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처절한 사투
3화의 마지막 순간, 채은은 벨러 샤보라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장관님. 저는 그런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벨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위스키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마치 처음 보는 생물을 관찰하듯 채은을 바라보았다. 부다페스트에서, 아니 헝가리 전역에서 그 누구도 자신에게 ‘아니요’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 지하 미궁에서는.
“학생, 지금 농담하는 거지?”
벨러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이면에는 칼날이 숨어 있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통역과 음악 연주만 계약했습니다. 그 이상은…”
채은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벨러가 벽 쪽의 인터폰을 눌렀다.
“이슈트반, 이게 무슨 일이야? 네가 말한 그 ‘순종적인’ 한국 학생 맞아?”
인터폰 너머에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이슈트반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인자한 미소가 없었다. 대신 차갑고 딱딱한 표정이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갈고닦은 가면을 잠시 벗어던진 듯했다.
“채은 씨, 무슨 짓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손녀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그것이 아니었다.
“저는… 저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계약서에도 이런 건 없었고…”
채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계약서에도 없다?”
이슈트반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가 그 두꺼운 계약서를 펼쳤다.
“제23조, VIP 의전 업무. 제31조, 고객 만족을 위한 포괄적 서비스 제공. 제47조, 갑의 지시에 대한 을의 성실한 이행 의무. 이게 다 계약서에 있는 조항이에요. 그리고…”
그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우아한 노신사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친 행동이었다.
“당신은 그 계약서에 사인했어요.”
“그건 요약본에 사인한 거잖아요! 정식 계약서는 보지도 못했고!”
채은이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방 안에서 울렸지만, 벽에 붙은 두꺼운 방음재에 금방 삼켜졌다.
“요약본도 법적 효력이 있어요, 학생.”
이슈트반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입가에는 조소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한 행동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에요. 장관님께 결례를 범하고, 나의 직접적인 지시를 거부했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채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위약금 6,000만 포린트. 그리고 즉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전환.”
이슈트반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했다.
“당신 부모님 한국 집에도 연락이 갈 거고, 아마 평생 모은 재산으로도 이 빚을 감당 못 하실 거요.”
“협박하지 마세요.”
채은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 말에 속지 않아요.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잖아요. 카페에서 유진호라는 남자 만난 것부터, 당신이 구원자처럼 나타난 것까지. 전부 연극이었을 뿐이야.”
이슈트반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연극이었어요. 아주 잘 짜여진 연극. 그리고 당신은 그 연극의 주인공이었고.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이 연극은 관객이 없어요. 아무도 당신을 보러 오지 않고,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아. 당신은 지금 이 무대 위에 혼자예요, 채은 씨.”
이슈트반이 손을 들자, 문 밖에서 아틸라와 또 다른 경비원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지체 없이 채은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정중한 안내가 아니었다. 그들의 손길은 거칠고 무자비했으며, 채은이 발버둥 칠수록 더 강하게 죄어왔다.
“VIP 라운지가 아니에요. 더 아래층으로.”
이슈트반이 차갑게 지시했다.
채은은 끌려가며 소리쳤다. “놔줘요! 이거 불법이에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비명은 두꺼운 지하 벽에 부딪혀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복도는 점점 더 좁아졌고, 조명은 더 희미해졌으며, 공기는 더 축축하고 무거워졌다. 온천의 증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대신 곰팡이와 쇠 녹슨 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하 3층이었다. 이곳은 더 이상 고딕 양식의 고급 스파가 아니었다. 벽은 거친 콘크리트였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으며, 복도 양옆으로는 무거운 철제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문에는 작은 배식구만 달려 있었고, 그 배식구마저 굳게 닫혀 있었다. 이곳은 독방이었다. 감옥이었다.
아틸라가 문 하나를 열었다. 경첩이 끼익 하는 섬뜩한 소리를 냈다. 방 안은 좁고 어두웠다. 창문은 없었고, 천장에는 알몸으로 드러난 형광등 하나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가구라고는 쇠로 된 간이 침대 하나와, 벽에 붙은 작은 세면대가 전부였다. 변기조차 없었다. 대신 구석 바닥에 배수구가 하나 뚫려 있었다.
