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깨져버린 방패, 신뢰의 대가
아현은 사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냘픈 휴대폰을 쥐었다. 액정의 거친 백라이트가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을 유령처럼 비추고 있었다.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지던 강태훈의 비열한 웃음소리와 서늘한 협박이 여전히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며 뇌리를 난도질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찾아야만 이 숨 막히는 수렁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친구 민석. 대학 시절 그 풋풋하고 찬란했던 봄날부터 언제나 아현의 곁을 묵묵히 지켰고, 그녀가 연고도 없는 거친 강남 바닥에서 대형 라운지 바 ‘벨벳’을 일구어 나가는 모진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응원하고 밤새 함께 고민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민석은 현재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일하며 늘 이성적이고 예리한 판단력으로 아현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던 존재였다. 아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 속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들려오는 민석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현은 참았던 눈물과 비명을 터뜨렸다.
“민석아…… 나 어떡해. 나 진짜 큰일 났어. 제발 나 좀 살려줘…….”
한밤중, 수화기 너머로 찢어지는 듯한 아현의 절규 섞인 전화를 받은 민석은 앞뒤 재지 않고 단 15분 만에 아현의 청담동 사무실로 달려왔다. 조폭들의 거친 군홧발에 무참히 부서진 마호가니 문짝과 사방으로 흩어져 엉망진창 난장판이 된 사무실 풍경, 그리고 그 차가운 잔해 한구석에서 전신을 사들사들 떨며 초점 없는 눈으로 공포에 질려 있는 아현을 본 순간, 민석의 이성적이던 눈빛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아현은 민석의 넓은 품에 안겨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지난 일주일 동안 자신을 조여왔던 지옥 같은 상황들을 핏방울을 토해내듯 쏟아냈다. 악마 같은 사채업자들의 덫, 강제로 도장을 찍게 만든 독소 조항, 하루아침에 묶여버린 주거래 계좌 해지, 그리고 강태훈이라는 거대하고 기괴한 괴물의 실체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이 새끼들…… 이거 완전히 사람이 아니네. 아현아, 정신 바짝 차려. 걱정하지 마. 이딴 사기로 엮은 종이 쪼가리 계약서, 법적으로 따지면 아무런 효력도 없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지켜줄 테니까 내 품에서 마음 놓아. 그리고, 통화 내역하고, 가진 모든 자료를 다 나한테 줘.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꼐”
민석의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단호하고 묵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현은 그제야 굳어있던 폐부 깊숙이 숨을 크게 내뱉을 수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아주 잠깐은 치워지는 것만 같았다. 민석은 충격으로 넋이 나간 아현을 우선 안전한 자신의 역삼동 오피스텔로 데려가 따뜻한 물을 먹이며 진정시켰다. 그리고 강태훈의 무리들이 강탈해 간 서류들의 사본과 계약 조항을 면밀히 검토하기 위해, 잠시 서류 뭉치를 챙기러 근처에 있는 자신의 본가 집으로 향했다. 아현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문을 닫고 나간 그 걸음이, 두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밤 11시 30분. 민석의 오피스텔로 돌아오는 길목에 위치한 한적하고 외진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주위를 기괴하게 비추는 그 음습한 공간에, 거대한 덩치의 검은색 카니발 두 대가 시동을 끈 채 소리 없이 멈춰 서 있었다. 짙게 선팅된 차창 틈새로는 매캐한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낮게 깔려 흘러나왔고, 차 안의 시트 깊숙이 몸을 묻은 사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골목길의 유일한 진입로를 뱀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아현에게 보여줄 법적 검토 자료를 가죽 가방 가득 챙긴 민석이 자신의 차에서 내려 현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바로 그 찰나, 정적을 깨뜨리며 카니발의 슬라이딩 도어가 동시에 거칠게 열렸다.
“야, 너. 잠깐 얘기 좀 하자.”
민석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허공을 가른 육중한 주먹이 그의 안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악, 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민석은 시멘트 바닥 위로 거꾸러지며 처박혔다. 훗날 작성된 수사 기록과 첩보에 따르면, 민석을 습격한 가해자들은 강태훈의 명령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MZ세대 조직폭력배들로 구성된 사설 ‘집행조’였다. 이들은 단순히 흥분해서 주먹을 휘두르는 야만적인 싸움꾼들이 아니었다. 인간의 신체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여, 어디를 때려야 외상 없이 가장 극심한 고통을 줄 수 있고 어디를 어떻게 부러뜨려야 평생 회복 불가능한 영구적인 장애를 남길 수 있는지 정확히 아는, 고도로 훈련된 폭력의 전문가들이었다.
