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잔혹사 한국편 #001] 강남 외식업 카르텔 – 2화: 족쇄가 된 계약서 (실제 사건 파일 기반 각색)

제2화: 족쇄가 된 계약서

 청담동의 한 층을 통째로 쓰는 사무실. 빌딩 외벽에 걸린 간판은 얼핏 보기에 아주 건실하고 번듯한 ‘자산관리 법인’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백 개씩 생기고 없어지는 평범한 금융 대행업체나 투자 자문사처럼 위장한 형태였다.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테헤란로에서 이 정도의 껍데기를 씌우는 것은 음지의 인간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양복을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서류 가방을 들고 오가는, 지극히 건실하고 평범한 금융 대행업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 화려한 빌딩 숲의 한복판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지하 자금의 둥지가 틀어져 있을 줄은 지상의 법을 믿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꺼운 방음 유리문을 열고 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피부에 닿는 촉감과 코끝을 찌르는 공기는 완연한 무법지대의 그것이었다. 빌딩의 수려하고 현대적인 외관이 무색해질 정도로 내부의 대기는 무겁고 음산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방이 두꺼운 콘크리트와 방음벽으로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 그 안에는 지상의 태양 빛 대신 인공적인 간접 조명만이 어스름하게 켜져 있었고, 공조 시스템이 겨우 돌아가는 폐쇄된 공간 안에는 짙고 매캐한 최고급 시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독한 연기는 유령처럼 일렁이며 천장의 조명 빛을 흐리게 만들었고, 처음 방문한 사람의 눈과 목을 따갑게 찔러왔다. 지상의 법과 상식이 완전히 통하지 않는 곳, 오직 돈의 힘과 폭력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음지의 세계가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사방이 차단된 듯한 기이한 적막감 속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추악하고 노골적인 욕망이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형태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자욱한 시가 연기 한가운데, 이탈리아제 고급 맞춤 수트를 실루엣 하나 흐트러짐 없이 매끄럽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아현을 맞이했다. 그가 바로 이 사채 조직의 실질적 총책, 강태훈이었다. 그는 보이기로는 사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언뜻 보면 유학파 출신의 젊은 펀드 매니저나 벤처 투자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서글서글하고 호감 가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 나이는 오십대 중반으로 알고 있었다.

 남을 칭찬하는 데 익숙한 부드러운 입매와 단정한 헤어스타일은 그를 완벽한 비즈니스맨으로 포장해 주었다. 아현이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자리에서 가볍게 상체를 일으키며 아주 세련되고 정중한 매너로 목례를 건넸다. 미소 띤 얼굴과 부드러운 몸짓은 상대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계산된 위장이자 껍데기일 뿐이었다. 태훈이 고개를 까딱이거나 팔을 움직일 때마다, 하얗고 매끄러운 와이셔츠 깃과 소매 사이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야수 같은 먹색 문신의 날카로운 꼬리들이 보는 이의 숨통을 은근하게 조여왔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턱밑에서 멈춘 검은 잉크의 흔적들은 그가 결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진짜 민낯이었다.

 무엇보다 아현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은 것은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입꼬리는 호의적으로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와 마주한 두 눈동자만큼은 생명체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따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눈은 마치 사막의 밤처럼 냉혹했다. 상대의 처지와 약점, 공포의 깊이까지 단숨에 꿰뚫어 보고 가치를 매기는 듯한 잔인하고 철저한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아현은 그 눈빛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척추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고, 자신이 거대한 맹수의 우리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왔음을 온몸으로 직감했다.

 태훈은 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손짓을 했다. 긴 대화조차 필요 없다는 듯 오만하고 간결한 몸짓이었다. 그러자 넓은 접견실의 어두운 구석, 마치 가구처럼 미동도 없이 버티고 서 있던 거구의 사내 중 한 명이 묵직한 걸음으로 탁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의 손에는 한눈에 보아도 최고급 재질로 만들어진, 윤기가 흐르는 악어 가죽으로 된 무겁고 커다란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사내의 거대한 체구와 대조되는 매끄러운 가죽 가방은 그 자체로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사내는 아현의 바로 코앞에 있는 대리석 탁자 위에 가방을 쿵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내려놓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파장음이 폐쇄된 방 안의 정적을 사정없이 깨뜨리며 아현의 고막과 심장을 무겁게 타격했다.

 금속으로 된 잠금장치가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을 내며 양옆으로 열리자, 가방의 두꺼운 덮개가 위로 제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현의 눈앞에 초록색 5만 원 권 지폐 다발이 틈새도 없이 빼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일정한 두께로 단단하게 묶인 은행 띠지가 신권 특유의 빳빳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사방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사채업자들의 손을 거쳐 간 흔적이 없는, 오직 아현만을 위해 급조된 조폐창의 잉크 냄새가 매캐한 시가 연기와 섞여 코끝을 찔렀다.