“이게 무슨…”
채은이 경악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계약 위반자의 숙소요.”
아틸라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의 첫 대사였다.
그들은 채은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바닥에 넘어졌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이 까졌다. 피가 배어나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밖에서 굵은 쇠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형광등의 깜빡임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여기서… 얼마나…”
채은이 문을 향해 기어가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복도 너머에서 또 다른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은은 문 앞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무릎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고, 실크 드레스는 찢겨져 있었다. 그녀의 손은 떨렸고, 눈에서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오래가지 않았다.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녹슨 쇠로 되어 있었고, 매트리스는 얇고 얼룩덜룩했다. 베개는 없었다. 담요도 없었다. 세면대에서는 찬물만 나왔고, 비누조차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소독할 방법이 없었다. 감염되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조차 사치였다. 그녀에게 주어진 더 큰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 공간에는 시계가 없었다. 창문도 없었다. 형광등의 깜빡임만이 유일한 리듬이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고, 1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형광등이 깜빡이는 횟수, 벽돌의 개수, 자신의 심장 박동수.
하나, 둘, 셋…
그러다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이슈트반의 두 번째 수법이었다. 첫 번째는 돈이었고, 두 번째는 시간이었다. 감각을 박탈당한 인간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다. 창문도, 시계도, 사람의 목소리도 없는 공간에서 그녀의 정신은 스스로를 잠식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러나 채은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손을 짚고 방의 크기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세로로 아홉 걸음, 가로로 여섯 걸음. 약 5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다음으로 배수구를 살폈다. 쇠로 된 격자가 덮여 있었지만, 오래되어 녹이 슬어 있었다. 그 아래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이 건물 전체에 얽힌 배수 시스템의 일부일 것이었다.
탈출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희망의 단서였다. 이 건물은 18세기에 지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배수 시스템은 현대의 밀폐된 하수관이 아니라, 옛날식 석조 배수로일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채은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탈출을 꿈꿀 때가 아니었다. 먼저 이곳의 규칙을 파악해야 했다. 경비원들의 교대 시간, 식사가 나오는 간격, 문이 열리는 빈도. 그 모든 것을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기록할 종이도 펜도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만 모든 것을 새겨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복도에서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은은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두 사람이 헝가리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아틸라였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이 한국 여자,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새로운 목소리가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이슈트반 씨가 알아서 하겠지.”
아틸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너무 오래 가두면 죽을 수도 있어. 지난번 우크라이나 여자도 그렇게 갔잖아.”
“닥쳐. 그 얘기는 하지 마.”
아틸라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채은은 숨을 멈추고 더 귀를 기울였다. 우크라이나 여자. 죽었다.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곳은 단순한 감금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나저나 내일 교대는 어떻게 돼? 나 저녁 6시에 외부 미팅이 있어서.”
새로운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내일은 나 혼자 야간이야. 낮에는 페테르, 밤에는 나. 너는 쉬고.”
“알았어. 그럼 오늘 밤은 둘이서 번갈아 가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채은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숨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침대 위로 돌아가 앉았다.
내일 저녁, 경비는 아틸라 혼자였다. 그리고 낮에는 페테르라는 다른 경비원이 근무했다. 교대 시간은 아마도 오후 6시 전후일 것이었다.
그녀는 이 작은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아직 탈출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언젠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둘째 날이 밝았는지, 아니면 여전히 같은 날 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배식구가 열리고 쟁반 하나가 밀려 들어왔다. 마른 빵 한 조각과 물 한 컵. 그것이 전부였다.
채은은 쟁반을 집어 들며, 배식구 너머로 복도를 보려 애썼다. 그러나 복도는 어두웠고,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식사 시간은 언제예요?”
그녀가 배식구 너머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말 좀 해봐요! 당신도 사람이잖아요!”
잠시 후,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틸라였다.
“오후 6시. 그리고 아침 6시. 하루 두 번.”
그리고 배식구가 닫혔다.
