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빚이라는 이름의 족쇄
오클랜드 시내 베이커리 거리.
유진은 낯선 거리에 서서 자신을 둘러보았다. 베이커리 거리라는 이름과 달리, 이곳에는 빵집이 없었다. 대신 작은 한국 식료품점들과 부동산 중개소, 그리고 간판 없는 사무실들이 줄지어 있었다. 거리는 깨끗해 보였지만, 뭔가 낡은 냄새가 났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이 오히려 그늘을 더 짙게 만들었다.
지민이 유진의 팔꿈치를 살짝 잡아당겼다.
“여기야. 이 건물 3층.”
건물은 외관이 허름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계단은 미끄러웠다. 벽에는 누군가 낙서를 해놓았고, 형광등은 깜빡거렸다.
유진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괜찮은 걸까?
하지만 이미 왔다. 지금 와서 돌아서기는 민망했다. 지민이 소개해준 자리인데, 그녀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었다.
3층에 도착하자, 회색 도색의 문이 하나 보였다. 문에는 아무 간판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사무실 문처럼 보였지만, 유진은 왠지 모르게 그 문 너머로 무언가 위험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민이 노크를 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낮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지민이 문을 열었다.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다. 검은색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비싸 보이는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값비싼 위스키 병과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너머에, 그가 앉아 있었다.
토니.
59세. 한국인. 오클랜드 한인타운에서는 꽤 알려진 사업가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사업을 하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는 유진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유진은 그 미소 아래 숨겨진 무엇인가를 읽을 수 없었다. 아직은.
“어, 이게 유진이야? 와, 정말 예쁘네. 지민아, 네 룸메이트가 이렇게 예쁠 줄 몰랐어.”
토니가 일어나 유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거칠었다. 오랜 세월 무언가를 쥐고 일해온 사람의 손이었다. 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유진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앉아. 무슨 그렇게 격식을 차려. 여기는 편하게 와서 얘기하는 곳이야.”
토니가 소파를 가리켰다. 유진과 지민이 나란히 앉았다. 토니는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뭐 마실래? 커피? 아니면 차? 여기 한국에서 직수입한 녹차도 있어.”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손님이 왔는데 대접을 해야지.”
토니는 직접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내렸다. 그 모습은 생각보다 소탈해 보였다.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편안했다. 유진은 조금 긴장이 풀렸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가?
하지만 그 생각이 독이었다.
토니가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향이 진했다. 비싼 원두를 쓰는 것 같았다.
“자, 마셔봐. 내가 직접 내린 거야. 괜찮을 거야.”
유진은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지만 은은한 단맛이 났다.
“듣기로는, 유진 씨가 돈이 좀 필요하다고?”
토니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돌려말하지 않았다. 직설적이었다.
“네… 학비와 생활비가 좀 부족해서요.”
“아, 그래. 유학생들이 다 그렇지. 외국 와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아. 나도 젊을 때는 다 해봤어. 너처럼 힘들었지.”
토니는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가난하게 유학 와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는 말을 잘했다. 듣다 보면 어느새 그의 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유진 씨.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
토니가 책상 위의 서류뭉치를 집어 들었다. 유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출 계약서처럼 보이는 문서였다.
“5천 달러. 지금 당장 빌려줄 수 있어. 조건도 좋아. 다음 달까지 갚으면 돼. 이자는… 받지 않을게. 처음이니까.”
5천 달러.
유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돈이면 다음 달 학비는 해결된다. 생활비도 조금 남을 것이다.
“이자는… 없나요?”
“응. 처음이라고 했잖아. 나는 원래 사람 좋아. 너 같은 학생 보면 도와주고 싶어.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까, 서로 좋게 좋게 지내자는 거야.”
토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조건은 간단해. 앞으로 우리 파티에 가끔 얼굴 좀 비춰주는 거야. 소라가 잘 챙겨줄 거야. 어렵지 않아. 너도 저번에 가봤잖아? 그냥 술 마시고, 사람들이랑 얘기하고, 웃고. 그게 다야.”
유진은 지민을 돌아보았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도 그렇게 시작했어. 아무 일 없어.”
지민의 말에 유진은 조금 더 마음이 놓였다. 룸메이트도 한다는데, 뭐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요?”
유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토니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여기,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돼. 간단해.”
토니가 서류를 건넸다. 유진은 서류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류는 영어로 되어 있었다. 평소 영어에 자신 있던 유진이었지만, 법률 용어는 낯설었다. ‘Default interest’, ‘Collateral’, ‘Lien’… 이런 단어들은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이 없었다.
“이 부분이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유진이 물었다. 토니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그런 건 걱정 마. 법적인 형식일 뿐이야. 실제로는 내가 사람 좋아서 해주는 거라서, 그런 조항은 신경 안 써도 돼.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유진은 망설였다. 하지만 토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 같은 학생이 무슨 문제가 있겠어? 다음 달에 돈만 잘 갚으면 그만이야. 그런데 말이야…”
토니가 잠시 멈췄다.
