다. VPN 접속 시도만으로도 이미 어딘가의 서버에 로그가 남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나라에서 국가 반역죄는 사형까지 가능한 중죄였다. 그리고 ‘국가 반역’의 정의는 매우 널찍했다.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생각보다 지쳐 보였다. 인천에서 이스탄불, 이스탄불에서 아시가바트까지, 14시간의 비행과 환승이 끝난 직후였다. 그러나 피로를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내일 아침 첫 미팅이 잡혀 있었고, 그 전에 이 도시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해야 했다.
저녁 7시, 진우는 호텔 1층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풍성했다. 양고기 샤슐릭과 플로프, 그리고 각종 채소 절임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으며 계산서를 확인했다. 1인당 120마나트. 그는 계산을 시작했다. 공식 환율 1달러에 3.5마나트. 그러니까 120마나트는 약 34달러, 한화로 4만 5천 원 정도.
그는 접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식사를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120마나트가 실제 가치로는 얼마일까. 이 나라의 진짜 환율은 얼마일까. 그리고 왜 이토록 비정상적인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진우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VPN은 켜지 않았다. 대신 인터넷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출장 전에 다운로드해둔 현지 비즈니스 리포트를 읽기 시작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공식 환율 제도는 2015년 이후 완전히 경직되었다. 중앙은행이 정한 공식 환율은 1달러당 3.5마나트였지만, 암시장에서 마나트는 그 7분의 1 이하의 가치로 거래되고 있었다. 외국 기업이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려면 현지 은행을 통해서만 자금을 환전할 수 있었는데, 그 환율은 당연히 공식 환율이었다. 1만 달러를 은행에서 환전하면 3만 5천 마나트. 암시장에서 환전하면 25만 마나트. 같은 돈의 가치가 7배 차이로 왜곡되는 구조였다.
진우는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가방 속의 5만 달러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이 돈을 은행에서 공식 환율로 환전한다면 회사는 사실상 자산의 80% 이상을 날리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계약 이행은커녕 진우 자신이 횡령 혐의로 곤경에 처할 수 있었다. 그가 이 회사에서 일한 지 6년, 지금까지 이런 위험한 출장은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내일 미팅 전까지, 그는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찾아내야 했다. 대리석 아래 숨겨진, 실제로 움직이는 돈의 흐름을.
다음 날 아침, 진우는 아시가바트 시내 중심가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에스프레소 한 잔과 작은 물잔이 놓여 있었다. 가격은 커피 25마나트, 물 10마나트. 공식 환율로 각각 7달러, 3달러였다. 커피 한 잔에 한화 9천 원. 서울의 스타벅스보다 두 배는 비쌌다.
그러나 이 가게 주인이 실제로 이 가격에 커피를 팔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짜 결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의 앞자리에는 한국계 외모의 50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름은 빅토르. 소개받은 브로커였다. 진우의 회사가 이전에 투르크메니스탄과 소규모 거래를 진행했을 때 통역과 현지 코디네이션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빅토르는 고려인 3세로, 러시아어와 투르크멘어, 한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인재였다.
“환전을 해야 한다고요?” 빅토르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들이키며 물었다. 한국어는 약간의 함경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후손 특유의 억양이었다.
“네. 그런데 은행은 아닙니다. 공식 환율로는…”
“당연히 안 되죠. 여기서 은행은 외국인 털어먹는 합법 강도니까.”
빅토르는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카페 안에는 그들 외에 손님이 두 테이블뿐이었지만, 이 도시에서는 어디서 누가 듣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암시장 환율은 지금 1달러에 25마나트 정도예요. 때에 따라 변동은 있지만, 대략 그 정도라고 보면 되고.”
진우는 암산을 했다. 25마나트. 공식 환율의 7배가 넘었다. 5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환전하면 125만 마나트. 회사의 예산 집행 계획에 충분히 부합하는 금액이었다.
“어디서 만날 수 있죠? 그 환전상들을.”
“톨쿠치카 바자르.” 빅토르가 짧게 말했다. “구시가지 북쪽에 있는 시장인데, 겉으로는 옷이랑 전자제품 파는 곳이에요.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시장이 열립니다.”
빅토르는 테이블 위에 작은 메모지를 밀어놓고 일어섰다.
“내일 오전 10시. 바자르 정문에서 만나요. 거기서 안쪽으로 안내할 테니까. 그리고 조심하세요, 진우 씨. 이 도시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니까.”