“아현이가 너한테 다 불었나 봐? 아유, 우리 여사장이 보기보다 입이 참 가볍네. 지 혼자 죽기 억울하니까 지 손으로 남친 인생까지 아주 깔끔하게 조지려고 작정을 했어, 안 그래?”
강태훈의 잔인한 오른팔로 불리는 집행조의 행동대장이 쓰러진 민석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올렸다. 민석은 입가에서 왈칵 쏟아지는 피를 뱉어내며 어떻게든 저항하려 몸부림쳤지만, 등 뒤의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날아든 묵직한 쇠파이프가 그의 척추 부근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쿵! 하는 둔탁하고 끔찍한 타격음이 좁은 골목길의 정적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사지가 마비되는 듯한 극통에 민석의 동공이 뒤집혔다. 폭행은 무려 10분간이나 은밀하고 잔혹하게 이어졌다. 그들은 민석의 처절한 비명이 골목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흙먼지 묻은 장갑과 천 조각으로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 묵직한 야구 배트를 휘둘러 그의 사지를 하나씩 조직적으로 부러뜨려 나갔다. 특히 민석이 강태훈 일당의 계약서를 분석하겠다며 서류를 움켜쥐고 휘두르려 했던 오른팔은, 뼈가 조각나고 근육이 파열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으깨졌다. 마지막 낙인을 찍은 조직원은 피 떡이 된 채 신음하는 민석의 귀에 대고 낮고 차갑게 속삭였다.
“너희 같은 먹물 샌님들이 법이니 상식이니 떠들면서 개기는 거, 우리 태훈 형님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시거든. 똑똑히 기억해라. 그리고 네 년한테 전해. 다음에 또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그땐 네 놈 제삿날이 아니라 부모 놈들 제삿날이 될 거라고. 우리들이 못할 것 같아?”
새벽 2시. 강남의 한 대형 대학병원 응급실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이들의 비명과 분주한 발걸음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민석을 기다리다 연락을 받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병원으로 달려온 아현은, 잠시 후 구급대원들에 의해 피범벅이 된 채 카트에 실려 들어오는 민석의 모습을 마주했다. 그 순간 아현은 머리 회로가 통째로 끊어지는 듯한 충격 속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대신 실성한 듯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 때문에, 나를 지켜주겠다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저 모양이 되었다는 극도의 죄책감이 그녀의 중추신경을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나를 지켜주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든든한 방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민석의 얼굴은 피와 심한 붓기, 멍 때문에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환자분, 전신 다발성 골절에 두개골 미세 골절, 그리고 내부 장기 파열, 특히 비장 파열이 너무 심합니다. 1분 1초가 급해요. 당장 응급 수술실 잡고 들어갑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다급한 고함과 분주한 움직임도 아현의 귀에는 수중에서 들려오는 듯 웅웅거리는 잡음으로 치환될 뿐이었다. 민석이 붉은 핏자국을 남기며 수술실 안으로 무력하게 실려 들어간 뒤, 아현은 홀로 텅 빈 복도 철제 의자에 앉아 손톱이 두피를 파고들 정도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바로 그때, 병원의 차가운 소독약 냄새를 뚫고 아현의 코끝으로 지독하리만치 익숙하고 역한 프리미엄 시가 타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스르륵,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한 치의 구겨짐도 없는 깔끔한 명품 수트 차림을 한 강태훈이 한 손에는 따뜻한 캔 커피 두 잔을 든 채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불의의 사고를 당한 친구의 문병이라도 온 다정한 지인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태연하게 아현의 바로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거봐, 아현아. 내가 처음부터 조용히 순리대로 가자고 했잖아. 왜 내 말을 귓등으로 들어서 저 멀쩡하고 똑똑한 새끼 인생을 한순간에 불구로 만들어 버려, 응? 네가 욕심을 부리니까 주변 사람들이 피를 보는 거야.”
강태훈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그는 온기가 남은 커피 캔 하나를 아현의 떨리는 손에 억지로 쥐여주며,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최신형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아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수술실 앞 대기 공간에서 세상을 잃은 듯 오열하고 있는 민석의 늙은 부모님의 실시간 모습이었다.
“우리 애들이 지금 여기 병원 로비에도 깔려 있고, 저기 사진에 보이는 부모님 댁 앞마당에도 가 있거든. 아현아, 네가 지금 당장 눈 뒤집혀서 저기 있는 경찰한테 ‘조폭한테 남친이 맞았어요’라고 입을 여는 순간, 저 불쌍한 노인네들도 한 시간 뒤에 남친 바로 옆 침대로 나란히 배정받는 거야. 내 말이 장난 같아 보이지?”
