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갈림길 위의 낙인
아웃백의 뜨거운 태양은 매일 아침 연우의 살점을 태우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농장에 온 지 불과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연우에게는 그 일주일이 수십 년의 세월처럼 길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것은 때로 축복이 아니라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첫날에는 그토록 끔찍했던 오렌지 나무의 가시와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 그리고 사방을 뒤덮은 파리 떼의 습격이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연우는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파지 오렌지들을 주워 담았다. 손톱 밑은 이미 검붉은 흙때와 오렌지 산성 즙 때문에 까맣게 변해 가죽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육체의 고통 뒤에 찾아오는 정신의 무감각이었다. 매일 밤 본채 건물에서 벌어지는 마크의 강압적인 유린과 가학적인 언사들은 이제 연우의 뇌리에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낮에는 뙤약볕 아래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밤에는 밀폐된 방에서 마크의 성적 노리개가 되는 삶. 연우는 낮 동안 일하면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오렌지를 바구니에 담을 때마다 숫자를 세는 것만이 자신이 아직 미치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멀리서 다른 워커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대만에서 온 린과 일본인 타쿠야 역시 온몸이 먼지로 뒤덮인 채 묵묵히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이 거대한 감옥 안에서 그 누구도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마크의 감시원들에게 ‘탈출 모의’나 ‘집단 반항’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우는 문득 시드니의 푸른 바다와 활기찬 거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뇌리에 남은 것은 오직 사방을 가로막은 철조망과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메마른 붉은 흙, 그리고 자신을 쭝긋하게 내려다보는 마크의 음산한 눈빛뿐이었다. 존엄성을 빼앗긴 인간이 어떻게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지, 연우는 자신의 망가진 손을 보며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주 주말, 농장에는 기묘하고 불길한 활기가 감돌았다. 아웃백 인근에서 다른 대형 목장과 농장을 운영하는 백인 고용주들이 마크의 초대를 받아 본채 건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대한 사륜구동 트럭을 끌고 와 농장 마당에 거칠게 주차한 뒤, 가죽 부츠를 소리 내며 본채로 들어섰다. 낮부터 본채 바비큐장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와 독한 위스키 향이 진동했다. 마크는 연우에게 평소에 입던 작업복 대신, 시드니에서 가져왔던 얇은 원피스를 입고 본채 거실로 오라고 명령했다.
거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연우는 수십 개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자신의 온몸을 발가벗기듯 훑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마크를 포함한 네 명의 백인 남성들은 이미 술에 취해 눈이 풀려 있었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하나같이 사냥용 칼이나 권총 가죽 지갑이 채워져 있어, 은밀한 위압감을 풍겼다. 마크는 뻔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우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 안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이쪽은 내가 최근에 시드니에서 데려온 한국인 유학생이야. 피부가 아주 부드럽고 말도 잘 듣지.” 마크의 자랑 섞인 말에 맞은편에 앉은 뚱뚱한 체구의 목장주 쿱이 음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마크, 자네 혼자만 이런 극상품을 끼고 있다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우리 농장 애들은 벌써 독기가 올라서 쓸모가 없는데 말이야.” 쿱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연우에게 다가와 술을 따르라며 잔을 내밀었다. 그의 두껍고 거친 손가락이 은근슬쩍 연우의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성인 독자들을 겨냥한 자극적이고 불쾌한 긴장감이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그녀의 허리를 쥔 마크의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거부할 경우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상기시키는 잔인한 경고였다. 연우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를 병째 들어 그들의 잔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연우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아웃백이라는 무법지대에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값싼 소유물이자 유흥의 도구에 불과했다.
술자리가 깊어질수록 남성들의 대화는 점점 더 저질스럽고 가학적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농장에서 일하는 유학생들과 불법 체류자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어떻게 그들의 여권을 통제하고 임금을 체불하며 길들였는지에 대해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아웃백의 거대한 농장주 카르텔, 그것이 연우가 갇힌 지옥의 진짜 정체였다.
한참을 즐기던 쿱이 갑자기 마크에게 기괴한 제안을 던졌다. “마크, 이 동양인 여자애가 정말 자네에게 길들여졌는지 궁금하군. 내 농장의 애들은 처음에 순종하는 척하다가 밤에 금고를 털려고 하더군. 이 애의 충성심을 한 번 테스트해 보는 게 어때?” 마크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먹다 남은 스테이크 조각을 거칠게 던져놓더니, 연우의 머리통을 짓누르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연우 양, 쿱이 내 말이 진짜인지 보고 싶어 하네. 무릎 꿇고 바닥에 떨어진 고기를 입으로 받아먹어 봐. 네가 내 밑에서 기어 다니는 개인지, 아니면 아직도 대가리가 깨지지 않은 인간인지 증명해 봐.” 거실 안의 모든 가해자들이 연우를 비웃으며 그 광경을 주시했다. 연우의 온몸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무릎을 꿇고 저들이 던진 고기를 짐승처럼 받아먹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감과 영혼은 완벽하게 살해당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거부한다면, 술에 취한 이 난폭한 포식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유린하고 짓밟을지 알 수 없었다.