 띠지로 묶인 빳빳한 현금 총 2억 원. 지상에서는 그토록 구하기 힘들고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던 그 거금이, 이 어두운 지하의 탁자 위에서는 고작 가방 하나를 채우는 부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기괴했다. ‘이 돈이면 내가 살아날 수 있다.’ 아현의 마음속엔 이미 살 길이 보이는 듯 했다.

 그 압도적인 초록색 지폐의 물결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아현은 머릿속의 모든 이성을 단숨에 마비시키는 강렬하고 압도적인 안도감을 느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목을 죄어오던 부도의 공포와 전신을 지배하던 극심한 편두통이 그 초록색 불빛 앞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 숨통이 트였다. 저 돈만 있으면 내일 아침의 파산을 막을 수 있다. 당장 몇 시간 뒤면 도래하여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주류 공급업체의 어음 결제 대금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 거래처들의 연쇄 압류를 막아내고 가맹점주들의 입을 다물게 하면, 평생을 바쳐 일구어온 ‘벨벳’과 프랜차이즈 매장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상 궤도로 돌아올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강남의 여왕으로 당당하게 교차로를 누빌 수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환상이 뇌리를 스쳤다. 눈앞의 현금은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더 강렬한 생명줄로 다가왔다.

 아현의 시선이 가방 속 현금 다발에 못 박힌 듯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사이, 강태훈은 그 모습을 아주 흥미롭다는 듯 관찰하며 얇은 계약서 몇 장을 그녀의 앞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종이가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뱀이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처럼 아현의 신경을 자극했다.

“안 대표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셔야죠. 저희는 은행처럼 딱딱하고 복잡한 서류 절차나 신용조회 같은 거 일절 안 따집니다. 그런 거 하다가 내일 아침에 부도나면 아무 소용 없잖아요? 여기 간단한 계약서에 사인하시고 인감만 딱 찍으시면, 이 가방 그대로 들고 나가시면 됩니다. 아주 깔끔하죠?”

 태훈의 목소리는 유흥가 VIP 룸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급 서비스처럼 부드럽고 친절하게 아현의 귓가를 맴돌았다. 자상한 구원자의 목소리 같았지만,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무서운 통제력이 실려 있었다.

 아현은 마른침을 한 번 크게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의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빳빳한 종이의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자, 방금 전 돈 가방을 보며 느꼈던 환각 같은 안도감이 순식간에 벗겨지며 서늘한 현실이 찾아왔다. 종이 냄새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백색 용지 위에 정교하게 인쇄된 검은 글자들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눈동자가 이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류에 적힌 대출 조건과 이율은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상의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법정 최고 제한세율 따위는 가볍게 씹어 삼킨, 연이율로 환산하면 무려 수천 퍼센트에 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리였다. 원금보다 일주일 뒤에 당장 선지급 형식으로 갚아야 할 이자 금액만 해도 일반 직장인의 몇 년 치 연봉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진짜 아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것은 숨이 막히는 이자율이 아니었다. 계약서 맨 아래쪽, 마치 경고장처럼 유독 독하게 붉은 글씨로 채워진 ‘특약 사항’ 단 한 줄의 문장이었다.

 [특약 사항] 채무자는 약정된 기일과 시간 내에 원리금 상환을 완료해야 하며, 상환이 단 1분이라도 지연될 경우, 채무자 안아현이 보유한 법인의 주식 지분 100%와 매장 전체의 운영권 및 경영권을 채권자에게 담보물로서 무상 양도 및 승계한다. 본 조항은 어떠한 동시이행 항변권도 인정하지 아니한다.

 붉은 글씨들이 아현의 시야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핏줄처럼 번뜩였다. 단 1분의 지연도 용납하지 않으며, 만에 하나 어길 시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단돈 2억 원에 통째로 넘기라는 독소 조항이었다. 법적인 방어벽마저 전면 차단해 버린 잔인한 문구였다.

“강 사장님, 이건… 이건 조건이 너무 가혹하잖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지분 100%에 경영권 전체라니요? 제가 수년간 하루에 세 시간씩 자 가면서, 청춘을 다 바치고 피땀 흘려 만든 브랜드입니다. 지금 벨벳과 청담야성 프랜차이즈의 전체 매장 가치만 해도 강남 바닥에서 최소 수십 억이 넘어요. 그런데 고작 단 1분이 밀렸다고 이 모든 걸 대가도 없이 무상으로 넘기라는 건 말도 안 돼요. 이건 돈을 빌려주겠다는 게 아니라, 내 회사를 통째로 빼앗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아현이 격분한 목소리로 계약서를 대리석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 안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순간, 방 안을 부드럽게 감돌던 미적지근한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구석에 있던 마 실장은 숨을 죽인 채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태훈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비즈니스맨 특유의 싱글벙글한 미소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시가를 크리스탈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며, 매서운 안광을 빛내며 서서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보여주던 세련된 금융업자의 가면이 완전히 벗겨지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조폭의 민낯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말이 왜 안 됩니까, 안 대표님?”