아현은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숨도 쉬지 못하고 벌벌 떠는 아현의 턱을, 강태훈은 굳은살 박힌 손가락으로 거칠게 잡아채 강제로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그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시커먼 동공 안에는 인간을 통째로 갈아 마시는 거대한 심연 같은 잔혹함이 시퍼렇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강태훈은 아현의 턱을 쥔 손귀에 힘을 주며, 그녀의 귓가에 뱀이 기어가듯 낮고 음산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네 남친 새끼 목숨줄이라도 살리고 싶지? 그럼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토 달지 말고. 너는 지금 벨벳 사장 같은 거 아냐. 우리 가게 밑바닥에서 구르는 ‘마담’이야. 네가 싸지른 그 수억 원의 빚, 온몸으로 구르면서 떼워야지 안 그래?”
이 새벽의 잔혹한 협박은 아현의 내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실말 같은 저항 의지를 완전히 말살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민석은 무려 12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간신히 고비는 넘겼지만, 무자비하게 으깨진 오른쪽 팔의 주 신경들이 전부 괴사하여 다시는 예전처럼 무거운 물건을 쥐거나 섬세하게 손을 쓰기 힘들다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았다. 아현을 지켜주겠다던 청년의 꿈이 조폭들의 폭력 아래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현은 강태훈이 내민 새로운 계약서 위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명했다. 이번 계약서는 지난번의 지분 포기각서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의 명의, 신체, 그리고 인신(人身) 자체를 사채 조직에 귀속시키는 명백한 현대판 노예 계약이었다.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것에 대한 형벌이었다.
밤마다 아현은 병실을 지키며 그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강태훈의 부하들은 면회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짐짝처럼 강제로 끌어내어 벨벳의 가장 어둡고 은밀한 VIP 룸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화려하고 살결이 비치는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 때문에 평생 불구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는 연인을 떠올리며 사채업자들이 데려온 정·재계 손님들에게 비굴하게 웃으며 독한 술을 따라야 했다.
병원의 하얀 로비와 벨벳의 출입구에는 항상 덩치 큰 조폭들이 상주하며 아현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했다. 게다가 아들의 참변을 전해 들은 민석의 부모님은 아현이 민석의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망쳐놓았다며 울부짖었고, 그녀를 향해 오물을 던지며 병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차단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이들에게 조차 철저하게 버림받은 아현은, 사방이 칼날 같은 바다로 둘러싸인 가장 외롭고 고립된 섬이 되어 홀로 썩어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이…… 이렇게나 잔인하고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차라리 내 목이 찢어지더라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을 거야.”
새벽 3시의 고요를 깨뜨리며, 아현은 벨벳 내부의 화려한 화장실 대리석 변기를 붙잡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류하는 피 냄새 섞인 시커먼 담즙을 토해냈다. 위장이 뒤틀리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쏟아져 나온 액체가 변기 밑바닥을 더럽혔다. 독한 양주와 룸 안을 가득 채웠던 사내들의 추악한 냄새가 위장에 섞여 들어가 그녀의 육체를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눈물이 고인 채 간신히 고개를 들어 마주한 세면대의 대형 사면 거울 속에는, 더 이상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성공한 여사장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울 안에서 초점을 잃고 서 있는 생명체는 오직 목숨보다 사랑했던 연인의 인생과 미래를 제물로 바치고, 그 대가로 겨우 숨만 쉬며 연명하고 있는 영혼이 거세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강태훈과 사채 카르텔이 촘촘하게 짜 놓은 덫은 이제 그녀의 목덜미를 넘어, 심장과 골수까지 파고들어 단 한 조각의 지성마저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강남의 밤을 수놓은 화려하고 찬란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 안아현이라는 인간을 철저히 해체하기 위한 또 다른 막장 지옥의 서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갈망했던 도움의 대가는 가장 소중한 이의 붉은 피였고, 맹목적으로 의지했던 신뢰의 결과는 오직 뼈를 깎는 파멸뿐이었다. 깨져버린 방패의 파편은 고스란히 아현의 심장에 박혀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흉터를 남겼다.
화장실 문밖에서 그녀를 감시하던 행동대원의 거친 노크 소리가 문짝을 흔들었다. 다음 VIP 룸의 추악한 사내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현은 붉게 물든 입술을 떨며 다시 가면 같은 화장을 고쳐 잡았다. 수렁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었고, 그녀를 구원할 그 어떤 빛도 강남의 밤거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제5-2화로 이어집니다. 인질이 된 민석과 아현의 강제 수렁 가속화 경로]