“뭐 해? 내 말이 장난 같아?” 마크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걷히고 가학적인 본성이 드러났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바람이 연우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바닥을 향해 거칠게 처박기 시작했다. 연우는 붉은 대지보다 더 잔혹한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이 순간의 행동이 앞으로 이 감옥에서 펼쳐질 그녀의 생존 노선을 결정지을 변곡점이라는 것을, 연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머리칼이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 속에서 연우의 머릿속은 수천 가지 생각으로 소용돌이쳤다. 벼랑 끝에 선 인간의 심리는 극도로 날카롭게 곤두섰다. ‘여기서 저들이 원하는 대로 완벽한 짐승이 되어 고개를 숙여야 할까? 그렇게 하면 마크의 의심을 완전히 지우고, 최소한의 육체적 안전을 보장받으며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는 것, 그것은 이 지옥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생존 방식처럼 보였다. 이미 수많은 피해자가 그 길을 택해 영혼이 죽은 채 살아가지 않던가.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거부감과 반발심이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만약 여기서 한 번 무릎을 꿇고 저들의 노리개가 되는 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인다면, 나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내 신체는 살아남을지언정, 한연우라는 인간의 알맹이는 영원히 이 아웃백의 붉은 흙먼지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연우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마크의 가스라이팅은 연우의 영혼을 통째로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고, 지금 이 시험대는 그 쐐기를 박기 위한 정교한 덫이었다.
주변의 백인 농장주들은 연우의 망설임을 즐기며 위스키를 들이켰다. 쿱은 허리춤의 사냥용 칼을 꺼내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꽂으며 연우를 압박했다. 첩보 영화처럼 극적인 탈출이나 반격은 불가능했다. 연우에게는 무기도 없었고, 도움을 청할 통신기기도 없었으며, 도망쳐봐야 사막의 열기가 그녀를 죽일 것이었다. 오직 가능한 것은 가해자의 비열한 통제 앞에서 자신의 심리적 태도를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굴종하여 노예의 길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의 칼날을 숨긴 채 저항의 불씨를 살려둘 것인가. 연우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마크의 움켜쥔 손아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들이 떠나고 칠흑 같은 아웃백의 밤이 다시 찾아왔을 때, 본채 사무실에는 마크와 연우 두 사람만이 남았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마크는 책상 금고에서 낡은 서류 한 장을 꺼내 연우의 얼굴 앞에 툭 던졌다. 그것은 영어로 빼곡하게 적힌 사설 채무 이행 각서였다.
“연우 양, 오늘 내 체면을 세워준 대가치고는 좀 무거운 선물이 될 거야. 여기 적힌 금액은 네가 그동안 농장에서 축낸 식비와 숙박비, 그리고 비자 알선 수수료 오만 달러다. 여기에 사인해.” 오만 달러. 도저히 평범한 노동으로는 갚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금액이자, 연우를 영원히 이 농장에 묶어두기 위한 노예 문서였다. 마크는 펜을 연우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며, 그녀의 원피스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차가운 서재의 에어컨 바람이 연우의 살갗을 스치며 소름을 돋구었다. 성인 독자층을 저격하는 자극적인 위협과 압도적인 구속감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 문서에 사인하고 나한테 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맹세해. 그러면 난 널 내 특별한 소유물로 인정하고 굶기지 않을 테니까. 만약 거부한다면… 당장 오늘 밤 옷을 모두 벗긴 채 저 굶주린 들개들이 가득한 사막 한가운데로 던져버릴 거야. 선택해, 연우 양. 네 인생의 주인은 이제 내가 되는 거다.”
마크의 차가운 눈빛이 연우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사인하고 완벽한 노예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서명을 거부하고 목숨을 건 반항의 길을 택할 것인가. 연우의 손에 쥐어진 펜끝이 서류 위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문명과 완벽히 차단된 아웃백의 밀폐된 방 안에서, 연우의 잔혹한 운명을 결정할 첫 번째 거대한 분기점이 눈앞에 다가왔다.
당신의 선택은? (1차 분기점)
연우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의 기로입니다. 당신은 어떤 길을 걷겠습니까?
[선택 2] 서명을 거부하고 목숨을 건 반항의 길을 택한다. (무료)
(※ 선택하신 분기점의 다음 화를 결제하시면 연우의 잔혹한 운명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