“만약에… 다음 달에 돈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될까?”
유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데 나는 그런 걱정 안 해. 너 같으면 잘 갚을 수 있을 거야. 파티에서 돈도 벌고, 알바도 하고. 충분히 가능해.”
토니는 펜을 건넸다.
유진은 펜을 받아 들었다.
서류 맨 아래, 서명란.
손이 떨렸다.
지민이 유진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괜찮아. 다 처음에는 떨려. 나도 그랬어.”
유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사인했다.
유진.
그 순간, 유진은 몰랐다. 그 서명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그 몇 개의 알파벳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지.
토니가 서류를 건네받아 살펴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아까와는 달랐다. 무언가를 얻어낸 사람의, 포식자의 미소였다.
“잘했어. 앞으로 잘 부탁해, 유진 씨.”
토니가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그 손을 잡았다. 악수는 강했다. 악력이 남달랐다.
“그럼, 돈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
“지금 줄게. 현금으로.”
토니는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50달러짜리 지폐가 백 장 들어 있었다. 5천 달러.
유진은 그 봉투를 받아 들었다. 손에 느껴지는 무게. 이 무게가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무게로 돌아올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다시 파티가 열렸다.
이번에는 유진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젠 빚을 졌으니까. 그리고 빚을 갚아야 하니까.
파티 장소는 저번과 같은 클럽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조금 더 격해졌다. 사람들 사이에선 뭔가 조용히 거래되는 물건들이 있는 것 같았다. 유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소라는 유진을 반겼다.
“왔어? 오늘도 예쁘다. 역시 내가 데려온 애가 다르네.”
소라는 유진에게 샴페인을 건넸다. 유진은 받아 마셨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파티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보였다. 그 중에는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다니엘. 그는 현지인처럼 보였지만,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다.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세련된 옷차림에 부드러운 미소.
“안녕, 네가 유진이지? 소라한테 들었어.”
다니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유진은 긴장하며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편하게 말해. 나도 너처럼 유학생 출신이야. 그래서 네가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아.”
다니엘은 유진의 바로 옆에 앉았다. 너무 가까웠다. 유진은 살짝 몸을 피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요즘 스트레스는 없어? 공부하느라 힘들지?”
“조금요. 돈 걱정도 있고…”
“아, 돈. 그게 다 문제지. 그런데 말이야, 유진아. 스트레스 푸는 방법 하나 알려줄까?”
다니엘이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 하나를 꺼냈다. 하얀색이었다. 작고 동그란.
“이거 먹어봐. 기분이 확 풀릴 거야. 여기 사람들 다 해. 나도 해.”
유진은 알약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마약.
“저… 그런 건 안 될 것 같아요.”
“왜? 무서워? 아니야. 이건 약이야.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이랑 똑같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다니엘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달랐다.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
지민이 그때 다가왔다.
“다니엘, 너 또 그러는 거야? 유진이는 처음이야. 좀 배려해줘.”
지민이 유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유진아, 이리 와. 저 사람은 좀 그래. 우리 다른 데 가자.”
유진은 지민을 따라 그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뒤에서 다니엘의 시선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소라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유진이 보지 못한 곳에서,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침대에 누워 오늘 일을 곱씹었다. 다니엘의 알약. 그의 부드럽지만 집요한 태도. 토니의 서류. 이해할 수 없는 영어 조항들.
“지민아.”
“응?”
“오늘 그 다니엘이라는 사람… 그 알약 뭐야?”
지민은 잠시 침묵했다.
“글쎄… 그냥 기분 좋아지는 약이래.”
“마약 아니야?”
“…”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서 일어나 유진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유진아, 말해줄게. 그런데 놀라지 마.”
유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건 MDMA라고 불리는 약이야. ‘엑스터시’라고도 해. 마약 맞아.”
유진은 숨을 삼켰다. 예감이 맞았다. 그런데 왜 지민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걸까?
“너도 해? 그 약?”
지민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유진은 지민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처음에는 나도 무서웠어. 그런데 한 번 하고 나니까… 모든 게 괜찮아지는 거야. 돈 걱정, 공부 걱정, 미래 걱정… 그런 게 다 사라져. 그냥 그 순간,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
“그런데 그게 중독되는 거 아니야?”
“중독? 그런 것도 있어. 그런데… 어쩌겠어. 이미 시작했는데.”
지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유진은 그녀에게서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지민은 이미 깊이 빠져 있었다. 자신이 빠져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유진아, 너는 하지 마. 아직은.”
지민의 말에 유진은 놀랐다.
“왜? 너는 하라고 했잖아.”
“그건…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어. 그런데 점점… 말하기 힘들어.”
지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유진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번 돈은 2백 달러. 토니에게 빌린 5천 달러. 다음 달까지 갚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처럼 파티에 나가면 한 달에 천 달러도 벌기 힘들다.
유진은 생각했다.
다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머리가 복잡했다.
그날 밤, 유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