다음 날 아침, 진우는 톨쿠치카 바자르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공식 명칭은 ‘알틴 아시르 시장’이었지만, 현지인들은 여전히 소비에트 시절의 이름인 톨쿠치카로 불렀다. 수십 개의 건물과 수백 개의 노점이 거대한 미로처럼 얽혀 있는,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의 시장 중 하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재래시장이었다. 옷가게, 신발가게, 주방용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상인들은 손님을 부르며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빅토르가 정문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진우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장 시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세요. 말은 하지 말고.”
그들은 좁은 통로를 지나고, 또 다른 골목을 빠져나갔다. 시장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숙이 뻗어 있었다. 15분쯤 걸었을 무렵, 빅토르가 갑자기 허름한 건물의 철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우는 망설이다 따라 들어갔다. 문 뒤에는 콘크리트 계단이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공기가 달라졌다. 위층의 시장 냄새—향신료, 섬유, 사람 땀—가 사라지고, 대신 습기와 곰팡내가 섞인 지하 특유의 악취가 밀려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 낮은 목소리로 숫자를 주고받는 소리, 지폐 세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그들은 철제 방화문 하나를 더 지나, 넓은 지하 공간으로 들어섰다. 공간은 의외로 넓었고,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벽을 따라 놓인 여러 개의 책상에는 노트북, 계수기, 송금 단말기들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들 사이로, 여러 명의 남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달러 뭉치와 마나트 뭉치가 번갈아 들려 있었다.
“여기가 바로 투르크메니스탄의 진짜 중앙은행입니다.” 빅토르가 조용히 말했다.
구석에 있는 책상에서 한 남자가 일어나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40대 후반, 민머리에 짙은 눈썹, 그리고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얕은 흉터가 있는 남자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구르반입니다. 당신이 그 한국인 무역상이군요.”
구르반은 진우를 자신의 책상으로 안내했다. 책상 위에는 최신형 노트북 한 대와 노키아 벽돌폰 여러 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진우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환전을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진우는 잠시 망설였다. 5만 달러. 낯선 지하실에서, 만난 지 1분도 안 된 남자에게 털어놓기에는 위험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믿을 만한 상대라는 신호였다.
“5만 달러입니다.” 진우가 말했다.
구르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꽤 큰 금액이군요. 하지만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가 노트북을 열고 무언가를 타이핑했다. “환율은 오늘 1달러에 25마나트. 5만이면 125만 마나트. 현금으로 드립니다. 단, 수수료 2%는 별도.”
진우는 암산을 했다. 125만 마나트, 수수료 2%면 2만 5천 마나트 정도. 거래 후 남는 금액은 약 122만 5천 마나트. 회사가 이 계약을 위해 책정한 예산 범위 내에서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알겠습니다. 언제 가능합니까?”
“내일. 장소는 여기서.”
구르반은 노트북을 닫고 진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우 씨.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무엇인가요?”
“당신 같은 무역상이 왜 여기까지 직접 왔는지. 보통은 현지 에이전트를 통해서 처리하는데. 아, 혹시… 이번 거래가 처음이십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투르크메니스탄은 처음입니다.”
“그럼 더 설명을 잘 해드려야겠네요.” 구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나라에서, 당신은 지금 두 개의 법을 동시에 위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환관리법, 다른 하나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진우의 눈을 바라봤다. “국가안전부의 내부 감시 규정입니다. MNB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정보기관입니다. 옛날 KGB의 직계 후손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이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것 자체가 감시 대상이에요. 특히 달러는 더 그렇고요.”
구르반은 벽에 걸린 작은 선반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우에게 건넸다. 새 휴대폰이었다. 10년 전 모델처럼 보이는 저가형 노키아 벽돌폰이었다.
“이건 뭡니까?”
“당신의 스마트폰은 지금쯤 MNB의 도청 리스트에 올라가 있을 겁니다. VPN 접속 시도가 있었으니까요. 앞으로 중요한 연락은 이걸로 하세요. 번호는 빅토르가 알려줄 겁니다.”
구르반은 다시 진우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거래가 끝나면 당신은 이 나라를 떠나는 게 좋을 겁니다. 오래 머물수록 위험해집니다. MNB는 외국인을 특히… 좋아하거든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그 미소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날 밤, 호텔 방으로 돌아온 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구르반이 건넨 벽돌폰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자신의 스마트폰은 전원을 꺼서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125만 마나트. 내일이면 손에 쥘 수 있다. 그러나 그 돈을 손에 쥐는 순간, 그는 이 나라의 지하 경제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구르반과의 거래는 단순한 환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통제하는 모든 금융 시스템의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MNB라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직 첫 번째 거래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는 이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한 걸음 깊이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