채은은 빵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생각했다. 오후 6시와 오전 6시. 그렇다면 지금은 오후 6시경일 것이었다. 어제 정오에 이 방에 끌려왔으니, 하루를 꼬박 넘긴 30시간이 지났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녀는 물을 조금 마시고, 빵은 반만 남겼다. 다음 식사까지 12시간을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아껴야 했다. 체력도, 정신력도, 그리고 희망도.
그날 밤(혹은 낮), 채은은 잠을 청하지 않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의 시간 감각 상실이 두려웠다. 그녀는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이슈트반의 약점은 무엇일까. 이 건물의 약점은 무엇일까.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그녀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청각은 일반인보다 훨씬 예민했다. 벽 너머에서 들리는 파이프 소리, 바닥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 복도 멀리서 울리는 발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그녀에게는 정보였다.
이 건물의 배수 시스템은 확실히 노후화되어 있었다. 벽에서는 물이 새는 소리가 났고, 바닥의 배수구에서는 간헐적으로 공기가 역류하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큰 비라도 온다면, 이 지하층은 침수될지도 몰랐다. 그것은 위험 요소였지만, 동시에 혼란을 틈탈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는 아까 아틸라가 한 말을 되짚었다. ‘내일 저녁은 나 혼자 야간이야.’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다음 날 저녁, 그러니까 약 24시간 후에는 경비가 단 한 명뿐이라는 뜻이었다.
채은은 눈을 감고 그 정보들을 조립했다. 탈출 계획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이 독방의 문이 열릴 것이고, 그 순간 그녀는 도망칠 것이다. 그녀가 기억해 둔 복도의 방향, 경비원들의 교대 시간, 배수구의 구조.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무기였다.
그녀는 첩보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다. 권총을 쥐어본 적도, 누군가를 때려눕히는 무술을 배운 적도 없는 평범한 유학생일 뿐이었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오로지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갈고닦은 예민한 감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불씨 하나만으로,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아직 인간이었다. 아직 한채은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가볍고 빠른 걸음이었다. 경비원의 구두 소리가 아니었다. 아마도 하녀나 청소부의 실내화 소리일 것이었다. 그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문득 멈췄다.
“여기… 한국 학생 있어요?”
작은 목소리였다. 헝가리어였지만, 채은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채은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네, 저예요. 누구세요?”
“쉿, 조용히. 나는 일디코라고 해요. 이 건물에서 청소를 해요.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피아노 치던 모습…”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도 이 사람들이 싫어요. 하지만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저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일디코 씨, 제발 도와줘요. 경찰에 신고만 해줘도…”
채은이 간절히 속삭였다.
“경찰은 안 돼요. 여기 경찰서장도 이슈트반 씨 VIP 고객이에요. 신고하면 당신이 더 위험해져요.”
일디코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은 있어요.”
배식구가 열리고, 작은 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구겨진 종이 한 장과 볼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걸로 편지를 써요. 내가… 내가 전달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장담은 못 하지만, 방법을 찾아볼게요.”
채은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와 펜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무엇을 써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부모님께? 대사관에? 친구들에게?
그녀는 결국 가장 간단한 문장을 썼다.
“도와주세요. 부다페스트 7구역, 코바치 스파 지하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제 이름은 한채은입니다.”
그리고 그 종이를 다시 배식구 너머로 건넸다.
“고마워요, 일디코 씨. 정말 고마워요.”
“희망을 버리지 마요, 학생.”
일디코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나도 한때 당신 같은 사람이었어요. 아직 살아 있어요. 당신도 살 수 있어요.”
발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채은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작은 희망이 있었다. 일디코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적은 구조 요청 편지가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전달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일디코가 잡히면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희박한 가능성 하나만으로, 채은은 다시 숨 쉴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리스트의 ‘사랑의 꿈’ 3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건반을 눌렀고, 그녀의 귀에는 음악이 울렸다. 이곳은 지옥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직 음악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음악이 살아 있는 한, 그녀도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벽에 붙은 형광등이 한 번 더 깜빡이고, 잠시 완전히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방 안을 뒤덮었다. 그러나 채은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이 어둠을 뚫고 다시 빛을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