 태훈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지옥 저 밑바닥에서 긁어 올리는 것처럼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음성이 사방이 막힌 접견실 내부의 벽을 타고 웅웅거리며 울렸다. 마치 맹수가 포효하기 직전 내는 나직한 으르렁거림 같았다. 동시에 어두운 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거구의 조폭 두 명이 아현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바짝 다가와 섰다. 그들의 거대한 체구가 아현의 머리 위로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방 안은 숨이 막힐 듯한 극심한 폐쇄감과 위압감으로 가득 찼다. 거구들의 거친 숨소리가 아현의 귓가를 자극하며 공포를 극대화했다.

“우리가 무슨 동사무소나 자선사업 단체인 줄 압니까? 나라에서 고강도 세무 조사 처맞고, 주거래 은행에서도 쓰레기 취급당해서 당장 몇 시간 뒤면 길바닥에 나앉을 인간한테 아무 대가 없이 생현금 2억을 툭 던져주는 바보가 이 강남 바닥에 있냐고. 우리는 안 대표의 껍데기뿐인 신용이 아니라, 안 대표가 가진 그 수십 억짜리 매장 가치를 보고 돈을 대주는 거야. 리스크를 지는 건 우리인데 이 정도 안전장치도 안 해둘 줄 알았습니까? 싫으면 관두세요. 구걸하듯 징징대지 말고. 애들아, 돈 가방 닫아라.”

태훈의 서슬 퍼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검은 수트를 입은 조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 위의 악어 가죽 가방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으려 했다.

 눈앞에서 초록색 지폐 다발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려는 찰나, 아현은 이성을 잃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가방 모서리를 꽉 붙잡았다. “잠깐만요…!” 가방을 붙잡은 아현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린 채 미치도록 떨렸다. 머릿속이 거대한 폭풍을 맞은 것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여기서 이 돈 가방이 완전히 닫히고 자신이 이 무법지대의 문을 나서면 어떻게 될까. 당장 몇 시간 뒤면 도래할 오전 10시의 어음 부도 고지서, 밀려드는 주류업체와 인테리어 업자들의 연쇄적인 자산 압류, 프랜차이즈 본사의 파산을 안 가맹점주들의 분노 섞인 소송, 그리고 강남의 화려한 여왕에서 하루아침에 천박한 사기꾼이자 파산자로 추락해 길바닥에 나앉을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파멸의 공포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자존심보다 생존이 먼저였다.

“안 대표님, 잘 생각해요.”

 아현이 완전히 코너에 몰려 흔들리는 것을 포착한 태훈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나직하게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그의 음성은 독사처럼 부드럽고 매혹적으로 아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시 비즈니스맨의 가면을 쓰는 그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다정했다.

“제날짜와 제 시간에 돈만 딱 맞춰서 갚으면, 이 특약 사항이니 지분 양도니 하는 계약서는 그냥 불태워버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합니다. 내가 안 대표 능력을 모를까 봐 이래? 강남에서 그 고생을 하고 벨벳을 이만큼 키워낸 안 대표 수완이면, 일주일 동안 어디서든 2억 못 구하겠습니까? 일단 숨통만 트이면 금방 회수할 텐데. 내일 아침에 부도 맞아서 인생 종칠래요, 아니면 깔끔하게 돈 갚고 네 왕국을 지킬래요? 선택은 내가 아니라 안 대표님이 하시는 겁니다.”

 공포는 인간의 이성과 눈을 완벽하게 멀게 만들고, 사채업자들은 그 공포를 먹고 자란다. 일주일이면 충분히 매출을 수거할 수 있다, 제때 갚으면 그만이다. 아현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극한의 압박감과 파산의 공포 속에서, 스스로를 속이는 최면을 걸며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개인 인감도장을 꺼냈다. 도장의 차가운 금속 재질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손끝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도장을 쥐어짜듯 움켜쥔 채, 피 같은 인감도장을 계약서 종이 위로 쾅, 쾅, 찍어내렸다. 서류 위에 붉은 인감 자국이 선명하고 섬뜩하게 박히는 순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강태훈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쓱 올라갔다. 그것은 사냥을 끝낸 맹수의 미소였다. 계약서에 찍힌 붉은 자국들은 아현의 눈에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옥죄는 선혈처럼 보였다. 그것이 자신의 목을 완벽하게 올가미 죄어 무덤으로 이끌 줄은, 안아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뒤돌아볼 수 없는 파멸의 계약이 성립된 방 안에는 자욱한 시가 연기만이 유령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아현의 손에는 무거운 쇠사슬이 채워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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